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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중국사 > 중국근세사(원~ 아편전쟁)
· ISBN : 9791166844799
· 쪽수 : 476쪽
· 출판일 : 2026-07-10
책 소개
목차
제21장 ‘병단(兵團)’의 해산: 왕훙원에 의해 통합된 상하이 노동자조반파
신속하게 발전한 2병단
1병단, 공3사(工三司)와 야전 군단
성공하지 못한 왕훙원의 통합 시도
「제5호 통령(通令)」 발표와 그 파장
각개 격파당한 병단
내부 반대파의 제거
심사받은 판궈핑
쌍조사(雙造司)와 신공총사(新工總司)
왕훙원에 의한 공총사 통일
소결
제22장 연사(聯司) 분쇄: 문혁 신질서의 확립
1967년 상하이의 무장 투쟁
상하이중유기계공장의 양대 계파 대중조직
조반파 명분 획득을 위한 연사와 동방홍의 투쟁
상하이중유공장의 첫 번째 대규모 무장 충돌
동방홍에 대한 시 혁명위원회의 지지
지련처(지련참, 支聯站): 일반 사회 대중에 호소한 연사
“상하이는 반드시 제2차 대란을 겪어야 한다”
제푸시(解福喜) 사건
‘G호(號) 행동’
시 혁명위원회의 태도
사태의 지속적인 확산
시혁위회의 「공개 편지」
우연한 사건으로 촉발된 필연적인 무장투쟁
8·4 연사 분쇄 무투
무투의 엄중한 후유증
마오에 의해 찬양받은 연사 분쇄 행동
소결
제23장 4·12 포격: 군대로부터의 경고
장춘차오의 대회 미출석으로 인해 야기된 추측
제2군의대 ‘홍기’에 의한 사건의 시작
베이징으로부터 전달된 소식
『문회보』사의 포격(?打) 전투대 성립
4·12 포격
공총사에 의해 보호받은 장춘차오
장칭에 의해 구원을 받은 장춘차오
가을 수확 뒤의 총결산
소결
제24장 대연합(大聯合)에서 상산하향(上山下鄕)으로: 홍위병 운동의 종결
중앙으로부터 학교 복귀 및 군사훈련을 요구받은 학생들
상하이에서 철수한 외지 홍위병
마오로부터 칭찬을 받은 시 제6여중 대연합
시 중학 홍대회의 성립
중관회(中串會): 상하이 홍위병 운동의 이단
3차례 접관당한 『홍위전보』
3파 홍위병의 세 가지 연극
대학 홍위병 조직의 대연합
대학 홍대회의 성립
상산하향 운동과 홍위병 운동의 종결
소결
제25장 공총사(工總司)에서 총공회(總工會)로: 노동자조반파 조직의 체제화
1967년 초 상하이 노동자조반파 조직의 상황
구이양(貴陽) 경험과 본직 복귀 연합(귀구연합, 歸口聯合)
‘도기연합(倒旗聯合)’의 혼란
구·현·국 연락처의 정리
“관계 정리(탈구, 脫鉤)”와 “본직 귀속(귀구, 歸口)”
공총사의 성립 반주년 기념대회
마오쩌둥의 제안: 노동조합을 통한 조반대 개조
상하이 노동자 혁명 조반파 대표대회
공총사 총부 기구 조직 변화
‘두 개의 간판을 단 하나의 그룹’
『공인조반보』의 정간
공대회로 개명된 공총사
상하이총공회로 개명한 공대회
소결
제26장 간부학교에서 고온과의 전투 현장으로: 관료의 ‘혁명화’
‘공사’에서 시 혁명위원회로
3군 좌담회 사건
상하이 ‘해방 간부’의 모델
시 혁명위원회 인원 구성
소반자(小班子)와 대반자(大班子)
5·7 간부학교(간교, 幹校), 고온과의 전투(전고온, 戰高溫) 그리고 4개의 지향(4개면향, 四個面向)
천피셴·차오디추 특별 안건
‘3결합’을 통해 등장한 새로운 간부들
군 혁명위원회와 군대의 관계
소결
책속에서
1966년 말 캉핑루 사건 이후, 문혁에 반대하는 세력 중 조직적인 형태를 제대로 갖춘 집단은 더 이상 상하이에 존재하지 않았다. 이제 상하이 조반 조직에 대항하는 것은 보수파 세력이 아니라, 조반파 내부의 반대 세력이었다. 이것이 상하이 문혁의 또 하나의 특징이었다.
전국적으로 무투가 확산되고, 심지어 실제 총포를 이용한 전투까지 발생했으나, “연사 분쇄” 투쟁은 상하이 문혁에서 벌어진 마지막 대규모 충돌이었다. 상하이 주류 조반파는 지련처가 아직 시 전체 규모의 통일 조직을 형성하지 않았을 때, 그들의 주요 지도자들을 체포한 뒤 상하이중유 연사를 분쇄했다. … 이는 상하이 문혁의 안정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이러한 상하이의 안정된 국면은 전국 문혁의 모범으로 간주되었다.
문혁 시기, 간부를 숙청하는 데 있어 가장 강력한 죄명은 ‘반역자’라는 낙인을 찍는 것이었다. 장춘차오가 상하이시위의 지도자인 천피셴(陳丕顯)과 차오디추(曹荻秋)를 숙청하려는 음모를 꾸밀 때, 그들에게 씌운 죄명 또한 ‘반역자’였다. 두 차례의 민간 포격에서, 포격을 주도한 이들은 먼저 장춘차오의 ‘역사 문제’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고, 이후 그에게 ‘반역자’라는 죄명을 뒤집어씌웠다. 이들은 이를 통해, 장춘차오의 혁명 좌파로서의 정당성을 박탈하고, 그를 중앙 정책 결정층의 핵심에서 축출하려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