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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시 > 한국시
· ISBN : 9791158965785
· 쪽수 : 128쪽
· 출판일 : 2022-12-28
책 소개
목차
제1부
너의 천사•13/다마스커스 칼•14/감자전•16/돼지가 오는 밤•18/신촌 우화•20/코비드 연인•23/우리는 혀를 나눠 먹었죠•26/링링•28/작은 의자와 작은 테이블의 철판요리 집•30/토성에서 생각하기•32/상수역 4번 출구•34/여자의 정면•37/독후감•38/영혼은 육체를 모사하고•40
제2부
콜링•43/수국과 나•44/작약을 보내다•46/수원에서•48/강의 벤치•51/포레스트•52/안목•54/델타 행성•56/밤의 천변에서•58/청귤이 오는 소식•60/회복기•62/여수에서•64/흑작약•66
제3부
북쪽의 수문•69/시간의 정원•70/거울 회관•72/내가 망친 페이지•74/유체이탈•76/사물의 본연•77/초록에 대한 해석•78/나의 각다귀•80/두 개의 눈동자•82/두 개의 붉은 사립문이 있는 화령전•84/투명한 미래•85/흑염소를 먹으러 갑시다•86/테헤란로•88
제4부
글자의 품위•91/말린 꽃•92/몸 끝의 인드라•94/시인의 부고•96/생일•98/사랑은 지옥에서 돌아온 흰 개와 같아•100/너의 칼로•102/거미에 대한 생각•104/흰 새의 방•106/물의 관람석•108/비 오는 눈동자•110/너를 등에 업고•112
해설 이재훈(시인)•115
저자소개
책속에서
■ 해설 엿보기
인간의 상상은 땅에서 출발하여 가장 먼 우주로 향한다. 시에서 자주 얘기되는 자아의 세계화나 세계의 자아화는 동일성의 개념을 설명하면서 자주 쓰이는데 이런 개념이 시적 상상력의 근간이 된다. 인간이 발 딛고 살아가는 땅은 현실세계를 환기하며 성찰과 연대의 덕목을 떠올리게 한다. 시는 근본적으로 현실을 성찰하는 데 많은 시간을 쏟아왔다. 땅에서 출발한 시적 상상력은 이 세계의 온갖 자연물들과 모든 사물들을 시적 대상으로 선취하기도 하고 허공을 넘어 우주로 향하기도 한다. 시적 주체의 시선이 우주로 향하는 순간, 시는 인간의 원형과 시원을 꿈꾼다. 그러므로 형이상학적 사유가 시의 질료가 되며 시는 제의적 성격을 띠기도 한다.
함태숙은 첫 시집 『새들은 창천에서 죽다』에서부터 현실과 우주의 거리를 시인의 직관으로 단숨에 끌어들여 광활한 사유를 펼쳐왔다. 가령 “너는 몇 겹 하늘 위 공허를 다 데리고/네게서 소멸된 모든 빛을 다 데리고/죄 받듯 온단다/벌 받듯 온단다”(「수태고지」)는 선언적 시행은 마치 신과 교유하는 한 실존의 제의적 고백처럼 읽힌다. 수태고지를 받은 주체는 “내 속의 가장 빛나는 영토를/가져가시고/물고기 한 마리를 내리소서/대지의 어머니가 기원하자/생살이 찢어지며/빗물이 내리쳐/젖은 채 타오르는 강이 생겼다”(「회임」)는 신화적 서사를 받아들인다. 즉 시적 주체의 몸은 우주를 관통하는 하나의 매개체이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하나의 우주이다. 시인은 자기만의 우주를 인식하고 언어화시킬 수 있는 주체이다. 이번 시집에서도 단단하고 날 선 내면의 언어가 곳곳에서 쏟아지듯 흘러나온다. 인간 군상들이 경험하는 사유가 행성을 배경으로 한 상상력으로 습합되고 진화한다. 더욱 눈에 띄는 것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가진 운명적 결함을 목도하는 점이다. 시는 인간의 결함을 깨닫게 하는 유일한 언어이다. 하여 “여긴 왜 시어가 없지?/더 이상 방을 잃은 그들”(「사물의 본연」)이라고 방황의 순간에서도 시를 찾는 주체를 만난다. 시는 “홀로 서 있는 기둥처럼/분명 서로에게로 집결하던 하나의 문장을/구조화”하는 언어이다. 시인은 시를 통해 사물의 본연을 인식하려는 태도를 가진다. 이러한 인식은 다음의 시와 같은 해석을 낳는다.
