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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을 움직인 시간 3

중국을 움직인 시간 3

(개혁 운동의 실패)

김상규 (지은이)
  |  
북랩
2021-07-21
  |  
17,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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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을 움직인 시간 3

책 정보

· 제목 : 중국을 움직인 시간 3 (개혁 운동의 실패)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중국사 > 중국사 일반
· ISBN : 9791165398880
· 쪽수 : 524쪽

책 소개

중국을 움직이게 만들었던 역사 속의 개혁 조치와 개혁가들은 누구인지, 이들은 왜 개혁을 추진했으며 이들의 개혁은 진정한 개혁이었는지, 이들이 부딪힌 어려움은 무엇이었는지, 잘못된 개혁과 개혁의 부재에 대한 대가는 무엇이었는지 등의 질문을 던지며 중국 역사를 편력하고자 한다.

목차

프롤로그
다시 찾아온 분열시기

46장 당의 멸망
황차오의 난 / 오대십국 시대의 개막

47장 오대십국
‘오대십국’이란? / 오대십국이 역사에 주는 의미 / 정책 중추의 이동: 추밀원과 삼사의 탄생

48장 동북아의 변화
거란 / 연운16주의 할양

49장 암흑기의 빛나는 변혁
수와 송, 개혁의 결실을 훔친 두 왕조 / 암흑기의 대방향 전환 / 흐름을 바꾸는 자는 누구인가? / 시영, 짧지만 강한 개혁 / 중앙군 개혁

5부 10~14세기: 송·원

문인정권의 흥망

50장 10~14세기

51장 송의 건립
번영의 송, 빈약의 송 / 아무 이유 없는 정변 / 배주석병권 / 적빈적약의 토양이 된 변혁들

52장 위기의 인식
번영 뒤에 잠재된 위기 / 재정 위기의 근원 / 두 번의 전쟁

53장 왕안석의 변법 Ⅰ: 똥고집 상공
왕안석, 그는 누구인가? / 왕안석 vs 사마광

54장 왕안석의 변법 Ⅱ: 경제를 이용한 제국 창조
개혁 운동의 시작 / 거침없는 변법의 전개 / 눈부신 변법의 성과 / 왕안석이 보지 못했던 것 / 사마광의 세 번의 편지 / 천체의 변화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 유민도 사건 / 법가 vs 유가

55장 왕안석의 변법 Ⅲ: 한 번 기울어진 운동장
왕안석, 그 후 / 신종의 실패한 복고주의 개혁: 원풍 관제 개혁 / 변법이 남긴 것 / 원우경화: 모든 것을 왕안석 이전으로! / 변법의 변질

56장 북송의 멸망
정강의 변, 책임은 누구한테 있나?

피지배 역사의 시작

57장 남송
남송은 어떻게 해서 세워진 것인가? 273 / 어설픈 대외 투쟁의 역사 / 중국의 운명을 가른 서기 1234년 / 남송의 멸망 / 이학과 간상 사미원의 전략적 동침

개혁사 외전 Ⅴ 신장을 알면 유라시아가 보인다
지형 / 카라한 왕국: 신장의 투르크화와 이슬람화를 이끌다 / 중앙아시아의 투르크화 / 아직 죽지 않은 거란 제국의 짧은 중흥 / 차가타이 칸국 / 차가타이의 해체: 투르크-몽골 혼혈 민족의 형성 / 투르판과 명의 대립 / 준갈 칸국의 성립과 청 제국의 신장 점령

6부 제3제국 시대

프롤레타리아 왕조의 성립

58장 명(明, 1368~1644)
중국인들에게 ‘명왕조’란? / 명(明)은 어떤 시대였나? / 원(元) 말 농민 봉기와 주원장, 그리고 명의 성립

59장 대학살
혁명 원로 / 회서 집단 / 재상권의 팽창 / 숙청 / 재상제 폐지 / 남옥 사건: 회서 집단의 종말

진보 없는 패권 제국

60장 영락
쿠데타? 제2의 건국? / 피의 군주 / 천도 / 북벌, 북벌, 북벌… / 베이징 / 명의 영토는?

61장 바다로부터의 도전과 바다를 향한 도전 사이: 해금 정책과 정화의 대항해
해금 정책이란? / 정화의 항해, 그 시작과 결말 / 정화 이후의 해양 정책

