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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안의 인물과 사상

무안의 인물과 사상

나천수, 나상필, 박석무, 박관서, 김봉곤, 노기욱, 박해현, 이용식 (지은이)
에코미디어
20,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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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안의 인물과 사상
eBook 미리보기

책 정보

· 제목 : 무안의 인물과 사상 
· 분류 : 국내도서 > 인문학 > 문화/문화이론 > 한국학/한국문화 > 한국인과 한국문화
· ISBN : 9788997482818
· 쪽수 : 370쪽
· 출판일 : 2025-12-15

책 소개

무안 지역을 대표하는 역사적·사상적 인물들을 인문학적 시각에서 조명하고, 그들의 사유와 실천이 지역문화의 형성과 변화를 어떻게 이끌었는지를 살펴본 연구 성과다.

목차

발간사/ 오해균 • 5

정책연구:
무안의 지역정체성과 인문 연구 방향에 대한 고찰 • 14
_ 이용식 (무안문화원 사무국장)

제1부 시대변화를 주도한 무안 인물들

무안 초대현감 나자강과 후손의 입향순속(入鄕循俗)을 통한 입향정신 고찰 • 48
_ 나천수 (호남지방문헌연구소)
곤재 정개청 학문과 계승 양상 • 96
_ 나상필 (한국학호남진흥원)
실학자 노촌 임상덕의 학문과 사상 • 116
_ 박석무 (다산학자, 우석대 석좌교수)
초의 장의순의 문화예술과 사상 • 131
_ 박관서 (무안학연구소)
김응문 형제의 구국운동과 제2차 동학농민혁명 • 185
_ 김봉곤 (전 원광대)

제2부 19세기 문집을 통해 본 무안 근대 인물들

경당집 문집을 통해 본 노일상의 사상 • 176
_ 노기욱 (전남대 문화유산연구소)
민재 박임상의 삶과 한시 고찰 • 176
_ 나상필 (한국학호남진흥원)
만성 정규병의 학문태도와 역사 인식 • 176
_ 박해현 (초당대)
서발턴의 시학, 삼사재 김재걸의 문학 읽기 • 176
_ 박관서 (무안학연구소)

