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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한국에세이
· ISBN : 9788998151003
· 쪽수 : 264쪽
책 소개
목차
머리말
1부. 점
에덴에서 무등까지
518호라는 방
구름과 수풀
말벌 이야기
저 연둣빛처럼
식사를 소풍으로 바꾼 저녁
무릉은 사라졌어도
건천이 소리를 내기 시작할 때
피아노가 있는 풍경
돌멩이가 묻고 있는 것
나는 너를 듣고 싶다
2부. 선
저 불빛들을 기억해
반달 모양의 칼과 길
나는 이 시장을 사랑합니다
당신을 알기 전에는
스스로 멈출 수 있는 힘
아름다운 농부에 대한 기억
뒤주와 굴뚝
이사, 집의 기억을 나누는 의식
수녀님 어디 계세요?
영혼의 감기
네 밤 자면 집에 갈 수 있어요
피어나지 못한 목숨을 위하여
쓰러진 회화나무의 말
3부. 면
풀 비린내에 대하여
무엇을 줄일 수 있을까
플러그를 뽑는 즐거움
어리석은 자가 산을 옮긴다
가지취 냄새 나는 책을 찾아서
팔 권리와 사지 않을 권리
나무 열매와 다이아몬드
삶을 어떻게 요리할 것인가
영양과 뱀잡이수리
통증과 치유의 주체는 누구인가
폭설이 우리 곁을 지날 때
저자소개
책속에서
운전을 시작하기 전까지 나는 걷기 예찬자였고, 인공적인 공간보다 자연 속에 머물기를 누구보다 좋아했다. 그러나 차를 소유하고부터는 생태적인 어떤 발언도 할 운전을 시작하기 전까지 나는 걷기 예찬자였고, 인공적인 공간보다 자연 속에 머물기를 누구보다 좋아했다. 그러나 차를 소유하고부터는 생태적인 어떤 발언도 할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차를 소유하되 그에 종속되지 않는다는 것, 이런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앞으로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다만 그날 아침의 풀 비린내가 원죄 의식처럼 운전대를 잡은 내 손에 남아 있을 따름이다.
이처럼 우리가 무엇인가를 줄이려고 생각하는 순간, 그것이 우리의 삶을 가장 큰 힘으로 지배하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다. 그리고 정작 위험한 것은 그것의 결핍이 아니라 과잉이라는 것을, 그 과잉을 몇 숟갈이라도 덜어 낼 때 삶은 좀 더 맑아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입속에는 말이 적게, 마음속에는 일이 적게, 밥통 속에는 밥이 적게, 밤이면 잠을 적게”라는 《현관잡기(玄關雜記)》의 한 구절을 자주 떠올리지만, 그런 간소함이란 쉽게 얻어지는 게 아니다.
얼마 전에는 복통으로 한 주 동안 거의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말을 줄이려고 마음먹었던 것처럼 의도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그 또한 무언가 줄여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곡기가 끊어지자 기운은 없어도 오히려 몸이 가볍고 정신이 맑아졌다. 말소리가 낮아지고, 몸을 움직이는 속도도 느려지고, 불필요한 곳에 힘을 낭비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면서 내가 그동안 지나치게 건강하게 살아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인이 백지의 공포와 싸우지 않고 한 장의 백지와도 같은 땅을 들여다보는 것은, 펜 대신 삽이나 호미를 들고 있다는 것은 직무 유기에 가깝다. 그러나 시집을 묶어 내고 다시 정신의 빈터를 찾아 기웃거릴 때 그 낮은 톱밥산은 좋은 일감이 되어 주었다. 그 산을 옮기면서 나는 모처럼 스스로의 어리석음을 마음껏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렇게 얻어진 대여섯 평의 땅 위에는 푸른 것들이 자라기 시작했다. 유난히 비가 내리지 않는 봄에 흉작을 두려워하는 일 또한 그 푸른 것들을 심은 어리석음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