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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무치

정조의 무치

(문무를 갖춘 완전한 나라를 꿈꾸다)

허태구 (지은이)
  |  
휴머니스트
2020-11-30
  |  
2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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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무치

책 정보

· 제목 : 정조의 무치 (문무를 갖춘 완전한 나라를 꿈꾸다)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조선사 > 조선후기(영조~순종)
· ISBN : 9791160805109
· 쪽수 : 312쪽

책 소개

정조학 총서. 조선시대사 연구자 4인이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학총서 지원 아래 6년의 노력 끝에 도출한 결과물이다. 총서 필진은 정조와 그의 말들(텍스트)을 18세기 후반의 조선이라는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발화된 특수한 조건의 산물'로 해석하고 그 의미를 발견하고자 했다.

목차

총론 ‘정조학 총서’를 펴내며|책을 펴내며

머리말 정조의 군사적 기획과 당대 사회

1부 정조의 대외 인식과 외교
1. ‘진하외교’와 대청 관계
2. 역지통신 교섭과 대일 관계
3. 대보단 제례와 ‘진하외교’의 공존
4. 지방군의 현황

2부 정조의 군제 개혁과 화성 방어 체제 정비
1. 친위 체제 구축과 장용영 설치
2. 수어청·총융청의 통합 시도와 군제 개혁
3. 병서 편찬과 오위제 복구의 이상
4. 화성 축조와 방어 체제 정비

3부 정조의 문·무 인식과 대책
1. 조선시대 문·무 위상의 불균형과 문제점
2. 정조의 문무겸전론과 병학 사상
3. 《이충무공전서》 발간과 이순신의 유장적 면모
4. 정조의 활쏘기와 상무 정책

맺음말 예와 통으로 문무일체의 이상을 추구한 국왕, 정조

참고문헌|찾아보기

저자소개

허태구 (지은이)    정보 더보기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 및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국민대학교, 경인교육대학교, 동덕여자대학교 등에 출강하였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선임연구원과 학예연구사를 거쳐 2020년 현재 가톨릭대학교 국사학과 부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로 중화주의(中華主義)와 연관된 조선 후기 정치사, 군사사, 외교사, 사상사 분야를 연구하고 있다. 주요 논저로 〈중봉 조헌의 중국과 중화〉, 〈병자호란 이전 조선의 군사력 강화 시도와 그 한계〉, 〈〈인조교서〉와 척화의 시대〉, 〈최명길의 주화론과 대명의리〉, 《병자호란과 예(禮), 그리고 중화(中華)》, 《조선의 국가의례, 오례》(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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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정조대 군사사 연구가 중요한 이유
한국 군사사에서 정조대와 고종대 사이의 극적 차이와 간극은, 조선 후기의 군사적 발전과 변화를 서구의 기준이 아니라 당대의 맥락에서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조선 후기 군사 분야의 여러 성취와 한계를 전체 사회 구조와의 관계 속에서 새롭게 독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성취의 정점이자 단절의 시초가 되는 정조대 군사사는 매우 중요한 연결고리이자 실마리가 된다.
―머리말 〈정조의 군사적 기획과 당대 사회〉중에서


대청 관계에 냉정한 태도로 임하다/b>
정조가 이처럼 대청 사대에 진력한 배경에는 중원의 패권을 장악한 청의 안정이 곧 조선의 안위와 연동된다는 무시할 수 없는 현실 또한 잠재해 있었다. 이미 영조대부터 청과 조선의 안보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군신의 발언이 자주 보인다. 뿐만 아니라, 강포하고 미개한 몽골이나 준가르부보다는 차라리 청이 낫다는 냉정한 판단도 하고 있었다. 정조와 그의 신료들 역시 영조와 생각이 다르지 않았다. 강성한 몽골이 잠재적 위험이라고 관성적으로 인식했지만, 그렇다고 단기간 내에 청이 몰락할 거라고 예상한 것은 아니었다. 여기에는 자신들이 목도한 건륭제의 개인적 능력에 대한 믿음도 깔려 있었다. 정약용(丁若鏞)은 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지리적 형세가 임진왜란과 같은 일본의 전면적 침략을 제어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였을 뿐, 청에 대한 특별한 경계심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1부 〈정조의 대외 인식과 외교〉중에서


대명의리를 실천해야만 했던 정조/b>
인조 이후 조선의 국왕들은 무엇보다도 1637년 조선을 대표하여 대명의리를 부정한 인조의 자손이었기 때문에, 대명 의리에 포함된 중화적 가치가 조선 내에서 동요되지 않는 한, 더욱 열과 성을 다하여 대명의리를 예(禮)와 사(史)의 차원에서 실천해야만 하는 위치에 있었다. 정조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하지 않았다면, 아마 그들은 광해군과 같이 배리(背理) 또는 배교(背敎)의 차원에서 축출당했거나 지지받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1부 〈정조의 대외 인식과 외교〉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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