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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한국에세이
· ISBN : 9791130641362
· 쪽수 : 352쪽
· 출판일 : 2021-10-12
책 소개
목차
1장 수렵채집인의 후예
가난해지지 않는 마음 011
가장 부르고 싶은 노래 021
일력 035
일어나서 웃겨봐 048
오후 3시의 빛 057
내가 때린 할아버지들 061
모녀전철 073
겨울처럼 쌓이는 096
완벽한 비극에 대하여 105
2장 열혈우정인의 삶
친구 발견 113
파더스 어드벤처 127
엄마와 한 달 살기 (1) 153
엄마와 한 달 살기 (2) 164
겨울이 없는 집 176
엄청나게 차갑고 믿을 수 없이 뜨거운 181
달팽이 이야기 186
나의 코미디언 197
3장 삶이 유랑하는 순간
최초의 만찬 211
윤 수사관을 기다리며 222
언어에 대한 변 228
베스트 워먼 윈즈 232
주치의를 위하여 249
두 남녀 258
노민정 씨, 당신을 신고한다 268
4장 가난해도 화려할 권리
아감, 나에게 구멍을 뚫어준 남자 277
One Tinder day 291
아직은 잘리지 않았다 295
바이브 306
여름의 도매상 316
환절기 324
홈리스 327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빌라 앞에 있는 손바닥만 한 땅뙈기에 푸성귀를 심었다. 싹을 틔워보려고 씨앗도 샀다. 상추며 깻잎이며 쑥갓이나 겨자채며 바질도 심었다. 비 소식이 잦아서 물을 주지 않아도 알아서 쑥쑥 자랐다. 잘 자란 잎을 마당에서 바로 따와서 씻어다가 현미밥에 생양파와 두부, 된장을 곁들여 쌈 싸 먹는 재미가 쏠쏠했다. 연하고 신선하고 아삭거리는 맛이 꼭 잘 살고 있다는 기분이 들게 했다. 비건 지향인으로 산 지 2년이 넘었지만 야채에 밥을 싸 먹을 때면 세상에 내가 먹을 것이 별로 없다는 사실을 완전히 잊어버렸다.
사흘에 한 번씩 집 앞으로 수박이 도착했다. 여름이 왔다는 뜻이다. 냉장고에 시원한 수박이 없는 여름은 추방이
다. 슬슬 봉숭아를 심을 시기가 다가온다. 나에게 여름이란 봉숭아물을 들인 손끝이다. 손톱이 자라나서 빨간 봉숭아물이 위로 위로 올라가 결국 사라지는 것을 보는 것이 좋았다. 꼭 천천히 해가 지는 것 같았다. 봉숭아꽃이 필 때마다 따서 모아두었다가 ‘오늘인가?’ 싶으면 돌절구에 백반을 넣고 꽃을 찧었다. 달이 통통하게 살찐 밤이었다. 손톱 위에 이겨진 꽃잎을 얹고 랩으로 싸고 실로 돌돌 감아 리본을 묶었다. 함께 물들일 사람이 있다면 금상첨화다. 지난해와 지지난해는 혼자서 열 손가락을 다 묶을 수 없어 이틀에 나눠 낑낑대며 물을 들였다. 다음 날이면 살인마처럼 손발이 빨갰다. 손톱 가득 빨간 석양이 타올랐다. 여름이 한창이었다.
_‘가난해지지 않는 마음’
팥빙수가 먹고 싶어서 인터넷으로 삶은 팥 통조림을 샀다. 작년에는 직접 팥을 사다 불려서 팥 앙금을 삶느라 고생을 했기 때문에 올해는 용의주도하게 인터넷으로 주문한 것이다. 팥 통조림은 업소용밖에 판매하지 않아 가장 작은 게 축구공만 했다. 집에서 팥빙수를 해 먹는 사람이 별로 없는 모양이었다. 빙수를 열 번도 더 해 먹어도 남을 것 같아서 먹을 만큼만 덜고 나머지는 나누기로 했다. 먹을 것과 나눌 것을 잘 소분해서 담고 당근마켓에 무료 나눔 글을 올렸다. 보존제가 들어가지 않은, 방금 개봉한 신선한 팥입니다, 하고 적었다. 그러자 어떤 사람이 지금 빵을 먹고 있던 참인데 발라 먹고 싶다고 나눔을 신청했다. 금방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중에 가장 절실해 보이는 두 명과 만나기로 했다. 수영을 하러 가는 길에 얼려둔 팥 봉지를 들고 나갔다. 땡볕에서 사람들이 내가 줄 팥을 기다리고 있었다. 팥이 든 봉지를 건네고 멀찍이서 인사를 주고받았다. 마스크 위로 눈꼬리가 휘어지는 것으로 보아 웃고 있는 것 같았다. 냉동고에 꽝꽝 얼려둔 두유를 절구로 매우 쳐서 잘게 부쉈다. 거기에 팥 두둑이 덜고 시럽 조금과 콩가루를 아낌없이 부었다. 팥빙수는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여름의 별미다. 두유로 만들어도 매우 맛있는데 아무도 그렇게 만들어 팔지 않아 직접 해 먹어야 한다. 얼얼하고 달큰하고 고소한 빙수가 입안에서 사르르 녹았다. 그릇 위로 숟가락이 정신없이 오갔다. 참 내, 벌써 몇 달째야.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가고, 여전히 뭘 해야 할지 전혀 생각이 안 나네. 나는 생각했지만, 당장 앞에서 팥빙수가 녹아가고 있었다. 아무도 해치지 않는 팥빙수. 함께 나눠 먹는 팥빙수. 절벽에서 보이는 풍경은 오늘도 아름답고, 나는 시간이 갈수록 정말 이상하게도, 전혀 가난해지지 않는다.
_‘가난해지지 않는 마음’
복스럽게도 1년여 만의 폭설이 찾아온 날, 나는 저 네 가지를 비호하며 이사를 강행했다. 전날 밤 가장 아끼는 차
를 꺼내 우려 마시며 정든 집과 작별 의식을 하고, 찻주전자와 찻잔을 뽀독뽀독 닦아 뽁뽁이로 싸두었다. 1인용 돌침대와 1제곱미터 크기의 벤저민 나무가 있음을 이삿짐센터에 미리 일러두고 추가 금액은 15만 원으로 쇼부를 봐둔 상태였으며, 아주 객관적인 통계에 의거하여 우리 고양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이모(친구)를 고양이 담당으로 섭외해놓기도 했다. 몇 개월간 회사와 부동산을 오가며 저녁마다 집을 보러 다니고, 돈을 꿔 전세 계약금 5퍼센트를 현금으로 마련하고, 주말마다 집을 단장하고 집 보러 오는 사람들을 맞이하고, 반차를 몇 번이고 내가면서 대출 심사를 받고, 이사 비용을 마련하는 이 모든 과정을 혼자 겪으며 깨달은 것은 명료했다. 가난한 솔로 여성에게 이사란 명을 축내는 일이구나. 이사를 자주 하지 않는 삶이 곧 행복한 삶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구나. 이사 비용을 갚는 데는 그 후로도 꼬박 1년이 걸렸다.
_‘일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