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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러시아소설
· ISBN : 9788996771821
· 쪽수 : 280쪽
· 출판일 : 2012-11-05
책 소개
목차
등장인물
여기에 고요한 노을이…
에필로그
옮긴이의 말
지은이의 삶과 작품
리뷰
책속에서
고요하고 적막한 백야가 이어지고 있었다. 저녁노을에서 아침노을까지 긴긴밤의 어스름은 물기를 담뿍 머금은 풀잎에서 번질번질 흘러나오는 진한 침출액에 흠뻑 젖어 있는데, 소방장비 보관 창고에 기거하는 여군 고사기관포 사수들은 새벽녘 수탉이 두 번째로 푸드덕 홰를 치며 목청을 힘껏 뽑아 올릴 때까지 밤새도록 노래를 불렀다. 이제 리따의 은밀한 행적은 공공연한 비밀이 되어 있었다. 바스꼬프만 까맣게 모르고 있을 뿐이었다. 이틀 밤이 지나 사흘째 되던 날, 리따는 저녁식사가 끝나기 무섭게 종적을 감춘 뒤 다음날 아침 기상나팔 소리가 들리기 직전에야 병영 막사로 돌아왔다.
리따는 그렇게 돌아오는 것을 가장 좋아했다. 순찰대에 발각되기 쉬운 위험한 시간대는 이미 지나 이제는 마음을 놓고 걸을 수 있었다. 끈이 달린 군화 두 짝을 벗어 등 뒤로 둘러매고 터벅터벅 걸었다. 앞으로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물이 흥건하게 고인 질펀한 풀밭에서 절버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차디찬 새벽이슬에 젖은 맨발이 칼로 도려내듯 시렸다. 리따는 그날 있었던 가족과의 만남에 대해, 친정어머니의 애처로운 하소연에 대해, 다음번에 부대를 빠져나올 방법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다. 게다가 다음번 만남은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거의 보지 않고 스스로 계획할 수 있었기에 리따는 행복했다.
멀리서 관목 덤불이 흔들거렸다. 그러자 덤불 언저리로 몸뚱이 둘이 미끄러지듯 살그머니 모습을 드러냈다. 몸놀림이 굉장히 조심스럽다. 몸에는 잿빛이 도는 파란색 얼룩무늬 망토를 걸치고 있다. 그러나 눈부신 아침 햇살이 그들의 얼굴 정면을 비추고 있어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이 경비대장의 시야에 낱낱이 포착되었다. 집게손가락을 기관단총의 방아쇠에 댄 채 허리를 앞으로 조금 굽힌 독일군 공수부대원 둘이 호수 쪽을 향해 도둑고양이 걸음으로 살금살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바스꼬프는 그들을 주시하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들의 등 뒤 관목 덤불이 계속 흔들리고 있어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기 때문이다. 거기서, 덤불 깊숙한 곳에서 잿빛이 도는 파란색 복장을 한 몸뚱이들이 여차하면 즉시 기관단총을 내갈길 수 있는 거총 자세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잇따라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셋… 다섯… 여덟… 열…" 구르비치가 중얼거리며 그들의 수효를 세었다. "열둘… 열넷, 열다섯, 열여섯… 열여섯이에요, 특무상사 동무, 열여섯…"
몸서리치듯 떨고 있던 관목 덤불 꼭대기가 움직임을 멈췄다. 아득한 지평선 위로 까치들이 날아가는 게 보였다. 까치들이 희미하게 깍깍 울어 대며 어디론가 멀리 떠나가고 있었다.
거대한 갈색 거품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리자 앞에 부풀어 올랐다. 너무 뜻밖에 일어난 일이라 비명을 지를 사이도 없이 본능적으로 움찔하며 옆으로 몸을 피했다. 겨우 한 발짝 비켜섰을 뿐인데 갑자기 몸을 떠받치던 바닥에 두 발이 닿지 않았다. 뭔가 굼실굼실 움직이는 차가운 빈 공간 어딘가에 몸이 붕 떠 있는 느낌이었다. 이때 수렁에 빠져 든 양 허벅지가 탄력 있는 압착기에 가볍게 눌리듯 부드럽게 죄어들었다. 무서운 고통이 찾아올 것 같은 예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와 동시에 오랫동안 쌓인 공포심이 한꺼번에 폭발하면서 온몸을 겹겹이 휘감았다. 어떻게든 더는 깊이 빨려 들어가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팔다리를 허우적거렸다. 바닥이 단단한 좁은 여울 쪽으로 빠져나오려고 발버둥을 치며 리자는 온몸의 무게를 막대기로 지탱하려고 했다. 우두둑, 마른 막대 부러지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그 소리와 함께 리자의 얼굴이 얼음처럼 차가운 흙탕물 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