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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인문학 > 신화/종교학 > 종교학 > 종교학 일반
· ISBN : 9791166843327
· 쪽수 : 504쪽
· 출판일 : 2024-11-15
책 소개
목차
◎ 참고도서 약어표_24
◎ 일러두기_40
2책 I. 조경(肇慶) = 소흥 수도원(1583년 9월 10일부터 1589년 8월 초순까지)
제1장 우리가 어떻게 중국에 처음 들어가게 되었는지에 대해(1552년부터 1582년까지) 45
제2장 1년이 채 안 되어 3명의 신부가 중국으로 들어갔으나 체류 허가를 받을 수 없었던 것에 대해(1582년 3월 9일부터 1583년 8월 10일경까지) 90
제3장 신부들을 어떻게 조경으로 불렀는지에 대해, 수도원을 지을 작은 땅을 얻고 중국에 체류할 수 있는 허가를 얻다(1583년 8월 15일 즈음에서 1583년 9월 말까지) 120
제4장 신부들이 서서히 중국인들에게 성교회에 관해 말하기 시작하다(1583년 10월부터 대략 1584년 11월 25-29일까지) 148
제5장 미켈레 루지에리 신부가 마카오에 가고, 마태오 리치가 조경에 오다. 청동으로 된 시계와 중국어로 표기한 지구본을 통감에게 주다(1583년 12월부터 1584년 10월까지) 166
제6장 신부들이 어떻게 스페인 왕의 대사 자격을 획득하여 중국에 왔는지, 그리고 프란체스코 카브랄 신부가 어떻게 조경에 왔는지에 대해(1584년 5월 2일부터 1584년 11월 26일경까지) 187
제7장 이 사업을 위해 두 명의 신부가 어떻게 인도에서 왔는지에 대해: 한 사람은 두아르테 데 산데 신부로 선교회의 원장으로 있다가 조경 체류 허가를 받았고, 다른 한 사람은 안토니오 달메이다 신부로 미켈레 루지에리 신부와 함께 절강성으로 가다(1585년 4월 1일부터 1586년 4월까지) 201
제8장 신부들이 절강성으로 돌아오고 루지에리 신부가 광서에서 나가다: 그 밖에 이 시기에 일어난 사건들에 대해(1586년 7월부터 1587년 7월까지) 217
제9장 신부들이 조경에서 나쁜 일에 연루될까 두려워 두아르테 데 산데 신부를 마카오로 돌아가게 한 영서도; 이 일이 있고 난 뒤 신부들이 겪은 큰 어려움에 대해(1587년 7월 27일부터 1587년 12월까지) 230
제10장 미켈레 루지에리 신부가 어떻게 마카오에 가서 그곳에 남게 되었는지에 대해; 두아르테 데 산데 신부가 조경에 온 경위, 백성을 위해 그 집에서 겪은 또 다른 어려움(1588년 1월부터 1588년 7월까지) 242
제11장 알렉산드로 신부가 미켈레 루지에리 신부를 로마로 보내 교황이 신부들을 중국 황제에게 보내는 대사로 임명해 달라고 청하고, 안토니오 알메이다 신부는 조경으로 가는 길에 새로운 여러 난관에 부딪히다(1588년 8월부터 12월까지) 249
제12장 조경 수도원에서 우리가 거둔 성과에 대해(1583년 9월 10일부터 1589년 8월 초순까지) 266
제13장 조경 수도원에서 우리가 겪은 마지막 난관과 도당 유절재(劉節齋)에 의해 쫓겨난 이유에 대해(1589년 4월부터 8월 초까지)276
3책 • 제1부(제1장~제9장) II. 소주(韶州) 수도원(1589년 8월 26일부터 1595년 4월 18일까지)
제1장 소주 수도원을 어떻게 지었는지에 대해, 중국선교에 대해 새로운 계획을 세우게 된 것에 대해(1589년 8월 초부터 10월 초까지) 297
제2장 새로 부른 신부들이 마카오에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 그들이 모두 기뻐하게 된 일에 대해, 중국에 있는 신부들의 도움으로 순찰사 알렉산드로 발리냐노 신부가 두 명의 중국인 청년들에게 예수회 입회를 허락하고 중국선교에 투입하게 된 일에 대해(1589년 9월부터 1590년 6월 20일쯤까지) 319
제3장 구태소가 어떻게 소주에 거주하게 되었고 마태오 신부의 제자가 되었는지에 대해, 이후 구태소 덕분에 소주에 자리를 잡게 된 경위에 대해(1590년 말부터 1591년 9월까지) 334
제4장 우리가 소주에서 겪은 어려움과 두아르테 데 산데 신부가 소주에 가고, 마카오로 돌아가는 길에 생긴 일에 대해(1590년 말부터 1591년 9월까지) 349
제5장 안토니오 데 알메이다 신부의 사망과 그가 있던 소주로 프란체스코 데 페트리스 신부가 투입된 것에 대해(1591년 10월 11일부터 1591년 12월 말까지) 359
제6장 마태오 리치가 남웅(南雄)으로 어떻게 갔는지에 대해, 그 지역 일부 그리스도인들이 한 일(1591년 말부터 1592년 중반 즈음까지) 369
제7장 밤에 강도들이 수도원을 침입하여 두 신부에게 상해를 입히고 재판에 넘겨졌으나 신부들에 의해 풀려나다(1592년 7월부터 1594년 6월까지) 379
