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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로맨스소설 > 한국 로맨스소설
· ISBN : 9788998630294
· 쪽수 : 392쪽
· 출판일 : 2013-09-12
책 소개
저자소개
책속에서
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 미숙은 제 눈앞에 끝없는 길이 있는 듯 보였고, 그 길이 토막토막 끊어져 내리는 것도 보였다. 삶의 희망이 이리도 무서운 것이다. 아주 잠시 찾아온 희망에 더할 수 없이 부풀었던 마음은 그 잠시의 희망에 이미 온통 젖어버려 있었다. 그래서 달라질 것 없는 제 삶이 세상 제일 덕지덕지 한 누더기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다시 그 길을 가야겠지만, 터벅터벅 끝까지 걸어야겠지만, 이제껏 과는 다른 걸음일 것이다. 그 한 발은 늘 절망이 눌어붙어 있을 것이고 다시 내딛는 다른 한 발도 이루지 못한 사랑에 허덕거릴 테니까.
그렇게 미숙의 마음에 비가 내리고 하늘도 미숙처럼 함께 운다. 목적지를 잃은 발이 정처 없이 걷는다. 빗방울이 톡톡 튀며 미숙의 발을 적신다. 애써 휘청이지 않으려는 미숙의 발목을 붙잡으며 빗방울도 운다. 머리칼을 다 적신 하늘의 눈물도 마찬가지. 미숙의 뜨거운 열망을 식히려는 듯 미숙의 머리칼을 타고 내려온 빗방울이 미숙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울어도 된다고. 네 울음은 내가 씻을 테니 너는 마음껏 울라며 속살거렸다. 그렇게 미숙이 빗속을 걷는다.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른 채 정처 없이 달리던 자동차의 보닛 위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후두두 내리자마자 비는 금세 굵은 방울이 된다. 소나기인가. 정철이 시야를 가리며 흘러내리는 빗방울을 지우려 와이퍼를 작동시켰다.
정철의 눈길이 무심히 창밖을 스친다. 비가 내리는데 우산도 쓰지 않은 여자가 그 소낙비를 다 맞으며 종로 거리를 걷고 있었다. 정철의 눈이 번쩍 커졌다. 생각보다 몸이 먼저 유리창을 내렸다. 정철이 미숙의 이름을 크게 부르지만, 빗소리에 묻힌 정철의 목소리가 미숙에게 가닿지 못했다.
왜라는 생각보다 먼저 차를 움직여야 했다. 유턴 지역이 없다. 유턴하려면 동대문까지 가야 할 것이다. 유턴한다 해도 미숙은 반대편 인도에 있으니 그러다 미숙을 놓칠지도 모른다. 정철의 시선이 주변 건물을 훑었다. 그리고 정철의 시선에 작은 식당이 들어왔다. 정철은 무작정 경적을 울려대며 차 사이를 빠져나가 식당 앞에 차를 댔다. 그리고 정철이 차에서 내리뛰기 시작한다. 미숙이 걸어온 길을 정철이 뛰어간다. 미숙이 먼저 간 길을 정철이 뒤늦게 쫓아간다.
우리의 삶은 늘 함께 조우할 수 없는 걸까. 당신은 늘 나보다 앞서 가고 나는 늘 당신을 쫓아야 하는가. 그래도 좋다. 그렇게라도 당신을 잡을 수 있으면. 그거면 된다. 나는 그거면 된다. 어느덧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동시에 젖은 미숙의 어깨도 정철의 눈에 들어왔다. 성큼. 정철의 손에 미숙의 팔이 잡혔다. 놀란 미숙이 정철을 돌아보고 미숙처럼 똑같이 젖은 정철이 와락 미숙을 품에 가두었다. 정철의 품에 갇힌 미숙이 정철의 온기에 취한다.
아아…… 이건 꿈이다. 이건 환상이다. 지독한 열망이 가져다준 찰나의 허상. 그럼에도 미숙이 정철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허상이든 아니든 내게 와준, 놓고 싶지 않은 내 님이라서.
“왜? 왜 여기 있어요?”
한참을 제 품 안에서 미숙을 꼭 끌어안은 채 놓지 않던 정철이 미숙을 조금 떼어내고는 미숙의 눈을 바라다보며 물었다. 미숙은 정철의 얼굴을 가득 적시고 있는 저것은 눈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빗물일 것이다. 빗물이어야만 한다. 저처럼.
“그냥. 엄마가 보고 싶어서.”
틀리기도 하고 맞기도 한 말이다. 틀려도 상관없고, 맞아도 상관없는 말이다. 그저 네가 보고 싶었고 하지만 볼 수 없었기에 이 자리에 있노라 고백하지 않으면 된다. 정철은 미숙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정철이 미숙을 제 품에 끌어안는다.
“약속 안 지키면 나쁜 사람인데. 당신은 좋은 사람이니까. 틀림없이 그런 사람인 걸 내가 아니까 이번 한 번만 봐주는 거예요. 다음부턴 이러지 마요. 약속 꼭 지켜줘요.”
정철이 나지막한 말을 내놓고 미숙의 젖은 머리에 제 얼굴을 묻었다. 정철이 소리 없이 운다. 이 가여운 여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 울고, 이 가여운 여자를 제 품 안에 꼭꼭 가두지 못해 울고, 이 가여운 여자가 절 두고 멀리 가버릴까 두려워 운다. 미숙도 정철과 함께 운다. 똑같이 소리 내지 않고.
우선은 젖은 몸을 말려야겠기에 두 사람은 제일 가까운 모텔로 들어왔다. 그러나 이번엔 몸보다 마음이 더 급해서 두 사람은 또 벗어나지 못하고 서로에게 찾아들었다. 여전히 소리 한 방울 나지 않는 섞임이지만 오늘은 습기가 가득했다. 서로를 찾아 허덕이는 숨결에도 진득한 습기가 가득했고, 서로의 몸을 쓸고 누르는 손길에도 습한 물비린내가 자욱했다. 그래도 그들은 거침이 없었다. 더욱 타올라서 서로의 몸 깊이에 저를 채우려 들었다.
너에게 박혀 나를 떠나가지 못하게 하리라. 너를 묻어 내 몸에 영원히 너를 각인시키리라. 서로가 서로를 끝없이 소유하려 드니 그 열락이 너무 뜨거워 온 우주가 터져나가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