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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조선사 > 조선시대 일반
· ISBN : 9788997263752
· 쪽수 : 368쪽
· 출판일 : 2014-04-30
책 소개
목차
이 책을 시작하며
제1부 왕으로 선택된 남자
세종 ∴ 성군의 기준을 세운 임금
성종 ∴ 역사가 사랑한 성군의 두 얼굴
중종 ∴ 총애를 담보로 정치를 펼친 군주
토막 상식 : 임금의 묘호, 종宗과 조祖의 차이는?
토막 상식 : 관직의 품격, 이것만은 꼭 알아두자! 삼정승과 육조판서
토막 상식 : 조광조의 출세로 알아보는 조선의 관직 및 벼슬
제2부 왕이 되고 싶었던 남자
선조 ∴ 당쟁을 이용해 왕권을 누린 임금
광해군 ∴ 미완으로 사라진 성군의 영혼
인조 ∴ 단언컨대 가장 완벽한 최악의 군주
토막 상식 : 정치의 꽃, 당쟁Ⅰ
토막 상식 : 관직의 품격, 이것만은 꼭 알아두자! 청요직과 삼사
제3부 왕으로 태어난 남자
연산군 ∴ 예정된 비극이 만들어 낸 화려한 폐허
숙종 ∴ 불온한 정체성이 만들어 낸 삼종혈맥의 완전체
정조 ∴ 초인적인 노력으로 개혁을 주도한 천재 군주
토막 상식 : 정치의 꽃, 당쟁Ⅱ
토막 상식 : 홍국영의 출세로 알아보는 조선의 관직 및 벼슬
제4부 왕이 되지 못한 남자
소현세자 ∴ 인조반정의 인과응보
사도세자 ∴ 경종의 죽음과 영조의 콤플렉스
효명세자 ∴ 세도정치의 희생양
토막 상식 : 세자 재임 기간이 길수록 재위 기간은 짧다?
토막 상식 : 정상적으로 왕위를 계승한 임금은 몇 명일까?
부록_한눈에 보는 왕위 계승 표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예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유력한 후보 세 명이 왕위를 계승할 차기 임금 물망에 올랐다. 당시 16살이던 월산대군은 왕위에 오르기에 적당한 나이였고 세조의 장손이라는 명분도 있었다. 실제로 월산대군은 세조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은 손자이기도 했다. 그에 비해 의경세자와 소혜왕후 한씨의 차남 자을산군은 왕위 계승 서열 3위에 불과했다.
하지만 왕실의 가장 큰 어른인 정희왕후(세조의 왕비)는 제안대군이 어리고 어리석으며, 월산대군은 건강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자을산군에게 왕위를 물려준다는 최후 교지를 내렸다. 놀라운 일은 예종이 사망할 당시 자을산군은 이미 궁 안에서 대기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자을산군은 정희왕후의 교지가 떨어지자마자 곧바로 즉위식을 올렸는데 그가 바로 조선 역사상 선왕이 세상을 떠난 당일에 왕위에 오른 유일한 임금, 성종이다.
성종의 혼인은 정희왕후와 한명회 사이에서 맺은 일종의 결탁이었다. 한명회의 보호를 받는다면 왕권의 안전은 지킬 수 있었고, 한명회는 어린 임금을 보좌하며 다시 한 번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다.
(…중략…)
신하들은 자신들이 직접 가르친 임금을 자랑스러워했고 사랑하였으며 존경하며 애착을 느꼈다. 즉위 후 10년 동안 성종은 모범적이고 훌륭한 학생으로서 학문에 매진하였고 이러한 태도는 신하들의 학문적 역량을 최대치로 끌어올려 학문이 융성한 시대를 일구었다.