저자약력 • 368

저자소개

박석무 (지은이)    정보 더보기
제13·14대 국회의원, 한국학술진흥재단 이사장과 성균관대 석좌초빙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는 우석대 석좌교수, 다산연구소 이사장으로 재직 중이다. 다산연구자로서 활동하며 「다산 정약용의 법사상」 외 다수의 논문이 있으며,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다산에게 배운다』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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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관서 (지은이)    정보 더보기
1996년 『삶사회그리고문학』 신인 추천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시집으로 『철도원 일기』, 『기차 아래 사랑법』, 『광주의 푸가』 등이 있고, 『남도문학을 읽는 마음』, 『무안향토문화총서 10호-무안의 길』(공저) 등을 간행하였다. 광주전남작가회의 회장, 한국작가회의 사무총장을 역임하고, 현재 (사)다도해문화예술교육원 대표이사 및 무안학연구소장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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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기욱 (지은이)    정보 더보기
전남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하고 동 대학원에서 강사를 역임하였다.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에서 근무하면서 50여 편의 논문과 저서를 집필하였다. 현재 전남대학교 문화유산 연구소 선임연구원 및 전라남도 이순신연구소와 호남의병연구소 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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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현 (지은이)    정보 더보기
전남 보성 출생 전남대학교 사범대학 역사교육과 및 동 대학원 사학과(문학박사)를 졸업하고, 한국교육개발원 학교평가위원, 한국교육과정평가원 출제위원?교과서 검정심의위원, 전라도천년사집필위원을 역임하였다. 전남대학교 역사교육과 강사를 거쳐 초당대학교 평생교육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한국현대사회연구소장, 광주학연구소장, 마한역사문화연구회 연구소장, 한국민주평화교육원장 등을 맡고 있다. 현재 전남독립운동사 편찬을 총괄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신라 중대사 연구』, 『영암 의병사 연구』, 『독립운동가 의사 김범수 연구』, 『박해현의 새로 쓰는 마한사』, 『독립운동가 교사가 되다』, 『독립운동가 강석봉 평전』, 『도청의 마지막을 지킨 사람들』, 『독립운동가 이경채 평전』, 『독립운동가 최한영 평전』, 『미지의 초상』, 『새로쓰는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있고, 역저로 『판결문으로 본 광주.전남 3.1운동』, 『판결문으로 본 광주.전남 학생운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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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천수 (지은이)    정보 더보기
지방공무언 공직을 정년퇴임하면서 고전 한문 번역으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나주목 관련 자료를 모아 호남학관 카페를 운영하고 있으며. 나주목향토문화연구회 회장으로 나주동학농민혁명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하도록 계기를 조성하였다. 2023년 세계 최초 양심있는 일본 지식인 단체의 이름으로 ‘사죄비’를 나주에 건립하는데 힘썼고, 한일공동추진위원회 대표를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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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상필 (지은이)    정보 더보기
한국학호남진흥원 책임연구위원으로 재직하며, 호남문헌 국역 및 편찬 사업을 총괄하고 있다. 국역은 『송암집』, 『정강일기』, 『희양문헌집』 등에 참여하였고, 논문은 『곤재 정개청의 신원 양상』, 『남포 김만영의 은일 양상』, 『간찰로 본 규남 하백원의 사환기 양상』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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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곤 (지은이)    정보 더보기
필암서원 신앙회 이사며, 순천대 연구교수, 원광대 연구교수, 노사학연구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50여 편의 호남유학과 동학농민혁명 학술논문 및 『이재난고(頤齋亂藁)』(공역), 『조선의 시권(試券)』(공역), 『고산서원지(孤山書院誌)』 등 다수의 번역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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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식 (지은이)    정보 더보기
오래된 유산을 발굴하여 콘텐츠로 가공하는데 관심이 있어 전남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무안문화원 사무국장으로 일하고 있다. 5.18전야제 총연출, 남도음식문화큰잔치 감독 등의 현장 활동과 문화재단, 관광재단 등에서 재직하였으며, 『무등산 스토리자원과 문화콘텐츠 연구』 등을 저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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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무안의 지역 정체성과
인문 연구 방향에 대한 고찰


이용식
(무안문화원 사무국장)


