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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글자도서]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img_thumb2/9791172130299.jpg)
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91172130299
· 쪽수 : 304쪽
· 출판일 : 2024-03-15
책 소개
목차
나는 여우에게서 쓸쓸함을 배웠다
어른들 호주머니에는 사탕이 하나씩 들었다
닭똥집이 야채와 김치를 만났을 때
딸기우유와 크림빵 사이
세상은 지금 해체 중이다
차 안에 여우가 타고 있어요
작가의 말
저자소개
책속에서
옥상에서 내려다본 세상은 하나의 커다란 분화구 같았다. 지저분한 골목과 허름한 집들이 분화구 표면 여기저기에 널렸다. 지금도 분화구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언제 분화구가 불을 뿜어댈지 모른다. 그러나 이를 걱정하는 사람은 어느 누구도 없었다. 사람들은 애초에 죽고 사는 문제에 그다지 관심이 있어 보이지 않았다. 분화구가 불을 뿜어대면 죽는 거고 그렇지 않으면 사는 거였다. 적어도 내가 옥상에서 내려다보는 이 동네 사람들은 그랬다. 아무 생각 없이 분화구에 널려 있는 구멍 뚫린 돌처럼 이곳에 존재할 뿐이었다. 거대한 폭발이 있을 그날까지. 그날이 은근히 기다려졌다. 이 세상을 지배하는 질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여우는 물탱크에서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교회 쪽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붉게 빛나는 십자가를 향해 고개를 한껏 치켜든 자세였다. 은빛 털이 바람 따라 간간이 나부꼈다. 여우는 그렇게 한참을 서 있었다. (…) 멀리서 푸른 여명이 번져왔다. 여우가 치켜든 고개를 아래로 떨어뜨렸다. 주위를 한번 둘러보더니 슬슬 움직이기 시작했다. 옥상 난간 쪽으로 느리게 걸어갔다. 철제 난간은 아슬아슬하게 눈을 이고 있었다. 여우는 단숨에 난간 위로 뛰어올랐다. 곡예를 하듯 교회 첨탑으로 건너뛰었다. 순간 십자가 불빛에 여우가 붉게 물들었다. 십자가 꼭대기까지 올라간 여우는 다시 옆 건물로 가볍게 건너뛰었다. 공중에 떠 있는 십자가들을 사뿐사뿐 딛고 여우는 점점 멀어졌다.
그때 동물원에서 여우에게 쓸쓸함을 배운 이후 나는 여우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때까지 나에게 쓸쓸함을 가르쳐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엄마도 아버지도 가르쳐주지 않은 그것을 여우가 가르쳐주었다. 내가 여우를 사랑하게 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나는 점차 여우와 닮아갔다. 여우처럼 자주 쓸쓸해졌다. 밥을 먹다가도, 얼굴에 비누칠을 하다가도, 똥을 누다가도 문득문득 쓸쓸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