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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타고라스 1

피타고라스 1

(동양과 서양을 잇는 인류 최고의 신비주의자)

오쇼 (지은이), 손민규 (옮긴이)
  |  
젠토피아
2013-03-25
  |  
2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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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타고라스 1

책 정보

· 제목 : 피타고라스 1 (동양과 서양을 잇는 인류 최고의 신비주의자)
· 분류 : 국내도서 > 인문학 > 사상가/인문학자
· ISBN : 9788996895961
· 쪽수 : 434쪽

책 소개

흔히 수학자로 알려진 피타고라스는 철학자이자 종교가였으며 정치에도 관여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의 삶에 대한 여러 일화들은 몇 가지 기록에 공통적으로 전승되는 사실들을 제외하고는 그 진실성을 가늠하기 어렵다.

목차

제 1 권

1. 영원한 순례자
2. 사랑은 얼굴 없이 온다
3. 상승의 법칙
4. 산야스란 무엇인가?
5. 전체적으로 살아라
6. 그대 자신을 존중하라
7. 의식의 각성이 전부다
8. 그대는 본래부터 완벽하다
9. 영적인 자살
10. 사랑에는 이유가 없다

저자소개

오쇼 (지은이)    정보 더보기
오쇼의 가르침은 어떠한 틀로도 규정하기 힘들 만큼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그의 강의는 삶의 의미를 묻는 개인적인 문제에서부터 현대사회가 안고 있는 시급한 정치ㆍ사회적인 문제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주제를 망라한다. 오쇼의 책은 그가 직접 저술한 것이 아니라, 다양한 국적의 청중들에게 들려준 즉흥적인 강의들을 오디오와 비디오로 기록하여 책으로 펴낸 것이다. 그는 자신의 강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하건 그 말은 지금 이 시대의 당신들을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다가오는 미래 세대를 위한 말이기도 하다.” 런던의 『선데이 타임스Sunday Times』는 20세기를 빛낸 천 명의 위인들 중 한 사람으로 오쇼를 선정했으며, 미국의 작가 탐 로빈스(Tom Robbins)는 오쇼를 ‘예수 이후로 가장 위험한 인물’로 평하기도 했다. 인도의 『선데이 미드데이Sunday Mid-Day』는 인도의 운명을 바꾼 열 명의 인물을 선정했는데, 그중에는 간디, 네루, 붓다 등의 인물과 더불어 오쇼가 포함되어 있었다. 오쇼는 자신의 일에 대해 새로운 인간이 탄생하도록 기반을 닦는 것이라고 했으며, 이 새로운 인간을 ‘조르바 붓다(Zorba the Buddha)’로 부르곤 했다. 조르바 붓다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 속 주인공인 그리스인 조르바처럼 세속의 즐거움을 누리는 동시에, 붓다와 같은 내면의 평화를 겸비한 존재를 일컫는다. 오쇼의 가르침에 일관되게 흐르는 정신은, 과거로부터 계승되어온 시대를 초월한 지혜와 오늘날의 과학문명이 지닌 궁극적인 가능성을 한데 아울러 통합하는 것이다. 또한 오쇼는 점점 가속화되는 현대인들의 생활환경에 맞는 명상법을 도입하여 인간의 내면을 변화시키는 데 혁명적인 공헌을 했다. 그의 독창적인 ‘역동 명상법’들은 심신에 쌓인 스트레스를 풀어줌으로써 일상생활 속에서 더 수월하게 평화와 고요함을 경험할 수 있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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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규 (옮긴이)    정보 더보기