성종이 지닌 리더십의 진정한 면모는 바로 이처럼 선천적으로 타고난 그의 총명함과 열정적인 성격 그리고 후천적인 노력에 있다. 신하들에게서 학문을 배우는 학생으로 임금의 역할을 시작한 성종은 조정 신료 대다수와의 관계에서 ‘충(忠)’을 넘어 각별하고도 인간적인 유대관계를 맺은 전무후무한 인물이었다. 이는 조선의 사대부들이 성종을 무한 사랑하며 칭송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중략…)
태평성세에 왕은 역량을 발휘하기 힘들고 리더십은 오히려 퇴보하거나 제자리걸음을 하기 마련이다. 성종의 뛰어난 점은 태평성세에 안주하지 않고 훈구 공신이나 사림을 적절하게 기용함으로써 꾸준히 정비해온 제도를 완성하고 조정 전체에 학구적인 분위기를 조성했다는 점이다. 훈구 공신들은 특혜에 안주하지 않고 긴장하면서 국정을 운영하였고, 사림들은 훈구 공신들에게 일침을 가하며 성종을 ‘성리학 군주’로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 결과 성종은 태평성세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제도를 완성하는 업적을 이룰 수 있었다.
훈구 공신 세력과 사림이 공존하는 시대를 열었던 성종은 단 한 번도 정치적으로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았다. 신하들 사이에서 잘못이 불거져도 그는 언제나 적당한 선에서 처벌을 마무리하며 지엄하고도 자비로운 군주의 모습을 각인시켰다. 임금의 행동이 도를 넘지 않았기에 신하들 역시 상소와 비판을 하면서도 도를 넘지 않았다. 하지만 이는 불안하고도 우아한 공존이었다.
_역사가 사랑한 성군의 두 얼굴, 성종
이렇듯 연산군은 때때로 중종을 노골적으로 견제했고 그때마다 그는 목숨에 위협을 느끼곤 했다. 그 후에도 중종은 점차 폭정의 정도가 심해지는 연산군을 보면서 그가 자신을 언제 죽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너무나 커서 군대만 보아도 기함을 할 지경이 되었다. 이는 반정이 있던 당일 중종의 태도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반정 당일 대신들은 중종을 우선적으로 호위하기 위해 그가 머물고 있던 사가에 군사를 보냈다. 자신의 집을 둘러싼 군사를 본 중종은 사실 여부도 확인하지 않은 채 자결하려고 했다. 연산군이 마침내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연산군에 대한 중종의 공포는 컸다. 이때 정신적 공황 상태의 중종을 진정시킨 이는 그의 아내 신씨였다. 사가를 둘러싼 병사들의 말머리가 궁궐을 향해 있기에 그를 죽이러 온 이들은 아닐 것이라는 아내의 설명을 듣고서야 중종은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고 한다. 잠시 후 반정이 성공하자 그때까지 자결하지 않고 목숨을 부지하고 있던 그는 자신을 데리러온 대신들과 함께 왕이 되기 위해 입궁하였다.
_총애를 담보로 정치를 펼친 군주, 중종
중종의 일곱 번째 아들이자 궁녀 출신 후궁 안씨의 아들인 덕흥대원군의 셋째 아들 하성군이 조선의 제14대 임금이 되었다. 왕위와는 거리가 멀었던, 수많은 종친 중 한 명에 불과한 하성군이 조선의 새로운 주인이 된 것이다. 이는 하성군에게 엄청난 행운임과 동시에 크나큰 부담이었다. 모친상 중에 대신들을 맞은 열여섯의 하성군은 자신을 맞으러 온 대신들과 함께 울면서 입궁하였고 용상에 오르기를 머뭇거린 끝에 겨우겨우 즉위식을 올렸다.
(…중략…)
선조는 당시로서는 역대 조선 임금 중 최장 기간인 41년 동안 재위하였다. 선조의 치세는 재위 절반의 기간 동안은 평균 이상이었지만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1년 이후 16년 동안은 충신을 미워하고, 재혼을 감행하며, 광해군을 세자로 인정하지 않는 등 억지스러운 행동의 연속이었다. 훈구 세력이 완벽하게 사라진 조정을 이끌며 종계변무의 성공으로 개국 이후 조선에 최고의 영광을 가져온 선조의 리더십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맞으며 완전히 무너졌고 결국 끝내 회복되지 못했다. 선조가 노력하여 이룬 모든 영광은 임진왜란과 함께 덧없이 사라졌고, 스스로를 극복하지 못한 임금은 조선 역사상 가장 무능한 군주로 기억되었다.
_당쟁을 이용해 왕권을 누린 임금, 선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