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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91157957613
· 쪽수 : 280쪽
· 출판일 : 2025-02-15
책 소개
목차
13. 함흥
14. 재회
15. 윤동주
16. 백신애
17. 망명
18. 만주비가
19. 결혼
20. 조만식과 김일성
부록 1. ‘백석과 자야의 러브스토리’는 김영한의 소설이었다
부록 2. 〈북방에서〉부터 〈나 취했노라〉까지 백석의 만주 현장을 가다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1938년 봄이었다. 봄이 늦게 오는 함흥에도 진달래가 만발했을 때니 4월 중하순쯤이었을 것이다. 첫 시집 출판기념회 등으로 바쁘게 지낸 천명이 느닷없이 영생고보로 나를 찾아왔다. 얼굴은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띠었다.
“천명, 무슨 일이야? 편지나 전보도 없이, 갑자기 함흥에 나타나다니.”
“내가 흰돌을 보고 싶어 견딜 수 없어, 동남풍을 몰고 왔지.”
“뭐야? 뜬금없이.”
“흰돌의 별명을 사슴에서 당나귀로 바꿔 부르는 것을 상의하려고.”
“웬 당나귀?”
“시치미를 떼도 소용없어. 내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보고 그렇게 정했으니까.”
“아, 그 시?”
나는 1937년 겨울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란 시를 썼다. 연이와 배신우가 도둑결혼한 고통을 달래기 위해서였다. 나는 시 초고를 천명에게 보여줬다. 고통은 나누면 줄어들고 기쁨은 같이 즐기면 불어난다는 말처럼, 배신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서였다.
- ‘12. 여문인 3인방’ 중에서
“선생님 큰일 났습니다~”
내가 하숙집으로 돌아와 막 저녁을 먹으려고 할 때였다. 백석문학회에서 시를 배우는 박경남이 헐레벌떡 뛰어들었다. 박경남은 영생고녀를 다니는 문학청년이었다.
“무슨 일인데 숨이 넘어가느냐?”
“선생님, 학생들 열댓 명이 함흥경찰서로 붙잡혀 갔습니다.”
“학생들이 붙잡혀 갔다고?”
“네. 일제 경찰들이 조금 전, 영생고보에 들이닥쳐 강당에 있던 학생들을 모조리 연행해 갔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라더냐?”
“자세히는 모르겠고요, 스파이 학생 관련…”
“학생 스파이라고?”
나는 그 말을 듣자, 숟가락을 놓고 벌떡 일어섰다.
“알았다. 내가 함흥경찰서에 가 봐야겠다.”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아니다. 네가 가면 너도 갇힐 수도 있으니 너는 집에 가서 기다리거라.”
조마조마하던 일이 드디어 터졌다. 나는 영생고보 영어 선생을 하면서, 영생고보는 물론 함흥 시내에서 문학에 뜻을 둔 학생들과 함께 ‘백석문학회’를 만들었다.
- ‘13. 함흥’ 중에서
연이가 ‘나를 보고 싶어한다’는 신우의 말을 듣자, 내 눈앞에는 갑자기 연이의 모습이 펼쳐졌다. 4년 전, 이진의 결혼피로연 때 처음 본 바로 그 얼굴이었다. 두 눈이 왕방울처럼 컸고, 큰 눈 한가운데 동그랗게 뜬 검은 눈동자가 크고 맑았다. 눈동자는 호기심 많은 여학생답게 초롱초롱 빛났다. 머리는 옻칠한 것처럼 까맸고, 검은 머리는 쪽을 지어 단정하게 묶었다. 머리를 반으로 나눈 가르마가 훤한 이마 가운데로 지나 코와 입을 일직선으로 이어졌다. 오뚝 솟은 코와 살며시 다문 입술이 다정다감한 성격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첫눈에 반했었다. 배신우가 연이와 결혼한 뒤에도 1년 넘게 연이 얼굴이 불쑥불쑥 떠올랐다. 그때마다 술을 마셨고, 술로도 달랠 수 없을 때는 시를 썼다.
푸른 바다가의 하이얀 하이얀 길이다
아이들은 늘늘히 청대나무 말을 몰고
대포풍잠한 늙은이 또요 한마리를 드리우고 갔다
- ‘14. 재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