오쇼의 제자로 입문한 후 20여 년 동안 인도를 오가며 여러 스승들을 만나 교류했다. 영혼의 테러리스트로 알려진 유지 크리슈나무르티를 만나 큰 감화를 받았고, 오쇼의 법맥을 이은 끼란지와 12년 동안 친교를 나누며 깊은 가르침을 받았다. 명상 서적 전문 번역가로 일하면서 50여 종의 책을 한국에 번역, 소개했다. 현재 오쇼와 끼란지의 가르침에 대해 공부하는 오쇼코리아(oshokorea.com)를 이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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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피타고라스는 '영원한 삶의 철학', 즉 필로소피아 페레니스Philoso -phia Perennis를 구하는 영원한 순례자를 대표한다. 그는 진리를 구하는 탁월한 구도자다. 그는 이 구도의 길에 자신이 지닌 모든 것을 바쳤다. 그는 여러 스승들과 신비학파, 비의적인 단체를 찾아 넓은 지역을 여행했다. 그는 당시에 알려진 거의 모든 지역이 포함될 정도로 광범위한 곳을 여행했다. 사라진 대륙 아틀란티스의 신비를 찾아 그리스에서 이집트까지 여행했다.
그 당시 이집트에는 알렉산드리아의 대도서관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 도서관에는 과거의 모든 비밀이 보존되어 있었다. 그 도서관은 지금까지 지상에 존재했던 어떤 도서관보다도 거대한 규모였다. 나중에 이슬람교의 광신도들에 의해 파괴되었는데, 그 규모가 얼마나 컸던지 도서관이 모두 전소되기까지 6개월 동안이나 불길이 치솟았다고 한다.
거대한 대륙 아틀란티스는 피타고라스가 세상에 태어나기 2천5백 년 전에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다. 지금의 '대서양Atlantic'이라는 이름은 아틀란티스 대륙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아틀란티스는 지상에서 가장 오래된 대륙이었으며, 최고의 문명을 구가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떤 문명도 극에 달하면 위험이 따르는 법이다. 극에 달한 문명은 분열과 자멸의 위험을 맞이한다.
지금 인류는 이와 똑같은 위험에 직면해 있다. 인류는 막강한 힘을 갖게 되었을 때 그 힘을 어디에 써야 할 지 모른다. 힘은 막강한데 이해가 그에 미치지 못하면 위험이 뒤따른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증명된 사실이다.
아틀란티스 대륙이 바다 속으로 가라앉은 것은 자연 재앙 때문이 아니다. 바로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일과 똑같은 이유에 의한 것이었다. 자연을 정복하려고 한 인간의 힘이 자멸을 초래한 것이다.
아틀란티스 대륙의 침몰은 원자 에너지를 잘못 사용한 결과였다. 인간 스스로 자멸한 것이다. 그러나 피타고라스가 살아있을 당시만 해도 아틀란티스 대륙의 모든 경전과 비밀이 잘 보존되어 있었다.
대홍수에 관한 전설은 전 세계에 퍼져 있다. 이 대홍수의 이야기들은 아틀란티스 대륙의 침몰에서 유래했다. 기독교, 유대교, 힌두교 등에서는 과거에 한때 대홍수가 닥쳐 거의 모든 문명을 파괴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야기에서는 소수의 선각자들만이 살아남았다. 노아Noah는 선각자이며 위대한 스승이다. 그러나 노아의 방주는 하나의 상징일 뿐이다.
소수의 사람들은 재앙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들로 인해 당시의 문명이 이루어놓은 모든 비밀이 보존될 수 있었고, 이 비밀들은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피타고라스는 몇 년간 알렉산드리아에 살았다. 그는 이집트의 신비학파, 특히 헤르메스 신비주의에 입문하여 공부했다. 그 다음에 그는 유서 깊은 이 대륙, 인도로 와서 교양 높은 지식인들이 발견한 모든 것들, 인간의 내면에 관해 인도가 알고 있던 모든 내용을 탐구했다.
그는 수년 간 인도에 있다가 티베트로 넘어갔으며, 그 다음에는 중국까지 들어갔다. 그는 평생 동안 진실한 구도자이자 순례자로 살았다. 그는 지혜에 대한 사랑, 즉 진정한 의미에서의 철학을 추구했다.
오늘날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의미에서의 철학자가 아니라 철학이라는 단어의 어원적 의미에 어울리는 철학자였다. 진리에 대한 사랑으로 불타는 사람이었다. 사랑이 넘치는 사람은 진리에 대해 단순히 머리로 생각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그래서 그 역시 위험에 찬 모험을 감행한다.