62장 기이한 정치 체제
내각 / 환관 / 특무 정치

전제주의 왕조의 취약성

63장 중흥의 시도 Ⅰ
명의 역사 3단계 / 중흥기 / 또 한 명의 개혁가 / 천재, 두 번 낙방하다 / 정치적 단련

64장 중흥의 시도 Ⅱ
장거정, 대권을 장악하다 / 위기의 본질 / 거침없는 혁신의 발걸음

65장 중흥의 시도 Ⅲ
최고의 교육, 최악의 교육 / 균열과 동요 / 황제의 비뚤어진 복수 / 장거정, 그 후

참고문헌

저자소개

김상규 (지은이)    정보 더보기
1972년생. 연세대학교 졸업, 대외경제무역대학교 석사 졸업. 현재 베이징 거주. 1996년부터 중국을 오가기 시작했고 14년 동안 중국에 거주하면서 중국의 변화를 몸소 체험하였다. 대우 인터내셔널에서 상사맨으로서 중국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LG전자, 도시바삼성의 해외 영업부서에서 중국 관련 업무를 하다가 베이징 올림픽이 한창이던 2008년에 주재원으로 중국에 왔다. 2013년 그간의 대기업 생활을 마치고 회사를 나와 현지에서 창업을 하였다. 그 후, 번역가로 제2의 직업을 모색하기 위해 2018년에 통번역 석사 과정을 밟은 것이 인생에서 중대 전환의 계기가 되었다. 린위탕(임어당)의 대하소설 『경화연운』을 번역하면서 작품 속에 등장하는 역사적 사건과 배경에 빠져들었고 이를 연구하고 찾아다니면서 중국 역사에 새롭게 눈을 뜨게 되었다. 20여 년 동안의 여러 실전 경험을 바탕으로 학문적 시각이 아닌 현대 중국을 치열하게 산 한 사람의 시각으로 중국 역사의 현시대적 의미를 이야기하고자 역사 작가의 길을 걷고 있다. 현재는 집필 활동 외에도 커뮤니티에 글을 연재하거나, 강연, 소모임 등 교민 사회의 역사·문화 활동에 일익을 담당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저서로는 중국 개혁 통사 시리즈인 『중국을 움직인 시간 I, II, III』가 있다. 이메일 zhenbang0512@163.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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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875년에 왕선지라는 자가 오늘날 허난성에서 봉기하였고 황차오가 뒤이어 고향인 산동성에서 봉기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 그들 두 세력은 서로 합병하였다. 왕선지라는 자는 누구인가? 재미있는 건 왕선지 역시 소금 밀매업자라는 것이다. 당을 멸망의 길로 이끈 최대 농민봉기를 일으킨 두 명의 창업주들이 모두 소금 밀매업자다? 뭔가 이상하다. 그래서 혹자는 소금 밀매업이 당정부로부터 발각되었고 대대적인 압수와 자산 몰수 사건이 이들로 하여금 봉기군의 수장이 되도록 하였을 것이라 하는데 매우 그럴듯한 추측이다.
황차오가 ‘백성을 구제한다’라는 구호를 내걸긴 했지만 한 가지 사례는 그의 본심이 정말로 세상을 바꾸려는 큰 뜻에 있었는지를 의심하게 만든다. 그는 875년 봉기에서부터 880년 장안에 입성할 때까지 5년 동안 총 다섯 차례에 걸쳐서 당정부와 자신의 관직에 대한 소위 ‘연봉협상’을 했다. 관직을 주면 자신이 반란을 풀겠다는 것이었다. 황차오의 농민군이 광저우를 점령하고 근거지가 생기자 그는 또다시 정부와 협상을 했다. 처음에 그가 제안한 것은 태평군절도사 직이었는데 태평군절도사는 오늘날 산동 일대를 관할하였다. 자신의 고향에서 관리가 되겠다는 의도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당정부가 이를 거부하였다. 그래서 그는 이번에는 기대치를 낮추어 ‘그럼 광저우에서 살겠다’는 심사로 광주절도사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당정부는 이마저도 거부하였고 그에게 온 건 솔부라는 하급 관리직 임명장이었다. 황차오는 뚜껑이 열렸고 “내 장안으로 진격하겠노라!”고 결심하였다.
- 4부 다시 찾아온 분열시기


그럼 병권을 가진 자의 힘을 빼는 작업은 어떻게 진행이 되었을까? 안사의 난 이후로 중국은 200여 년간 ‘병권’으로부터 기인한 재난에 시달렸기에 조광윤 개혁의 핵심은 사실 ‘병권’에 대한 조정이었다. 조광윤은 ‘황제의 대권에 도전할 수 없는 군대’를 만들기 위해 군사제도에 거대한 변화를 가했다.
그는 금군을 전전사와 시위사로 구성하였다. 전과 비슷하지만 약간의 개명을 하였다. 시위사는 보군과 마군으로 나뉘어졌다. 전전사의 사령관은 전전도지회사였고 시위사에는 시위보군도지회사(보병사령관)와 시위마군도지회사(기병사령관)가 있었다. 이로써 소위 양사삼수라고 불리는 ‘세 명의 금군 사령관’과 추밀원의 체제가 형성되었다. 이것이 전과 다른 점은 전전군에서 ‘점검’이라는 원수 직급을 폐지하였고 시위군에서는 ‘기보병총사령관’을 폐지하고 기병과 보병으로 나눴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세 사령관들은 각각 황제에게 직접 예속되었으므로 황제가 직접 금군을 지휘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조직도 작업은 그림을 그리는 데에서 끝나지 않는다. 조직도 작업의 핵심은 사실 소위 ‘R&R(Roll & Responsibility)’이라고도 부르는 업무분장에 있다. 조직도는 하드웨어에 불과할 뿐 실제 이 사람이 무얼 하는 사람이며 권한과 책임은 어디까지인지를 규정하는 운영체계가 진짜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필자가 기업체 주재원을 할 때 한번은 다수의 중국법인이 통합되는 시기가 있었는데 총괄법인장의 지휘하에 새로 구성된 부서와 부서장에 대한 R&R을 수립하는 데에만 수십 명의 주재원들이 근 1년을 매달렸다. 그만큼 조직에 있어서 실질적이고 명확한 R&R이 중요하다는 말을 하고자 함이다. 조광윤의 새로운 군조직에서 R&R의 핵심은 ‘인사권과 지휘권의 분리’에 있었다. 이는 추밀원과 금군 사령관 간의 권한의 분리를 말한다. 세 명의 금군 사령관은 ‘지휘권’만 있을 뿐 ‘인사·행정·재정권’은 추밀원의 장관인 추밀사에게 있었다. 이렇게만 말하면 감이 잘 안 오니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추밀원은 병적, 무관의 선발, 승진, 징계, 급여, 자대배치 등을 관리하고 결정하였다. 사령관은 단지 전투를 지휘할 뿐이었다. 이렇게 하는 주된 취지는 오대십국 시기 성행했던 ‘군내 파벌’이 형성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군내 파벌은 반란의 근원이었고 파벌이란 선발과 승진, 인사이동과 같은 방식으로 서로 끌어주고 밀어주면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아무리 사령관이라고 해도 인사와 재정권이 없으면 장교와 병사들이 그를 자신의 지휘관이라 생각하겠는가? 그들은 눈은 전부 추밀원을 향하게 되어있었다.
- 5부 문인 정권의 흥망