Ⅰ. 머리말: 지역 현실과 문제 해결에 대한 인식

흔히 절대빈곤이 해결된 이후에야 문화나 예술을 찾게 된다고 말한다. 언뜻 생각하면 그럴듯하다. 우선 먹고살아야 문화든 뭐든 즐길 여유가 생길 게 아닌가? 개인적으로만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마찬가지다. 사회나 국가도 경제적 형편이 어느 정도 궤도에 이른 뒤에야 문화와 예술에 관심을 쏟을 수 있지 않겠는가? 보통 이런 사고를 상식으로 여긴다. 그런데 과연 실제로 그럴까? 여기에서 나는 아우슈비츠 수용자들의 참혹한 사례에서 그 답을 찾고자 한다.
참혹한 수용소에서도 ‘티타임’의 관습은 있었다고 한다. 몇 번이나 우려낸 묽은 찻물이었지만 수용자들에게 하루 한 번씩 차가 배급되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그 묽은 차라도 그 자리에서 허겁지겁 마셔버리는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절반은 마시고 나머지는 얼굴이나 손발을 씻는 사람이 있었다는 점이다. 물이 그만큼 귀했던 탓이다. 전자가 동물적 본능에 충실한 사람이라면 후자는 문화적 본능을 따른 사람이다. 그렇다면 누가 살아남을 확률이 높았을까?
놀랍게도 생존율은 후자가 높았다. 극한 상황에서 동물적으로 행동한 사람이 더 생존했을 것 같지만, 실은 최소한의 인간적 체모를 지키려 애쓴 사람이 결과적으로 더 많이 생존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걸까? 수용자들의 동물적 생존 본능이 실패한 원인은 뭘까? 다 마셔버리기에도 부족한 차를 반만 마시고 나머지 반은 수용소의 극한 상황에서 나름의 자신의 문화적 행동에 투자한 사람들이 더 많이 생존한 이유는 무엇일까?
답은 간단하다. 문화적 행동이 생존에 도움을 주었다는 것이다. 생물학적 인간과 문화적 인간을 구분하기는 어려워도 문화는 그저 장식용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개인과 사회의 생존에 필수적인 요소다. 사회의 진화와 발전을 단계적으로 구분하였을 때 문화를 진화의 상위 단계에 올라간 뒤에야 필요한 요소로 보는 견해는 문화가 사회적 생존과 발전의 부산물이나 부속물에 불과하다고 여기는 사고다.
무안 지역은 오래전부터 “지역발전”이란 말이 정치인, 행정가들의 끊임없는 고민과 지역의 오래된 해결 과제였다. 그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실천적 접근은 항상 정치적이며 경제적 방식에서 진행되어왔으며 현재까지도 지역발전을 위한 확실한 방안이라고 생각되어 왔다. 이러다 보니 항상 성공한 사례를 찾게 되고 현실에 적용하다 보니, 전국 어디에서나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비슷한 모형들이 많이 실행되고 있다. 모두 지역발전을 생각한다는 사람들이 정치적 환경에 맞추어 가시적 성과를 위한 경제적인 모형 속에 빠져 있다.
“정치적이며 경제적인” 모형이란 것은 한 곳에서부터 시작하여 획일적으로 어느 곳에나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해 왔고, 실제 그렇게 진행되어왔다. 그 결과는 무안에서 자랑하는 관광지인 “황토갯벌랜드”, “회산백련지” 등에서도 볼 수 있다. 갯벌과 연꽃이라는 테마로 축제를 개최하고 캠핑지로 개방하여 관광객들이 방문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6월~9월 성수기 때만 볼 수 있는 광경일 뿐, 비어 있는 시간이 많은 곳이기도 하다. 이는 전국 유명 관광지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현상이다. 탐방로를 만들고, 예측 가능한 전시물과 축제 진행 시에만 보이는 체험 행사 등 전국 어디에서나 흔히 접할 수 있는 콘텐츠들이다.
그러나 지역이란 것은 본시 대구가 다르고, 광주가 다르며, 나주가 다르다. 그 다른 것을 하나의 성공 모델로 해보자고 덤벼들었으니, 잘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지역은 생태가 다르고 문화가 다르다. 지역마다 그 장소와 지역성을 기반으로 각기 다른 문화적 특성이 있다. 따라서 지역발전을 생각하는 출발점은 ‘다양성’을 전제로 하여 ‘지역적 장소성’을 바탕으로 생태적 환경과 지역이 품은 내면적이자 창의적인 내용을 파악하고 이를 기초로 한 다양한 모형을 구성하여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
‘무안’도 서남해안의 ‘무안’이 있고, 영산강의 ‘무안’이 있다. 해안이 중심인 망운, 해제, 현경과 영산강이 중심이 되는 몽탄, 일로의 생태적·문화적 환경은 서로 다르다. 이런 생태 환경을 통해 달라지는 속 깊은 ‘내면적 창발성’을 중심으로 지역을 바라보고 오랜 역사와 문화를 통해 형성된 정체성을 파악한 후, 그 정체성에서 발현된 지역의 특성을 실행계획에 반영해야 한다. 또한 오랜 기간 지역민들의 삶 속에 깊게 채화된 문화적 콘텐츠를 현대적 트렌드로 가공함으로써, 다른 지역과 차별화된 무안만의 독특한 콘텐츠를 발굴·활용하여 다른 곳에서도 부러워할 수 있는 무안만의 ‘지역발전 모델’을 만들어나가야 한다.
이런 문제의식에 따라 본고에서는 생태적·지리적 환경에 따른 지역의 인문적, 역사적 환경을 고찰하고, 그 속에서 형성된 무안만의 문화적 특질 등을 살펴보고 우리가 지금 살고있는 곳의 지역 정체성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기회를 가져보고자 한다. 또한 이러한 지역성을 바탕으로 향후 인문적 연구가 어떠한 방향으로 전개되어야 하는지 모색함으로, 인문 연구가 지역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지역의 브랜드를 만들어냄으로써, ‘무안’의 미래 비전을 수립하는데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이와같이 지역의 역사·문화적 현장을 되돌아보고 미래에 대한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는 과정은 지역의 어려운 문제를 ‘오랜 과거의 흔적’ 속에서 답을 찾고자 하는 시도라 할 수 있다.

