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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한국에세이
· ISBN : 9791158543136
· 쪽수 : 240쪽
· 출판일 : 2021-08-20
책 소개
목차
서문_위로를 나누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
인연
봄비 내리는 날이면 / 저 기억나세요? / 움켜쥔 손 / 사람에게 사람보다 / 아, 할아버지! / 영원한 내 편 / 가장 좋은 약 / 흉터 / 어머니의 어금니 / 올챙이의 이사 / 역지사지 / 외계인 엄마 / 마음은 휴대전화를 타고 / 쑥 한 줌 / 백 원 / 고구마 덕분에 / 인연 / 사과 두 알 / 실내화 짝짝 / 우산과 초콜릿 / 그래서 식구! / 내 경적 소리를 들어라! / 그 이름 김옥주
이웃
이웃이라는 이름 / 천사를 만난 곳 / 인정의 볍씨 하나씩 품고 / 혹시 아이들이? / 악한 끝은 없다 / 앞집의 비밀 / 엄마를 찾아 주세요! / 그 길에 서면 / 뭉치 이야기 / 쩔룩발이 할매 / 경비원, 황 씨 아저씨 / 내 친구, 민자 / 측은지심 / 탈고되지 않은 동화 / 건강한 유산 / 인터폰 단골 / 묘지기 할아버지 / 욕심 / 그래도 이웃 / 함께 살아요 / 알 수 없는 삶 / 청둥호박 세 덩이 / 그곳
인생
한올진 이웃 / 나에게 웃어주기를 / 날아라, 잠자리 / 오해와 편견 / 거북이 / 하얀 거짓말 / 세상에서 가장 귀한 인사 / 솔봉이, 서울에 살다 / 진호 / 아버지와 식사를 / 인연 / 다정 / 미주와 사이다 / 설득과 이해 사이 / 뜨거운 인생 / 희망으로 가는 중 / 텃밭 편지 / SIZE FREE / 진상과 오지랖 사이 / 돌아올 그날 / 용서 없는 시간 / 둘째 동생과 우유 한 병
저자소개
책속에서
[머리말]
위로를 나누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
제 인생은 큰외삼촌이 아버지 죽음 보상금을 빌려간 전후로 나뉩니다. 말하자면 제 나이 열두 살 전후로 나뉩니다. 아버지 장례를 치른 뒤 서울에서 내려온 큰외삼촌은 우리 네 자매들 교육을 위해 서울행을 종용했습니다. 아버지 목숨 값은 그즈음 봉투째 넘겨졌고요.
사십여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선명한 일인데 큰외삼촌은 그런 적 없다며 딱 잡아뗍니다. 오히려 어머니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겠다며 서슬이 시퍼랬습니다. 친오빠에게 배신당한 제 어머니는 애옥살이와 대장암을 견디며 애면글면 살았습니다. 겨우 서른두 살이던 어머니는 이제 노인이 되었지만 그 돈은 여전히 부재중입니다.
어린 저희들은 늘 배가 고팠습니다. 한참 클 나이에 소금 찍어 밥을 먹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배가 고프면 불안해져서 서둘러 음식을 만듭니다.
우리가 살던 칠흑 같던 지하실도 떠오릅니다. 검은 곰팡이가 기어오르는 벽에 합판을 덧대 만든 지하실 한쪽 방이며, 음울하고 어둑하던 형광등 불빛도요. 모터로 퍼 올리던 생활하수에는 들쥐가 들락거렸습니다. 눅눅한 비닐장판을 들면 집게벌레며 바퀴벌레, 지네 같은 온갖 벌레들이 들끓었습니다. 특히 잠자던 얼굴에 날아와 앉던 미국바퀴벌레는 지금도 끔찍합니다. 나중에는 잠결에 제가 제 뺨을 후려쳐 잡았습니다.
문득 깻잎 향기가 찾아듭니다. 6월에, 더구나 땅과 먼 고층아파트에서 쨍볕에 익는 깻잎 향기라니 말입니다. 경상도 지리산 제 고향 장찬밭에서 익던 그 깻잎 향기가 말입니다.
깨밭에는 늘 할머니가 호미 한 자루와 살았지요. 오롯이 내 편이 되어주던 친할머니는 아버지가 사고로 돌아가신 충격으로 앉은뱅이가 되었지요. 그 단정하던 할머니가 말입니다.