제8장 프란체스코 데 페트리스 신부의 사망과 소주에서 그의 자리를 대신할 라자로 카타네오 신부가 입국하게 된 경위에 대해(1593년 11월 5일부터 1594년 11월까지) 396
제9장 마태오 리치가 처음으로 남경 황궁에 가게 되고, 그 과정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1594년 11월 ?부터 1595년 5월 31일까지) 409
• 제2부(제10장~제14장) III. 남창(南昌) 수도원(1595년 6월 28일부터 1598년 6월 25일까지)
제10장 마태오 리치 신부가 어떻게 남경에서 쫓겨났는지에 대해, 그리고 어떻게 강서의 중심도시로 가게 되었는지에 대해(1595년 6월 1일부터 29일까지) 436
제11장 남창 지역 통감이 거주하는 강서의 도읍에 어떻게 거주지를 마련하게 되었는지에 대해(1595년 7월부터 9월까지) 450
제12장 황가(皇家)의 두 친족과 리치가 어떻게 친구가 되었는지에 대해, 남경에서 그들에게 한 설교(1595년 8월 20일경부터 10월까지) 464
제13장 교섭이 성공한 사실을 어떻게 알렸는지에 대해, 두아르테 데 산데 신부가 조반니 소에이로 신부를 남창으로 보내고 거기서 우리가 집을 어떻게 매입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1595년 12월부터 1596년 7월까지) 478
제14장 소주에서 라자로 카타네오 신부가 겪은 큰 봉변과 니콜로 론고바르도 신부와 요안 데 로챠 신부의 입국(1596년 9월 ?부터 1597년 12월 말까지) 492
책속에서
중국에서는 한 번도 보지 못한 엄청난 새로운 소식에 사람들이 앞다투어 몰려왔다. 외국인 신부들을 보기 위해 오는 사람들로 그곳은 붐볐고, 관리들조차 들어올 수가 없었다. 신부들이 지부에게 선물로 주려고 가져온, 베네치아 유리로 만든 프리즘과 로마에서 그린 성모 마리아 성화에 모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관리들도 이런 물건을 보게 된 것에 신기해했고, 그런 만큼 백성들 사이에서 이 놀라운 물건들을 보려는 열망도 커갔다. 지부는 물건들을 자기네 식구들에게 보여 주기 위해 관저로 가져가도 되는지 신부들에게 물었다. 신부들은 그것들을 선물로 주며 다른 것들도 함께 보냈다.
중국어에는 하느님의 이름에 상응하는 이름도, 디오(Dio-, ‘하느님’이라는 뜻)를 제대로 발음하기 위해 알파벳 디(d)에 해당하는 글자가 없어 하느님을 ‘천주天主’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하늘의 주인’이라는 뜻으로 지금까지 온 중국과 그리스도교 교리서[『天主敎要』]와 이후에 제작되는 책자에서 모두 이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우리의 제안은 아주 잘 받아들여졌고, 중국인들은 ‘천天’이라는 장엄한 이름을 숭배했다. 아직 일각에서는 우리가 ‘하느님’이라는 이름을 부여한 ‘하늘(天)’을 물리적인 것으로 생각하겠지만, 대부분 사람은 자기네가 숭고한 이름으로 생각하는 것을 우리의 하느님으로 인정했다. 결국 하느님은 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성모 마리아에게도 별도의 이름이 부여되었는데, ‘천주성모낭낭(天主聖母娘娘)’이 그것이다.
발리냐노 신부는 우리가 중국에서 겪은 것이 글로 다 쓸 수 없을 만큼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해 온 것에 대한 정보를 듣고, 과거와 마찬가지로, 조경(肇慶)에 있는 힘없는 신부들에게 힘을 실어 줄 방법을 모색하였다. 더욱이 우리의 거룩한 신앙을 선포하기 위해 중국에 왔기 때문에 신앙을 선포해야 하는데, 현재로서는 중국 황제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아 신부들이 안정적으로 체류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는 마카오에 오자마자 하나의 해결책으로서, 교황에게 요청하여 적합한 신부를 뽑아 그에게 권위를 부여하여 중국 황제에게 파견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이미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신부들 외에, 좋은 선물을 가지고 중국에 들어갈 교황의 사절단을 로마에서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이 일을 위해 마태오 신부는 조경의 한 권위 있는 학자에게 부탁하여 교황이 중국 황제와 광동(廣東)의 총독에게 보내는 편지를 각각 한 장씩 써 달라고 했고, 신부들에게 줄 허가서도 중국인들이 읽기 좋게 그들의 양식에 맞추어 작성하여 그것을 로마로 보내 찬사와 미사여구를 덧붙여 되돌아오도록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