Ⅱ. 무안의 역사적 정체성에 대한 모색

한반도 지도에서 서남해 지역에 있는 무안 반도를 자세히 살펴보면 삼면이 물길로 둘러싸인 한반도와 비슷하게 반도 모양의 지형을 갖추고 있다. 또한 백두대간이 한반도의 허리를 이루며 흘러내려 주로 산악지형을 이루듯이 무안 반도 또한 승달산맥이 좌우로 뻗어 내리면서 한쪽으로는 내륙을 타고 유유히 영산강이 흘러 내려오고 있으며 다른 한쪽은 서남해의 바다가 중국과 연결하여 뻗쳐 있는 물길이 있어 오래전부터 산악 지형을 타야 하는 육지보다 오히려 물길을 이용한 해로와 수로가 발달한 지역이었다.
자세히 살펴보면 무안 반도의 모양이나 역사적·문화적 위상이 한반도의 지형과 비슷하며, 지명유래에 있어서도 ‘물 아래’라는 뜻에서 왔을 것으로 추정한다. 무안 반도를 물과 관련짓는 일, 실제로는 바닷물과 관련짓는 일이 생각보다 의미심장하다. 반도라는 절반의 땅을 강물 혹은 바닷물이라는 절반의 바다로 고쳐 읽는 정도의 의미를 넘어선다.


<그림 1> 해동지도 무안현, 1821년경
/ 출처 :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무안은 오래전부터 서남해안 지역의 해상 중심지로서 역사적 기록에 다양하게 나타난다. 무안이라는 지명은 『고려사』 권57 전라도 나주목 무안군조에 보면, “무안군본백제물아혜군(務安郡本百濟勿阿兮郡), 신라경덕왕(新羅景德王), 경금명(更今名), 혜종원년(惠宗元年), 개물량군(改勿良郡), 성종십년(成宗十年), 복칭금명(復稱今名), 내속(來屬), 명종이년(明宗二年), 치감무(置監務), 공양왕삼년(恭讓王三年), 겸성산극포권농방어사(兼城山極浦勸農防禦使)”이라는 기록이 있다. 『한국지명총람』에서 해석하는 내용을 살펴보면 “본래 백제 때에는 물아혜(勿阿兮) 또는 물나혜(勿奈兮), 수입(水入)이라 하였다. 신라 제35대 경덕왕이 무안으로 고치고, 고려 제2대 혜종 원년(944)에 물량으로 고쳤다가 제6대 성종 10년(991)에 다시 무안으로 고쳐서 나주에 붙였다.(이하 생략)”
여기서 말하는 물아혜나 물나혜는 우리말 발음을 한자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를 ‘물 아래’ 혹은 ‘물 안에’ 등으로 해석한다. 한자로 표현한 수입(水入)도 물이 들어오는 곳이라는 의미이니 크게 다르지 않다. 지금의 영산강 물이 흘러나가는 곳이고, 또 서남해 바닷물이 흘러 들어온다는 뜻이다. 영산강과 서남해안의 물이 흐르는 곳이 ‘무안’이라는 뜻이다. 이렇듯 무안이라는 지명유래를 살펴본 것과 같이 물의 안쪽에 위치한 물과 뭍의 경계라 할 수 있다.

