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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예술/대중문화 > 미술 > 미술사
· ISBN : 9791160401394
· 쪽수 : 452쪽
· 출판일 : 2018-04-12
책 소개
목차
프롤로그 - “백 살 먹으니 이제 그림을 알 것 같다”
1부. 그림 잘 그리는 부잣집 아이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예술의 출발 - 평양 갑부 집안의 화가 입문
서화의 시대에서 미술의 시대로 - 서양미술의 선구자, 아버지 김찬영
미술과 문학의 교류를 시도하다 - 모더니스트 김찬영과 문예활동
고려청자에서 서화까지 - 고미술품 수장가 김찬영의 영욕
불운한 선구자, 금기에 도전하다 - 천재 화가 김관호의 영광과 좌절
신미술 운동의 싹을 틔우다 - 평양 삭성회의 미술학교 설립 운동
2부. 풍성한 문화적 토대, 평양 시절
약혼식은 조만식, 결혼식은 주기철 집전 - 기독교 문화의 요람, 평양
평양과 서울, 박수근의 달라진 위상 - 평양 화단의 국내파와 유학파
김동인 자서전의 ‘한량 K’는 김찬영 - 평양의 대표 문인 김동인과의 인연
유항림의 헌책방에서 탄생한 ‘단층파’ - 평양 문단과 문학 동인 ‘단층’
우리는 모두 유민이었다 - 좌우로 갈린 김사량과 오영진
3부. 일본 유학과 아방가르드 미술
아방가르드에서 마침내 길을 찾다 - 아방가르드 양화연구소 입학
김환기는 ‘놋포킨’, 김병기는 ‘킨보’ - 새로운 미술운동과 다양한 실험
보수적 아카데미즘 vs 새로운 모더니즘 - 1930년대 조선인 유학생들의 활동
“천황폐하는 심심하겠지요?” - 문화학원과 자유주의 예술교육
민족의 상징, 이중섭의 소와 문학수의 말 - 친구 이중섭과 문학수의 추억
재일 조선인 학생극단에 참여하다 - 도쿄학생예술좌 연극운동과 주영섭
침대 양보했더니 하는 소리가… - 박제된 천재 이상 시인과의 인연
추상과 초현실주의 미술…황홀한 혼란기 - 식민지 시절과 일본 유학생
일본인을 아내로 맞을 수는 없었다 - 첫사랑 오후나의 추억
4부. 조선미술동맹 서기장, 그리고 월남
그날 우리 앞에는 희망이 있었다 - 평양에서 서울로, 밀사가 되다
그림은 장식이 아니라 ‘시대정신’ - 해방 이후 평양의 문화예술인들
“장군님께서 만나자고 하십니다” - 김일성과의 첫 만남
이념 지향에 따라 이합집산 - 해방공간 미술단체와 좌우 분열
시국은 점점 반예술적으로 돌아갔다 - ‘반동분자’의 평양 탈출
좌우합작 전시의 좌절 - 50년미술협회 결성과 6·25
5부. 전쟁과 파괴의 시간
문학수 목소리에 ‘이제 살았구나’ - 전쟁 발발과 의용군 탈출
“대동강철교를 이읍시다” - 평양 탈환과 대동강 후퇴작전
전쟁의 ‘레알리테’는 어디에! - 부산 피난 시절과 피카소와의 결별
전쟁과 예술은 상극의 개념 - 국방부 종군화가단 활동
바둑으로 시름 나눴던 이쾌대의 월북 - 거장 이쾌대와의 인연
6부. 한국미술협회와 현대미술 운동
서울대 장발 학장에게 충성을 다했으나… - 서울대파와 홍익대파로 나뉜 미술계
‘냉면 대접 투척 사건’이 벌어진 이유 - 미술단체의 분열과 국전 분규
장준하와의 친분으로 「사상계」 참여 - 현대미술운동과 비평활동
미술계 혁신에 뛰어들다 - 한국미술협회 창립과 이사장 취임
‘상파울루 비엔날레’를 바꾼 한 표 - 국제전 최초 한국인 심사위원
7부. 작품에 몰두했던 20년 뉴욕 생활
‘화가의 길’을 위해 뉴욕에 남았다 - 비엔날레 후 뉴욕 정착
추상 넘어 형상, 면을 넘어 오브제로 - 미국 현대미술의 인상
김병기가 미국 가더니 히피 왕초가 됐다? - 뉴욕 새러토가의 생활
8부. 백세청풍, 다시 조국에서
귀국, 그리고 1986년 서울의 눈물 - 20년 만에 귀국전을 열다
생트빅투아르 산에서 세잔에게 묻다 - 유럽 여행과 작품 세계
98살의 회고전, “제가 돌아왔습니다” - 국립현대미술관 초청 회고전
에필로그 - “길이 생기면 이미 길이 아니다”
저자소개
책속에서
옆 테이블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청년이 불만스럽다는 듯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초현실주의 같은 사조는 인정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시인 윤동주, 바로 그였다.
“주영섭은 평양 주공삼 목사의 자녀들 가운데 막내, 즉 주요한과 주요섭의 동생이다. 나의 광성학교 4년 선배로, 리더십이 훌륭했다.”
“신미술가협회에는 이쾌대, 이중섭, 문학수 같은 내 친구들이 참여했고 최재덕, 진환, 김학준, 김종찬 등도 들어 있었다 이들은 도쿄 유학생으로 보수적인 아카데미즘보다 진취적 화풍을 선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