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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한국에세이
· ISBN : 9791130817033
· 쪽수 : 216쪽
· 출판일 : 2020-09-10
책 소개
목차
책머리에
초판│책머리에
제1장 나는 시인의 아내다
다락방의 소녀 / 첫사랑의 고통 / 수영과 나 / 빛과 어둠의 이중주 / 강변에서 우리는 / 나는 시인의 아내다
제2장 내가 읽은 김수영의 시
토끼 / 달나라의 장난 / 방 안에서 익어가는 설움 / 도취(陶醉)의 피안(彼岸) / 여름 아침 / 백의(白蟻) / 폭포 / 미스터 리에게 / 육법전서(六法全書)와 혁명 / 김일성 만세 / 만용에게 / 우리들의 웃음 / 죄와 벌 / 누이야 장하고나! / 거대한 뿌리 /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 / 도적 / 꽃잎(二) / 성(性) / 의자가 많아서 걸린다 / 풀
제3장 가슴에 누운 풀잎 그리고
원고에 넘버를 매긴 마지막 밤 / 시는 내 곁으로 와 눕고
제4장 내가 뽑은 아포리즘
내가 뽑은 아포리즘
제5장 기억의 삽화들
기억의 삽화들
발문 - 고은
저자소개
책속에서
김 시인이 쓴 「백의」를 원고지 위에 정서하면서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고백적이고 다소 자조적인 전체적 시의 분위기는 느껴졌지만 ‘백의’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지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나는 김 시인에게 그 ‘백의’에 대해 물어보았다. 김 시인은 그것이 ‘밀가루’를 염두에 둔 것이라고 했다. 밀가루도 그냥 밀가루가 아닌 미국의 원조로 들어온 밀가루. 결국 수영에게 ‘백의’는 사회·경제·문화, 어느 것 하나 예외 없이 미국에 종속되어버린 우리의 현실을 염두에 둔 상징이었다. 1967년 가을, 어느 지면에서 영화평을 청탁받은 김 시인은 나와 함께 극장에 갔다. 김 시인은 영화를 반도 채 보지 않고 극장에서 뛰쳐나갔다. 영화 속 배우들의 말투며 표정, 포즈 하나하나까지 미국의 영화배우들을 모방한 것이 너무도 불쾌하다고 했다. 물건이나 상품은 그렇다 쳐도 당시 예술과 예술가들이 갖고 있는 사대주의적 태도를 김 시인은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우리들만의 새로운 옷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시 「풀」 역시 수식 없이 그의 온몸에서 울려 나온 듯한 소리로 꽉 차 있다. 풀이 척박한 땅을 탓하지 않듯 김 시인의 시는 과잉도 부족도 없이 그의 몸 안으로 안으로 흐르고 있는 것 같다. 탈고를 하고는 김 시인은 매우 만족스러워했다.
늘 작품을 한 편 완성하면 개선장군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 봄날같이 평온한 날들이 달포쯤 지나면 여지없이 다시 폭풍우가 몰아쳤다. 다시 새로운 시를 쓰느라 꼭 몸부림 같은 진통을 겪는 것이었다. 일 년에 열두 편에서 열세 편의 시들, 김 시인은 자신만의 주기를 갖고 있었다.
시에 대한 시인으로서의 자세와 김 시인의 시정신의 끝은 존재에 대한 사랑에 꽂혀 있었다. 개인으로서 시인의 행복이란 있을 수 없는 것으로 여기고 안일과 무위(無爲)를 극도로 거부한 그였다. 오직 존재의 참되고 아름다운 정신의 지표를 바랐다. 자학까지 하면서 그는 그 길을 가고 있었다. 그 길가에서 자라나던 무성한 풀잎들, 내 가슴 속에는 언제나 그의 싱싱한 풀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