1. 고대와 중세의 무안
지역적 정체성과 더불어 역사적인 환경 또한 뭍과 물의 경계에서 나오는 다양한 사건들이 펼쳐졌던 곳이라 할 수 있다. 고대 무안은 요서(만주) 지역에서 이주민들이 들어왔을 수도 있고, 해상에서 도래한 외부의 발달 된 문명을 바탕으로 유입될 수도 있지만 현재 학계 연구를 통하여 무안 지역 최초 정주 집단에 대한 답을 구하기는 어렵다. 이후 고대 국가 형성에 있어 마한제국의 신미국, 혹은 임소반국이라는 의견이 있으며, 서남해안 지역과 영산강 유역 등에 흩어져 출토되고 있는 선사시대 유물로 보아 나주 반남의 옹관묘 매장 세력과 함께 무안 지역도 6세기 중엽까지 영산강 유역의 정치세력으로 존재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는 최근 역사학계의 연구를 통하여 그간 고대와 중세에 이르도록 무안 반도는 마한이나 백제 같은 국가체제에 속한 변방 지역이었다는 학설에서 벗어나, 고대로부터 중세 초· 중기까지도 힘을 지닌 정치세력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는 무안 지역에는 선사시대의 지석묘, 패총 등 발굴되는 선사 유적들과 함께 거주 유적 등이 출토되고 있어 이 지역에 고대부터 많은 사람이 생활하고 있었음을 고고학적 연구를 통해 알 수 있다.
특히 무안 지역에서 발견된 297기의 지석묘는 주로 해제, 현경, 운남 지역과 몽탄, 일로, 삼향 등 무안 지역 전체에서 폭넓게 발견되고 있고, 옹관묘 등의 수많은 고고학적 유물을 통해서 살펴보면, 기존 백제 지역과는 상당히 성격이 다른 정치집단이 6세기 중반까지 영산강 유역의 정치적 실체를 이루고 있었다는 연구 결과가 나오고 있다. 이것으로 보아 오래전부터 많은 사람이 이 지역을 근거지로 오랜 기간 생활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정치 세력들은 이후 신라의 삼국 통일 이후 장보고와 연대 및 해체를 통하여 해상 세력으로 성장하였을 것으로 생각되며 이후 견훤과 왕건의 몽탄강 전투에서 왕건의 나주 탈환에 공을 세우는 세력으로 다시 나타났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는 장보고 세력의 해체 이후 나주를 중심으로 하는 서남해안의 해상 세력들이 육상 세력인 견훤의 지배에 반기를 들고 일어났던 사건이 왕건의 ‘나주 점령’의 결과로 나타났다. 즉 무안 지역도 나주를 점령한 왕건에게 협력한 세력들과 뜻을 같이한 통일신라시대 때의 해상 세력으로서 장보고 이후를 계승한 또 다른 축을 다투던 강력한 해양 정치세력으로 볼 수 있다.
무안이 해상 세력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세력이 있었다는 것에 대한 증거는 최근 봉대산성 발굴과 출토 유물을 통해 알 수 있다. 무안군이 2024년도 봉대산성 발굴에서 발견된 중국제 도자기류와 함께 발굴된 청동 인장 등을 분석한 ‘최인선’은 봉대산성이 후백제 시대의 성곽으로서 당시 이 지역을 관장하던 호족 세력에 의해 축조되었던 성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림 2> 봉대산성 <그림 3> 봉대산성에서 출토된 청동 인장


특히 “청동 인장”에 새겨진 “현산호력인(賢山扈力印)”의 발견은 이곳이 지배 체계를 갖춘 호씨 성의 세력 근거지였음을 알 수 있다. 봉대산성은 서남해안의 중요한 해안 지역 방어 및 문물 교류 거점을 지키는 행정적 배후지로서의 기능을 지니고 있었으며, 산성 앞에 있는 임치(臨淄)의 경우도 중국 제나라의 수도 이름과 동일한 것으로 보아 오래전부터 중국과 문물을 교류하던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과 근거를 통해 보았을 때 서남 지역의 해안과 몽탄 유역의 영산강 지역을 통치하고 지배하던 호족 세력, 즉 해상을 기반으로 하는 강력한 정치집단이 봉대산성을 중심으로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고려 말·조선 초의 해상 세력과 왜구들의 어지러운 역사적 환경은 조선시대 공도화 정책에 의해 서남해안 지역 해상 세력들이 급격히 쇠퇴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아무튼 무안 지역은 상당히 오랜 기간 고대부터 중세까지의 영산강 유역과 서남해안 지역의 해상을 기반으로 한 세력들이 이 지역을 지배했을 것으로 보인다.