성공한 사람의 인생 여정을 보면 그의 성공에 있어서 결정적인 발판이 되어준 한두 명의 인물이 있다. 사실 이는 꼭 성공한 위인들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있어서 마찬가지이다. 누구에게나 인생에 있어서 전환점이 되는 시기가 있는데 이들은 그 관건의 시기에 무엇보다도 사람에 베팅을 하였다. 그 사람은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일 수도 있고 어린 사람일 수도 있다. 주원장에게 있어서 곽자흥과의 만남은 인생의 터닝 포인트이자 성공의 발판이었다. 창업 자본이 하나도 없는 무일푼에서 출발한 그는 곽자흥이라는 거인이 일군 거대 세력(장강 유역의 홍건군)을 그대로 물려받았고 이를 바탕으로 그는 여러 지역의 봉기 세력을 제압하고 병합한 끝에 천하를 거머쥘 수 있었다. 물론 곽자홍이 그를 중용한 건 주원장이란 사람을 크게 봤기 때문이다. 곽자흥에게는 친한 친구가 죽기 전에 의탁시킨 의붓딸이 있었는데 그는 그녀를 주원장에게 시집보낼 정도로 그를 신뢰하였다. 주원장이란 이름을 준 것도 그였다. 곽자홍은 농민 출신은 아니었다. 그의 집안은 정의감과 의협심이 있는 돈이 많은 사람들이었다. 원 말에 세상이 어지럽자 그는 가산을 모두 팔아서 사람들을 모아 창업의 길로 나섰고 홍건군 중 가장 큰 세력으로 성장했다.
1356년(곽자흥이 죽은 이듬해) 주원장은 지금의 난징인 금릉을 원정부군으로부터 빼앗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그는 금릉을 ‘하늘의 부름에 응한 곳’이라는 뜻의 ‘응천부’로 개명하여 자신의 근거지로 삼았다. 주원장은 응천부(난징)를 근거지로 여러 봉기군을 흡수하면서 몸집을 키웠고 약 10년에 걸쳐서 장강 이남 지역을 전부 접수하였다. 그리고 1368년 정월, 마흔한 살의 주원장은 오늘날의 난징에서 명 제국을 선포하였고 스스로 황제로 등극하였다. 같은 해에 총사령관이자 주원장의 죽마고우인 서달이 이끄는 명의 군대는 북진하여 원의 수도인 대도(베이징)를 점령하였다. 원의 마지막 황제와 몽고인들은 장성을 넘어 원래 그들이 왔던 곳인 몽골 초원으로 모두 물러났다. 주원장은 대도를 ‘북쪽(北)을 평정(平)하였다’고 하여 북평(北平)으로 개명하였다. 이로써 936년 거란에게 할양된 이래로 계속 이민족 정권의 손에 들어있던 연운16주가 432년 만에 드디어 한족들의 영토로 다시 들어왔다. 그러나 원이 베이징을 잃었다고 갑자기 공중분해된 건 아니었다. 이들은 장성 이북 지역에서 다시 정부를 세워 한동안 명을 위협했고 역사는 이들을 북원이라 부른다. 그래서 명은 북원과 거의 매년 전쟁을 해야 했고 게다가 아직 투항하지 않은 중국내 다른 봉기 세력과 과거 대리국이었던 윈난을 평정해야 하는 과제가 남아있었다. 그리고 해양에서 온 왜구도 신경 써야 했다. 명 제국은 건국 후 약 20년 동안은 준전시 상황이 지속되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 6부 프롤레타리아 왕조의 성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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