정말이지 자꾸 깻잎 향기가 납니다. 아무래도 할머니가 제게 다녀가셨나 봅니다. “수갱아이! 이제 잊어라. 그 돈, 너그 명줄과 바꿨다 생각하고 잊어라, 잊어.” 이렇게 일러주시느라 말입니다.
네, 그러고 보니 그래도요, 제게는 엄마와 동생들이 있었네요. 귤을 사줬던 노신사며, 두꺼비 아줌마, 정태, 김옥주 할머니, 이탈리아 천사, 내 친구 민자, 1학년 2반 박은우…. 이렇듯 따뜻한 이웃들이 있었네요. 함께 걸음동무가 되어 주었네요. 책장을 넘기면 그 구순한 사랑들이 손을 흔드네요.
그래서 이 책은 사랑 이야기입니다. 읽으면서 눈물이 고이고, 콧물을 훌쩍이게 되지만 그래도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사랑 이야기입니다. 그만하면 괜찮다고, 괜찮았다고 위로를 나누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입니다. 여전히 가슴속에 살고 있는 어린 ‘나’에게도 등불을 켜주는 이야기, 어른이 읽는 동화입니다.
우편함에 담긴 편지 봉투를 꺼내 보니 발신인에 ‘박승우’란 이름이 적혀 있었다. 혹시 우리 딸아이를 좋아하는 녀석일까? 혼자 이런저런 상상을 하며 조심스레 봉투를 뜯었다.
‘저 기억나세요?’ 편지의 첫마디였다. 누굴까? 잘못 온 편지는 아닌 것 같은데……. ‘저, 박승우라고 해요. 기억 못 하시겠지만 저는 아줌마를 자주 생각해요. 아줌마가 저를 가출하지 않게 해 주셨거든요.’ 편지를 읽어 내려가면서 조그만 아이가 불쑥 떠올랐다. 그랬구나. 이름이 승우였구나.
5년 전쯤이었나? 뭇별이 가득하던 밤, 마을 앞 귀목나무 옆에서 사내아이의 흐느낌을 들었다. 다가가 아이 얼굴을 본 순간 숨이 멎는 것 같았다. 피범벅이었다. 소스라치게 놀라 누가 그랬느냐고 소리 지르며 아이를 왈칵 끌어안았다.
내 흰 남방에 금세 피가 뱄지만 개의치 않았다. “어떡해, 어떡해…….” 아이와 함께 울었다. 엄마가 일곱 살 때 돌아가셨다고 했다. 그렇게 남겨진 세 살, 여섯 살 여동생들과 사는데 거짓말을 했다는 이유로 아빠에게 맞았다고 했다. 입술이 터지고 콧등이 시퍼렇게 부풀어 올라있었다.
“아줌마, 저 가출할 거예요. 아빠가 미워요. 엄마가 보고 싶어요.”
어깨를 들썩이며 서러운 울음을 토해 내던 아이에게
“아빠는 지금 후회하실 거야.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약속 받아 낼게. 또 때리면 7동 206호 아줌마 집으로 와.”라고 말하며 아이를 품에 안고 오래도록 손을 풀지 않았다. 그렇게라도 엄마 냄새를 맡게 하고 싶었다.
그 후 난 아이를 스치듯 보며 살았지만 아이는 날 모를 거라 생각했다. 어두워서 내 얼굴을 제대로 못 봤을 거라고, 그냥 동네 아줌마쯤으로 잊힐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리 오래 기억하고 있었다니 목이 멨다. 더구나 이 편지는 6학년 졸업 기념 숙제라고 했다. 잊지 못할 사람에게 편지를 쓴 뒤 부치고 오라는 숙제였다고. 끌어안고 함께 울어 준 것밖에 없는데…….
열린 창으로 인동꽃 향기가 훅 뛰어들었다. ‘아줌마가 아빠한테 약속 받아 낸 뒤부터 한 번도 안 맞았어요. 감사합니다. 중학교 가서도 열심히 공부할게요.’ 마지막 인사에 ‘승우야, 너를 어떻게 잊니.’ 울컥 편지를 품었다. “밥은 먹었니?” 곁에 있듯 말을 걸었다.