2. 조선시대의 무안
비교적 역사적 기록이 잘 남겨져 있는 조선시대에 들어서면 무안은 기존 고려 시대에서부터 자리 잡았던 무안박씨와 더불어 여러 성씨는 중요한 격변기의 시기에 많은 부침을 겪게 된다. 초기에는 나자강을 중심으로 나주나씨가 들어올 수 있었으며, 조선 초기 사육신과 관련된 대구배씨 등이 입향하였다.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하여 나주정씨 일가들이 무안 지역에 자리 잡았으며, 조선 후기에는 본격적으로 다양한 성씨들이 무안에 들어왔다. 이는 간척과 관련된 경제적 기반 조성과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조선 후기(16세기~18세기) 서해안은 간척으로 경제적 기반을 쌓은 가문이 등장(예: 해남윤씨)하였으며, 주로 지방 사족들의 경제적 기반 형성과 연관되어 무안 지역에도 유입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에 대해서는 다양한 성씨 입향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조선시대 역사적 변화의 중요한 시기에 ‘무안’은 여러 인물을 배출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본격적 지방 행정 체계의 마련을 위해 나자강(羅自康)이 현감으로 파견되었는데, 이는 기존에 귀족이 지방을 실질적으로 통치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치소를 중심으로 중앙 행정조직의 통제를 받는 중앙집권적 통치 체계가 마련되었음을 보여준다.
조선 중기로 넘어오면서 각종 사화의 갈등 속에서도 서경덕의 문인인 정개청(鄭介淸, 1529~1590)을 중심으로 지역 학맥이 형성되었고, 자산서원을 거점으로 지역 선비들의 학문공동체를 구성하였다.
또한 왜란(倭亂)과 호란(胡亂) 시기에는 수많은 지역 인물들이 의병 활동을 통해 분연히 떨쳐 일어났으며, 전쟁 이후 사회적 변화에 대해 응답하여 임상덕(林象德, 1683~1719)은 ‘실학(實學)’을 기초로 역사서인 『동사회강(東史會綱)』을 저술하며 새로운 역사 인식을 정립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시·서·화에 능통했던 초의(艸衣) 장의순이 차(茶) 문화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의 예술세계의 큰 획을 그었으며, 19세기 일제의 국권침탈기에 대구배씨 배상옥, 나주김씨 김응문형제, 해주최씨의 삼의사 등은 의기(意氣)를 바탕으로 동학(東學)사상을 수용하고 항일 투쟁에 나섰다. 이후 항일 의병 투쟁과 광주학생독립운동, 독립운동 후원 활동 등을 통해 무안 지역 선비들은 지속적으로 저항의 정신을 이어갔다.
이처럼 무안은 기존 역사서에서 기록된 ‘변방 지역’이 아닌 고대에서 중세까지에 해상 세력의 중심지였으며, 조선시대에는 역사의 변곡점마다 지역 정체성을 바탕으로 주도적 역량을 보여준 지역이다. 그간 무안에 대한 인문연구가 활성화되지 못해 학술 성과가 부족하여 밝혀지지 않은 사실들이 있을 뿐, 결코 지역의 역사가 ‘없는 것’은 아니다.

3. 지역 정체성의 현대적 의의
오늘날 지역 정체성을 강조하며 자산을 활용해 지역문화를 활성화하려는 흐름은 곳곳에서 나타난다. 전북 고창은 ‘한반도의 첫 수도’, 안동은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 진도는 ‘예향의 본향’을 내세우며 지역의 역사·문화적 특성을 브랜드화하고 있다. 이는 곧 무안 또한 고유한 역사적 자산을 발굴하고, 이를 시대적·보편적 가치로 확장할 필요가 있음을 시사한다. 다만 지역의 특수성과 변별성을 강조하되, 그것이 보편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점은 고려되어야 할 사항이다. 그렇지 않으면 지역 이기주의로 흐를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안 지역 또한 다양성과 융합적 시각을 바탕으로 한 역사·문화 연구를 통해 지역 정체성을 확립해야 될 시점이다.
이제 우리는 오랜 기간 축적된 지역의 역사·문화적 역량을 다시 세우고, 이를 바탕으로 무엇인가를 도모해야 한다.

Ⅲ. ‘전이지대’로서 무안의 문화적 정체성 모색

영국의 사회인류학자인 에드몬드 리치(Edmund Leach, 1910~1989)는 버마 ‘카잔족’의 의식과 의례를 분석·설명하기 위한 이론적 도구로 다음 <그림 4>와 같은 ‘전이지대(Liminal Zone)’의 모형을 적용하여 카잔족의 통과의례와 축제 등의 문화 형태를 해석하였다. 무안의 경우에도 지리적 특성을 바탕으로 하여 형성된 다양한 문화적 현상과 집단적으로 창작된 콘텐츠를 이 모형에 적용함으로써, 무안 문화에 대한 정체성과 특성을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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