너와 빗줄기는 무주고혼이라 폭우에는 강을 돌아보고 오는 일 몸속을 파고들고 물뱀을 끄집어내고
습기를 다 놓을 때까지 세상과의 일을 멈추지 않을 거야 흙탕물을 튕기며 우리가 모르는 전투가 시작되었다
한 번의 화해가 있었을지 모르지 우글거리는 초록 뱀들의 터널에서 최초의 감정을 숨기고 흉해지기로 한 마음이
배를 까뒤집으며 피크닉 박스 안의 생이 쏟아진다 퉁퉁 불어 풀려 나온 검정 구두들
주검을 품고 무거워지는 적란운들
함부로 부러지고 떠내려 오는 것들은 누구의 잠으로 흘러가나 핀셋으로 끄집어 올리는 꿈속의 꿈 피부 아래에 꿈틀거리는 빗줄기와 말하기 위해 존재를 구부리는 최초의 환형 문자들
사랑이란 말을 고안하기 위해 인류가 공들여 온 섬세한 죄악들
왜 이렇게 된 건지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인지
답변보다는 질문이 하고 싶어져 오래 견딘 지옥이 있었지
눈과 음부에 사이좋게 나눠 갖고서 급류를 만들어가는 기필코 충돌하고야마는
에덴의 내부가
― 「초록에 대한 해석」 전문
시인이 내놓는 초록에 대한 해석은 원형의 서사에 가깝다. 타자로 대표되는 ‘너’와 사물로 대표되는 ‘빗줄기’는 모두 이 세계를 떠도는 외로운 영혼들인 무주고혼이다. 무주고혼의 존재는 근원의 몸을 가진다. 폭우가 오면 강을 돌아보고 몸속의 물뱀을 꺼내는 일을 서슴없이 한다. 그것이 인간이 숙명처럼 치러야 하는 전쟁이다. 인간의 몸속에 있는 뱀은 원죄의 상징이다. 인간은 “최초의 감정을 숨기고 흉해지기로 한 마음”과 매번 싸워야 한다. 뱀을 통해서 경험하게 되는 것은 “배를 까뒤집으며 피크닉 박스 안의 생”이며 “퉁퉁 불어 풀려 나온 검정 구두들”이고 “주검을 품고 무거워지는 적란운들”이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시인의 사유 속에서 “꿈속의 꿈”으로 환치되어 “최초의 환형 문자들”로 화한다.
시인은 원죄를 껴안고 사는 인간의 숙명을 원형 상징을 통해 고민하고 있다. 사랑은 인간의 원형적이고 보편적인 관념에 속한다. 인간은 누구나 탈(persona)을 쓰고 살아가며 이것 없이는 사회적 관계를 지속하기 어렵다. 원형은 영혼의 가장 밑바닥을 보여주는 일이다. 시의 이미지는 폭우와 초록으로 가득하다. 이런 이미지들은 “눈과 음부에 사이좋게 나눠 갖고” 또한 “기필코 충돌하고야마는” 관계 속에 있다. 마치 에덴의 공간처럼.
이처럼 함태숙의 언어는 먼 기억으로부터 소환된 상상에 젖줄을 대고 있다. “제가 살지 않은 시대의 글자”(「콜링」)를 보며 “신들의 필기체”와 같은 언어를 쓰다듬으며 “신의 도형”을 상상한다. 언어에 대한 감각은 근원에 대한 희구를 불러일으킨다. 시의 주체는 “텅 빈 입과 텅 빈 귀와 당신의 텅 빈 얼굴 호명되어야 완성되는 기나긴 창세”를 완성하기 위해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 이재훈(시인)
나는 멀어진다
한 방울의 지구
한 방울의 지구
그리고
남은 것이 있다면……
내가 흘린 눈물 속으로
추락하는
천사
― 「너의 천사」 전문
어디서 이 간극은 발견된 것일까
생이 여러 번이었다면 가장 단순한 곡선이 되었을 거다
부피를 삭제한 바다처럼
깊이란 건 수평의 개념이 되는 거지
끝없이 길어지는 양팔을 봐
무릎을 가슴에 싸안듯이
우리는, 우리의 바깥으로 튕겨져 나가지 않게
우리의 감옥을 자처하며
하나의 둥근 질량을 얼음과 먼지의 고리로 에워싼
당혹스러운 아름다움을
노이로제에 걸린 연인의 눈 속에서 번쩍! 이는 섬광을
떨어진 부싯돌을 주워 들듯이 이게 맞나? 망설이며 모든
생애의 허리를 굽히듯이
그때 다시 리셋 되는 시계처럼
혼자만의 유일한 설득으로 다시 나를 데려오는
너는, 다정한 나의 몰락
근접하면 타버리는 표면을 끝까지 다이빙하며
너는 영혼 속에 어떤 간극을 포함시켰다 네가 사라지며
재생되는
사랑의 기술력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생활 위로
폭우가 내린다 미친 듯이 소멸하는 피사체를 따라잡으며
끝없이 전송하는
전소하며 내려앉는 음악이 되어
― 「토성에서 생각하기」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