- 1부 ‘저 기억나세요?’ 중에서
외가가 있는 서울 양재동으로 이사를 온 것은 중학교 1학년 겨울방학 때였다. 지리산 골짜기에서 나고 자란 촌뜨기 아이라고 학교 애들도, 동네 애들도 껴주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동생들이 친구가 되었다.
그러던 다음 해 여름, 뒷집에 사는 아주머니가 방학 동안에 가락시장에서 일해보지 않겠냐고 했다. 한마디로 방학 아르바이트였다. 양파를 망에 넣는 일이라고 했다.
그 순간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양재동에서 도곡동 숙명여중까지 버스를 타고 다니려면 회수권이 필요했는데 돈이 없었다. 아버지 사고 보상금으로 받은 돈은 큰외삼촌이 잠깐 쓰고 준다며 가져가는 바람에 더욱더 궁색했다.
양파 망은 대, 중, 소로 나뉘었다. 양파 ‘대’짜리 한 망을 다 채우면 30원, ‘중’짜리는 20원, ‘소’짜리는 10원이었다. 양파도 그냥 담는 것이 아니라 방법이 따로 있어서 예전부터 양파 담는 일을 해 온 아주머니들에게 배워야 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쉽지가 않았다. 한 망, 두 망, 담고 나니 손톱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헐렁하게 망을 채워도 안 되고, 너무 큰 양파를 선택하면 묶을 수가 없었다. 또 크고 반듯한 것을 얼굴(소비자가 망을 들었을 때 앞쪽에서 보이게 하는 것)로 해서 넣어야 했기 때문에 쉽지 않았다. 산더미처럼 쌓인 양파 속에서 그 얼굴을 찾아 넣어야 했는데 초보인 나는 시간이 많이 걸렸다.
“학생이 공부나 하지, 뭐 하러 나왔니?”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쓰고 쭈그린 채 양파를 넣고 있는데 앞에 앉은 아주머니가 말을 걸었다. 영주 엄마라고 불리는 아주머니였다. 처음 왔을 때 망에 양파 얼굴 예쁘게 넣는 거며, 이것저것 친절하게 가르쳐 주던 아주머니였다.
쉬는 시간에 다른 아주머니들이 커피 마시며 하는 얘기를 들었다. 영주 엄마가 간암에 걸렸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치료는커녕 나와서 이렇게 일을 하고 있는 것은 중학생인 딸아이마저 버스에서 내리다 오토바이에 치였기 때문이었다. 설상가상 오토바이 운전자가 무면허 운전자에 미성년자여서 입원한 영주 병원비 마련하느라 이를 악물고 일을 한다고 했다.
모여서 점심 도시락 먹을 때도 영주 엄마는 양파를 넣었다. 모두 사정이 어려워 일을 나오니 누구 하나 선뜻 도움을 줄 수도 없는 상황이라 알면서도 굳이 말을 꺼내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영주 엄마는 다른 아주머니들 쉬는 시간에도 쉬는 걸 보지 못했다.
그런데 어느 날 영주 엄마가 내게 보름달 빵과 우유를 내밀었다.
“난 방금 먹었어. 한참 클 나이에 굶고 일하면 안 돼.”
먼지 뽀얗게 쓴 영주 엄마가 내게 부득불 내민 우유와 보름달 빵을 나는 볼이 미어지게 얼마나 달게 먹었는지. 난 그다음 날부터 아줌마 밥과 내 밥을 한 도시락에 꾹꾹 눌러 담고 빈 유리병에 신 김치를 담아 와 “바빠서 도시락 못 싸 왔죠?” 너스레를 떨며 나눠먹었다. 그렇게 한 달 정도 일을 하고 방학이 끝나 갈 즈음 매일 매일 몇천 원씩 떼 놨던 돈을 영주 엄마 가방에 넣어 놓고 왔다.
‘이 돈은 다른 데 쓰지 말고 꼭 아줌마 점심 빵 사드세요.’
하트를 그려 넣은 메모지도 함께……. 영주 엄마가 그때 그 메모지를 보셨을까? 꼬깃꼬깃 접힌 천 원짜리와 함께?
양파를 볼 때면 지금도 나는 영주 엄마 생각이 난다.
-3부 ‘솔봉이, 서울에 살다’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