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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한국에세이
· ISBN : 9788997180974
· 쪽수 : 164쪽
· 출판일 : 2021-05-24
책 소개
목차
작가의 말 ... 4
나무도마(아리 문화상 수상작) ... 10
끝자리에서 자신을 만나 보면(사하 모래톱 문학상 수상작 ... 16
쌍골죽과 대금 소리(경북일보 호미 문학상 수필 수상작) ... 22
살바도르 달리의 손짓(샘터 수필 문학상 수상작) ... 28
선물(글나라 백일장 우수상 수상작) ... 32
창문을 읽다(경기 수필 문학상 수상작) ... 37
남도의 아버지(생활문예대상 수상작) ... 42
어머니의 이끼(우리숲 문학상 수상작) ... 49
나비의 날갯짓(한민족문예제전 최우수상 수상작) ... 55
나무의 시간처럼(효석 백일장 수상작) ... 62
한반도의 맏이 독도(독도 문예대전 수상작) ... 67
나의 어머니(E마트 문학상 수상작) ... 73
상처에서 흘러나온 말들(포천 문학상 수상작) ... 79
분노 관리 이야기(이야기 문학상 수상작) ... 84
그해 여름(진해 군항제 문학상 수상작) ... 90
톱상어와 멸치떼(대한시협 문학상 대상 수상작) ... 95
낡은 신발(대한시협 문학상 대상 수상작) ... 101
낙동강 오리알과 낙동강 전투(낙동강 수필 문학상 수상작) ... 105
아버지와 은행나문 ... 110
고무신 ... 115
아픔에 가닿아야 한다 ... 125
김치 ... 131
배앓이 ... 137
약불 ... 143
질경이처럼 ... 149
옻칠 입힌 짝사랑 ... 154
교도소 글쓰기반 ... 159
저자소개
책속에서
첫 번째 집 대문을 두드렸다. 인기척이 없었다. 대문이 없는 두 번째 집을 기웃거렸다. 마당에서 한 남자가 돼지우리 앞에서 볏짚을 나르고 있었다. 마당 안으로 몇 걸음 들어가 아저씨를 불렀다. 그는 하던 일을 멈추고 쇠스랑을 손에 든 채 나를 돌아봤다.
그 순간 나는 섬찟 놀라 한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 마치 영화 속에서나 등장할 법한 희멀건 표정으로 눈썹도 없이 나를 바라봤기 때문이다.
그는 교회 목사님을 만나고 싶다는 나를 미소로 반겨 주며 묵묵히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놀랍게도 손가락이 없는 뭉텅한 손이었다. 손바닥만 있는 손.
그때서야 이곳이 음성나환자촌임을 깨달았다. 당황한 마음을 눈치챈 듯 그는 내 손을 덥썩 잡으며 교회로 가는 길을 안내했다. 미궁 속으로 빠져들 듯 좁은 골목길을 걸었다.
올해 들어 마을을 찾은 두 번째 외부 손님이라며 그는 무척 반가워했다. 나의 경계심을 풀어 주기 위해 일부러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 놓았다.
열아홉 살에 나병환자라는 낙인이 찍힌 후 불가촉천민으로 분류돼 그는 집에서도 쫓겨났다.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없는 오염된 괴물로 취급받아 그는 서글펐다.
어우러져 살고픈 낯익은 순간들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매순간 그는 춥고 어지러웠다. 사람들이 돌을 던지면 고개를 숙였다. 맞다가 얼굴에서 피가 흐르면 그는 달리기 시작했다.
나병이 심해질수록 사람들에게 발길질을 당했다. 가도 가도 숨막힌 천리길, 그 막다른 골목에서조차 그는 내쫒김을 당했다.
동서남북 그 어디로도 갈 수 없어 그는 살기 위해 비명 같은 길을 걸었다. 걷다 보면 죄 없는 발가락 하나가 툭 떨어져 나갔다. 그 발가락처럼 그도 모든 것을 놓아 버리고 싶었던 때가 수도 없이 많았다.
질기디질긴 것이 목숨줄이었다. 수백 번 수천 번 외로움이 숨통을 조여 왔다. 무너지고 넘어지기를 반복하다가 이곳까지 왔다고 그는 덤덤히 말했다.