진리는 가장 소중한 연인The Beloved이다. 그러니 어떻게 연인에 대해 생각만 하고 있을 수 있겠는가? 가슴 전체로 연인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 이 사랑의 탐구는 단순히 지적인 차원에 그치지 않는다. 당연히 직관적인 깊이를 가질 수밖에 없다. 아마 처음에는 지적인 탐구로 시작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처음에만 그렇다. 처음에는 지적인 탐구로 시작하겠지만, 결국 자신의 내면 깊은 곳까지 뚫고 들어가야 한다.
그는 지극히 자유롭고 포용력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아무 편견도 없이 활짝 열린 가슴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는 전 세계로부터 존경받았다. 그리스에서 중국에 이르기까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그를 존경했다. 그가 찾아간 모든 신비학파에서 그를 받아들였다. 그의 이름은 온 세상에 알려졌으며 가는 곳마다 큰 기쁨으로 그를 환대했다.
그는 깨달음을 얻은 후에도 새로운 단체들을 찾아다니는 일을 계속했다. 여전히 새로운 학파에 입문하는 것을 중단하지 않았다. 위대한 통합을 시도하고 있었다. 인간에게 가능한 모든 방편을 통해 진리를 탐구하고 있었다. 그는 모든 면, 모든 차원에 걸쳐 진리를 알고자 했다.
그는 깨달은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다른 스승들 앞에 무릎을 꿇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일단 깨달음을 얻은 후에는 탐구가 중단된다. 구도 행각이 더 이상 이어지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붓다는 깨달음을 얻은 후 결코 다른 스승을 찾아가지 않았다. 예수도 깨달은 후에는 다른 스승을 찾아가지 않았다. 노자도 그랬고, 차라투스트라와 모세도 그랬다. 그러므로 피타고라스는 매우 특이한 경우다. 이에 비교될 만한 다른 예를 찾아볼 수 없다. 그야말로 전무후무한 경우다. 깨달음을 얻은 후에도 피타고라스는 진리의 일면을 밝혀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의 제자라도 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의 탐구열은 어느 누구를 통해서도 배울 준비가 되어 있을 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그야말로 완벽한 제자도를 갖춘 사람이었다. 존재계 전체를 통해 배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항상 열려 있었으며, 마지막 순간까지 배우는 자로 남았다.
그 당시에 그리스에서 중국까지 여행한다는 것은 실로 엄청난 일이었다. 위험하고 험난한 여정이었다. 오늘날에는 뉴욕에서 아침을 먹고 런던에서 점심을 먹은 다음 인도의 푸나에서 소화불량으로 고생할 수도 있다. 그만큼 쉽고 간단하다. 그러나 당시는 그렇지 않았다. 큰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다.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이동하는데 몇 년씩이나 걸렸다.
모국으로 돌아왔을 때 피타고라스는 매우 늙어 있었다. 그러나 구도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거대한 학파가 탄생했다. 항상 그렇듯이 사회는 그와 그의 학파, 제자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그는 평생 동안 영원한 철학을 추구했으며 마침내 구하던 바를 발견했다. 전 세계에서 수집한 단편들을 모아서 최고로 조화로운 통합을 이루었다. 그러나 사회는 그것들을 낱낱이 밝혀내도록 허용하지 않았다. 사회는 그가 사람들을 가르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가는 곳마다 박해를 받았다. 그래서 평생 동안 수많은 구도의 길을 시도했으며, 그가 수집한 모든 것을 가르치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그가 모은 보물은 그만큼 엄청난 것이었다. 사실, 지금까지도 그처럼 많은 보물을 모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사회는 그를 탄압했다. 어리석은 인류는 항상 이런 식이다.
