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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시 > 한국시
· ISBN : 9788997150960
· 쪽수 : 128쪽
· 출판일 : 2015-01-31
책 소개
목차
1부
간지럼을 탄다/ 곡/ 나는 이사 간다/ 페인트칠에 관한 기록/ 집/ 진돗개 소구/ 고양이 일가/ 아내의 경제력/ 식구가 줄었다/ 수명/ 이식/ 편도선/ 두꺼비/ 박달나무 꽃을 보았다/ 그해 여름 시인의 집
2부
톡,/ 톡, 톡/ 톡, 톡, 톡/ 눈부시다/ 기계/ 감옥/ 안부/ 소문/ 옛날 생각/ 아이는 겨우 세 살/ 장난감처럼/ 먼 산에 들꽃들은/ 약수터에서/ 봄
3부
내 나이에는/ 도화지란/ 화가 난 자로가 공자에게 묻기를, “군자도 가난할 때가 습니까?”/ 여생이 길지 않아/ 칼을 들고 동문을 나서며/ 천문/ 당신은 삼려대부가 아니신가?/ 남행/ 그때는 참/ 춘투/ 긴 곡조의 노래에 이은 짧은 곡조의 노래_1/ 긴 곡조의 노래에 이은 짧은 곡조의 노래_2/ 고요한 밤 집집마다 문 닫고 자는데 성안 가득 비바람이 찬 하늘에 몰아친다. “점치세요!” 외치는 이 어느 집 자식일까? 내일 아침 쌀 살 돈이 모자라는 모양이다/ 격/ 세상에, 사려는 이가 하나도 없네/ 다보탑을 옮기는 법
4부
보험의 미래/ 과거시작법/ 다음 물음에 답하시오/ 헤어진 연인을 불러내는 법/ 대인/ 부동자세/ 귀가 큰 사내는 언제나 오시는가?/ 슬픈 암살·1/ 슬픈 암살·2/ 슬픈 암살·3/ 다시 한 번 헤어진 연인을 불러내는 법/ 9.7pt./ 편견/ 착공/ 산골
해설 · 시적 간지럼과 망명시인의 귀환/ 우찬제(문학비평가, 서강대 교수)
저자소개
책속에서
고양이 일가
며칠째 눈치를 살피던 길고양이가
낡은 처마 속에서 몸을 풀었지.
주인은 말이 없고
대문은 굳게 잠겨 있으니
안전하리라 여겼던 것이지.
어둡고 비좁은 처마 속에서
어린 것들을 핥으며 젖을 물렸지.
가끔은 들판을 헤매기도 했지.
허기진 배를 출렁이며 돌아와
빈 젖을 물리고 훌쩍거리기도 했지.
사실,
고양이 일가는 안전하지 않았지.
그저 말이 없을 뿐
대문을 걸어 잠그고 있을 뿐
바람 불고 폭우가 쏟아졌지.
지붕이 새고 벽에는 금이 갔지.
근심을 감추고
랄랄라 흥얼거리며 지붕에 오르기도 했지.
어긋난 기왓장을 맞추며 먼 곳을 보았지.
살금살금 지붕 위를 거니는 소리에
어린 고양이들은 깜짝 놀라기도 했지.
하지만 뭐 그리 놀랄 일은 아니었지.
주인은 말이 없고
천장 속 시궁쥐를 쫓을 때만 화를 냈지.
정말로 화가 난 것은 아니었지.
늘어진 천장을 밀어 올리며 탁탁 두드렸지만
그저 시늉뿐이었지.
그것도 아주 잠시
장맛비가 몰려오기 전이었지.
천둥소리를 내면서 처마가 무너지고
고양이 일가가 이사를 갈 때까지
늘 그랬지.
처마 기둥처럼 굳세고 쇠약했지만
대문을 나서는 법은 결코 없었지.
그건 안전하지가 않았지.
봄은 멀고
그해,
가을은 짧고 겨울은 길었지.
장난감처럼
아이들에게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장난감을 선물하는 것처럼 즐거운 일도 없지요. 당장에 울음을 그치게 할 순 없어요. 잠시 마음을 달래줄 뿐이죠. 사실, 만들어지지 않은 장난감만큼 아이들을 사로잡는 장난감도 드물죠. 아이들은 더러 토끼 머리에 사슴 뿔 다는 걸 더 좋아하니까요. 그 대신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해요. 언젠가는 꼭 기억을 해내니까요. 사슴 뿔 대신 물소 뿔을 달아 주는 건 괜찮아요. 약속한 게 어차피 토끼는 아니었으니까. 가끔 새로운 장난감을 고안할 필요도 있어요. 아이들은 자라니까요. 사슴 뿔 달린 토끼 인형보다는 어른스럽고 조금은 특별한, 뭐 그런 게 좋겠죠? 걱정할 필요 없어요. 명심할 것은… 그건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것, 언제든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 약속한 것이 어차피 그것은 아니라는 것. 어쩌면 사슴 뿔 달린 토끼를 원할 수도 있어요. 고집 센 아이도 있기 마련이니까. 그러면 이렇게 말하죠. 얘야, 사슴 뿔 달린 토끼는 원래 없단다. 아이는 울음을 터트리죠. 가질 수 없는 장난감처럼 아이들을 슬프게 하는 것도 없죠. 하지만 당황할 필요는 없어요. 아이는 곧 어른이 되니까.
천문
늙고 쇠한 몸이 봄에 내리는 폭설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 병을 얻고 말았습니다. 살갗을 후벼내듯이 열꽃이 돋아나고 숯불을 삼킨 듯 목이 타며 허리의 통증은 정육 갈고리로 등골을 뽑아내는 듯합니다. 눈이 침침하여 천지가 아득하고 고막이 찢어질 듯 이명이 그치지 않으니 주변은 물론이거니와 세간에 떠도는 흔한 소문조차 귀에 담지를 못합니다. 해서 적어 올리기를
고향 뒷산 절벽에서 뛰어내린 이가 아직도 땅에 도착하지 않으니 그 이유는 무엇인가? 도살자들과 파괴자들, 착취자들, 공모자들이 죽기 전에 누가 소식을 듣겠는가? 사십사 년 전에 불이 붙었는데 아직도 불타고 있으니 누가 재봉질을 하겠는가? 상인이 상가 문을 걸어 잠그니 누가 새벽 버스를 타겠는가? 가을에 수확하여 겨울에 굶으니 누가 물꼬를 내겠는가? 판관이 죄 지으니 누가 죄를 묻겠는가? 사관이 사초를 고쳐 쓰니 누가 대를 잇겠는가? 사간이 내통하니 누가 세상을 보겠는가? 어른이 아이를 탐하니 누가 어른이 되겠는가? 아이는 어미를 버렸으나 어미는 끝내 아이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아아, 누가 아이를 낳겠는가, 아이의 이름을 짓겠는가?
아무도 이 땅에 말뚝 박지 않고
우리들의 모국어는 무간지옥을 기록할 뿐
홀딱 벗고 애를 배던 황홀한 시절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니
시여, 벼락 맞을 시여!
시인이 시를 염장하니 누가 시를 읽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