그에게서 칼자국이 가득한 나무도마처럼 아득한 외로움이 느껴졌다.
어느 날, 그의 병이 음성으로 판명된 후 그는 세상을 달리 보게 되었다. 상처로 움푹 꺼진 깊이에 파묻히지 않고 그 깊이만큼 높이를 쌓았다. 높아진 꽃대에서 그의 봄이 열리기 시작했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짠하게 보였다. 분노에 휩싸여 악을 쓰는 사람도 내쫓김을 당해 도망가는 사람도 모두 가엾게 보였다. 폭발하기 직전까지 참아 본 사람만이 삶을 버티기 위해 날카로운 비명을 내지른다는 것을 그는 알았다.
살기 위해 악을 쓰는 소리가 연민으로 느껴지려면 얼마나 외로워해야 했을까.
외로워야 볼 수 있는 것이 있다. 나무도마처럼 그도 찍히고 물어뜯기다가 그 끝에서 일어나 비관의 시각을 갖게 된 것일까. 예리한 칼끝 같은 아픔에 속절없이 무너져 본 자만이 타인에 대해 온기를 품을 수 있는 것일까.
슬픔의 눈길은 아픔을 오래 응시할수록 따스하고 깊다. 자고 나면 또 뚝 떨어져 나갈 몸, 그 몸으로 살얼음 어는 세상을 가로질러 온기를 길어 올렸을 것이다.
서러움이 왈칵 쏟아질 듯 그는 마른기침을 해댔다. 그의 얼굴이 벌게졌다. 잡고 있던 그의 손에서 아릿함이 느껴졌다. 나는 아침부터 명치 끝을 누르던 답답함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는 듯했다.
그는 자신이 입은 상처에 겁먹지 않고 세상을 품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는 이제 더이상 천민賤民이 아니었다. 하늘의 혈통을 이어받은 천민天民이었다.
<나무 도마> 중에서
수술을 한 지 5년이 채 안 된 가을, 그녀는 다시 뇌수술을 하기 위해 대학병원에 입원했다. 수술실로 들어가면서 영영 나오지 못할까 봐 무서워했다.
수술이라는 블랙홀 속으로 빨려 들어가 지상의 명단에서 이름 석 자가 영원히 사라질까 봐, 그녀는 울음을 쏟아냈다. 잘될 거라며 서로를 껴안는 아픔에 그날 오후는 숨죽이고 있었다.
수술 시간은 길어지고 째깍거리는 초침 소리에 숨통이 막혀 그녀의 가족들은 모두 힘들어했다. 다행히 수술은 잘됐지만 혈관을 막는 피떡 때문에 삼 일 넘게 혈전용해제를 써야 했다.
그녀는 산소 호흡기로 버티며 이겨냈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 퇴원한 그녀가 하루는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넘치는 사랑을 받고 사는 여자예요. 파킨슨병을 앓고 있는 남편이 예쁜 자식을 셋이나 낳아 줘서 고맙다며 손가락 세 개를 번쩍 세우더니 힘내라고 응원해 줬어요. 어제는 유자차도 한 잔 마셨어요. 참 따스한 시간이었어요. 생각해 보니까 감사해야 할 것들이 참 많더군요. 그걸 그동안 잊고 살았더라구요.”
쌍골죽처럼 휘어지고 뒤틀린 삶의 뒤안길을 묵묵히 견디며 걸어온 그녀는 이제는 감사의 기도를 드리며 산다고 웃으며 말했다.
삶은 우리가 꿈꾸는 방향으로 가지 못한 경우가 많다. 그 꿈과는 너무 멀어져서 도저히 돌아갈 수도 없다. 그런 부정적인 상황 속에서도 삶이 아름다워질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해야 한다. 내 인생의 이야기를 명주실의 흰빛으로 동여매듯 새롭게 써야 한다.
쌍골죽은 일반적인 대나무보다 속이 꽉 차 있는데 속살의 두께가 1.3~2.4배가량 더 두껍다. 그 두께만큼 상처도 깊어 쌍골죽으로 만든 대금은 희로애락의 감성을 잘 짚어낸다.
대나무의 안쪽 벽에 바람의 흐느낌과 달빛의 울컥임까지 새겼기에, 감성의 깊이가 남다르다. 병들며 커 가는 아픔을 안고 자란 탓인지 애처롭고 처량한 느낌을 쌍골죽은 잘 표현한다.