피타고라스는 불가능한 일을 해냈다. 서양과 동양 사이에 다리를 놓은 것이다. 그가 첫 번째 다리였다. 그는 서양적인 마음뿐만 아니라 동양적인 마음까지 깊이 꿰뚫었다.
그는 그리스인이었다. 그는 논리와 과학적인 접근방식이 지배하는 환경에서 자라났다. 그러나 그는 동양으로 들어가 직관의 길을 배웠다. 어떻게 신비주의자가 되는지를 배웠다. 그는 천부적인 수학자였다. 그런데 수학자가 신비주의자로 되는 것은 일대 혁명이다. 수학자와 신비주의자는 대립되는 양극과 같기 때문이다.
서양은 남성적인 마음과 공격적인 지성을 대표한다. 반면 동양은 여성적인 마음과 수용적인 직관을 대표한다. 서양과 동양이라는 구분은 단순히 임의적인 구분이 아니다. 이 구분은 아주 심오하고 의미심장하다.
키플링의 말을 잊지 마라. 그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서양과 동양이 결코 만날 수 없다고 말한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동양과 서양의 방식은 변증법적으로 정반대다. 그러므로 만남은 불가능해 보인다.
서양은 공격적이고 과학적이다. 자연을 정복할 태세가 되어 있다. 그러나 동양은 비공격적이고 수용적이다. 동양은 자연에 정복당할 준비가 되어 있다. 서양은 앎을 얻기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경주하지만 동양은 묵묵히 기다린다.
서양은 삶과 존재계의 신비를 파헤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한다. 그들은 비밀의 문을 열려고 애쓴다. 그러나 동양은 깊은 신뢰 속에서 묵묵히 기다린다. '내가 준비되면 진리가 저절로 드러나리라.'라는 신뢰를 갖고 기다린다.
서양이 집중의 길을 걷는다면 동양은 명상의 길을 걷는다. 서양은 사념을 택했지만 동양은 무념이다. 서양이 마음이라면 동양은 무심無心이다. 그러므로 키플링의 말은 논리적으로 일리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동양과 서양의 만남은 절대 불가능한 것 같다.
'동양과 서양'이라는 말은 지역적인 구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말은 그대의 마음과 두뇌를 상징한다. 그대의 두뇌 역시 지구처럼 둘로 나누어져 있다. 두뇌 안에는 동양과 서양이 들어있다. 왼쪽 뇌는 서양이다. 이 부분은 오른 손과 연결되어 있다. 오른쪽 뇌는 동양이다. 이 오른쪽 뇌는 왼손과 연결되어 있다.
서양은 우익이고, 동양은 좌익이다. 이 양자의 방식은 너무나 다르다. 마음의 우반구는 논리적으로 계산하고 사유한다. 모든 과학이 이로부터 나온다. 반면 마음의 좌반구는 시인이며 신비주의자다. 이 마음은 직관하고 느낀다. 이 마음은 안개에 휩싸인 것처럼 불분명하고 막연하다. 아무것도 명확하지 않다. 모든 것이 일종의 카오스 상태에 있다.
그러나 이 카오스 상태는 고유의 아름다움이 있다. 이 안에는 위대한 시와 노래가 깃들어 있다. 참으로 풍요롭다. 계산적인 마음은 황량한 사막과 같다. 그러나 계산적이지 않은 마음은 아름다운 정원이다. 거기엔 새들이 노래하고 꽃이 만발하다.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피타고라스는 불가능한 것을 시도한 첫 번째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는 성공했다! 그를 통해 동양과 서양이 하나가 되었다. 그의 안에서 음과 양이 하나가 되고, 남성과 여성이 하나가 되었다. 그는 정반대되는 양극의 완벽한 통합, 즉 아르드하나리쉬와르Ardhanarish -war였다.
시바와 샤크티가 합쳐지고, 최고의 지성과 가장 심오한 직관이 하나로 만났다. 피타고라스는 햇빛 찬란한 최고의 정상인 동시에 어둡고 깊은 계곡이다. 이것은 매우 드문 통합이다.