상처 깊은 아픔이 한에 짓눌리지 않고 그 한을 넘어선 소리에 다다를 때까지, 대금을 만드는 사람도 쌍골죽 스스로도 기도의 시간을 가지며 이겨냈을 것이다.
지천명을 넘기고 이순을 바라보는 그녀는 삶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힘들어 포기하고 싶을 때도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막내딸이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는 살아 있어야 한다며, 엄마이니까 자식을 지켜야 한다며, 그녀는 죽을 만큼 아프다는 통증을 견뎌내며 하루하루 기도를 했다. 그러자 살아 있음에 감사하고 소소한 일상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었다.
<쌍골죽과 대금 소리> 중에서
창문은 ‘존중과 소통’을 상징한다. 방에 들어와 방문을 닫아 버리면 문이 열리기 전까지는 철저히 안과 밖은 차단된다. 하지만 창문은 닫혀 있어도 늘 안팎을 이어준다.
닫혀 있는 창문을 통해서 아침 햇살은 들어와 나의 볼을 간지럽히며 하루를 깨운다. 그러면서도 창문은 안과 바깥 모두를 존중한다. 창문을 사이에 두고 서로의 공간을 침해하지 않는다.
한겨울의 차가운 바람일지라도 창문을 통해서 안의 공간을 존중해 주기에 우리는 겨울을 따뜻하게 보낼 수 있다.
아버지는 결혼하기 전부터 어머니를 향해 창문을 달았다. 그 창문을 통해 펄펄 끓는 사랑을 보냈다.
학교 다닐 때 아버지가 머물렀던 하숙집은 그 일대에서 덕망이 있다고 칭송 받은 선비 집안이었다. 외할아버지는 아버지의 성실함이 마음에 들어 일찍부터 아버지를 사윗감으로 낙점했다.
흙벽 아래서 봉창문을 통해 새어 나오는 어머니의 목소리에 가슴 설레였던 아버지는 달빛에 그리움을 실어 어머니에게로 다가갔다. 양반과 머슴, 주인집 딸과 하숙생이라는 안과 밖의 경계가 옅고 묽게 허물어졌다.
붉은 햇덩이를 들어 올리는 바다의 힘에 흠뻑 빠진 파도가 발뒤꿈치까지 온통 붉어지듯이,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그렇게 마음의 창문을 열었다. 외할아버지의 지지 덕분에 어머니는 가난한 하숙생인 아버지와 결혼했다.
아버지는 주로 남해안 섬 학교로 연달아 발령 받아 교사 생활을 했기 때문에 보름 만에 한 번꼴로 집에 들렀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빈자리까지 대신하며 사시사철 농사일에 매달려야 했다.
다섯 마지기나 되는 참외 농사를 포함해 적지 않은 밭농사와 논농사를 지었다. 7명의 자식들까지 챙겨야 했는데도 어머니는 힘든 기색도 없이 잘도 꾸려 나갔다. 간혹 집에 들른 아버지는 못난 자신 때문에 고생이 많다며 안쓰러운 눈길로 어머니를 바라다보곤 했다.
아버지는 특히 어머니의 노란 저고리 닮은 참외를 좋아했다. 한 달에 한두 번씩 어머니의 창문에는 꽃향이 스며들었다. 그러는 사이에 우리 형제들은 참외처럼 달콤하게 무르익어 모두 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을 떠났다.
시골에 홀로 남게 된 어머니는 어느 날 당뇨병에서 시작된 합병증으로 그만 병석에 드러눕게 되었다. 퇴직을 한 아버지는 이때부터 눈에 띄게 헌신적인 모습을 보였다.
어머니의 봉창문이 무너지지 않게 아버지는 봄볕으로 암팡지게 엮어 새 단장을 하기 시작했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도 계절에 따라 다른 감흥을 불러온다. 무더위 속에서 밀어붙이는 한낮의 열기는 사람들을 지치게 하지만, 봄의 발걸음을 기억하는 늦겨울의 햇살은 차갑게 떨어야 했던 굽은 시간을 펴 준다. 봄볕 같은 아버지의 정성 덕분에 어머니는 다시 미소와 건강을 되찾기 시작했다.
<창문을 읽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