그러나 평생에 걸친 그의 노력은 어리석은 사람들, 천박한 대중들에 의해 파괴되었다. 여기 몇 개의 시 구절만 남아있다. 이 시구는 우편엽서 한 장에 쓸 정도의 분량밖에 안 된다. 이 위대한 인간이 혼신의 힘을 다해 노력한 것들 중에 겨우 이것밖에 남지 않았다. 이 시구 또한 그가 직접 쓴 것이 아니다. 그가 썼던 것은 완전히 없어진 것 같다.
피타고라스가 죽던 날, 수천 명에 달하는 그의 제자들 또한 잔인하게 살해되고 화형에 처해졌다. 단 한명의 제자만이 학원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그의 이름은 라이시스Lysis였다. 그가 탈출한 것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스승의 가르침을 보존하기 위해 탈출한 것이다. 이 <피타고라스의 황금 시편 The Golden Verses of Pythagoras>은 유일한 생존자인 피타고라스의 제자 라이시스가 쓴 것이다.
학교 전체가 불타고 수천 명의 제자들이 잔인하게 살해되었다. 피타고라스가 오랜 여행을 통해 수집한 모든 것들, 중국, 인도, 티베트, 이집트 등지에서 가져온 소중한 경전과 가르침들이 모두 불에 타 버렸다.
이 몇 개의 시편은 라이시스가 쓴 것이다. 진정한 제자는 스승의 이름 외에 다른 이름을 모른다는 고대의 전통이 있다. 이 전통에 따라 이 시구들은 '라이시스의 시구'라 불리지 않고 <피타고라스의 황금 시편>이라고 불린다. 라이시스는 자신의 이름을 쓰지 않았다.
역사상 이런 일은 계속해서 일어났다. 인도의 위대한 스승인 브야사Vyasa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났다. 그의 이름으로 쓰인 경전이 어찌나 많은지 한 사람이 그 경전 모두를 쓴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그것은 인간의 능력으로 보아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설령 천 명의 사람들이 평생 동안 쓴다 해도 그렇게 많은 경전을 쓸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경전들 모두가 브야사의 이름을 달고 있는 것은 어찌된 일일까? 그 경전들은 브야사가 아니라 제자들에 의해 쓰인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제자는 스승의 이름 외에 다른 이름을 모른다. 그는 스승 안에서 용해되어 사라졌다. 따라서 무엇을 쓰던지 그는 스승의 이름으로 쓴다.
그런데 언어학자와 교수들은 브야사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었던 것은 아닌지 의심하고 수많은 이론을 내세웠다. 이것은 터무니없는 추측이다. 브야사는 단 한 명밖에 없었다. 그러나 브야사를 깊이 사랑한 사람들은 무엇을 쓰던지 자신을 매개이자 도구에 불과한 존재로 느꼈다. 그들 자신이 쓰는 것이 아니라 스승이 자신을 통해 쓰고 있다고 느꼈다. 그래서 그들은 무엇을 쓰던지 스승의 이름을 달았다.
이집트의 헤르메스에게도 똑같은 일이 일어났다. 많은 경전들이 제자들에 의해 씌어졌다. 그리스의 오르페우스, 중국의 노자와 공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진정한 제자는 자신의 정체성을 버린다. 스승과 완벽하게 하나가 된다. 그런데 사람들의 어리석음 때문에 이 소중한 보물들이 파괴되고 말았다.
피타고라스는 거대한 통합을 이루어낸 첫 번째 인물이다.그 후로 2천5백 년이 지났지만 그런 통합을 이룬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전에도 없었고 그 후에도 없었다. 이런 시도를 하기 위해서는 과학적인 동시에 신비적인 마음이 필요하다. 이것은 매우 드문 현상이다. 아주 희귀한 일이다.
붓다, 노자, 차라투스트라 같은 신비주의자들이 있었다. 뉴턴, 에디슨, 아인슈타인 같은 과학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 서로 다른 두 세계를 아무 마찰 없이 동시에 받아들이는 사람, 이 양쪽 세계를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을 찾기란 매우 힘들다. 피타고라스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그와 같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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