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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일본소설 > 1950년대 이후 일본소설
· ISBN : 9791173321160
· 쪽수 : 388쪽
· 출판일 : 2025-03-21
책 소개
리뷰
책속에서
대학 3학년 봄까지 이 년간, 실익 있는 일은 하나도 하지 않았노라고 단언해두련다. 이성과의 건전한 교제, 학업 정진, 육체 단련 등 사회에 유익한 인재가 되기 위한 포석을 쏙쏙 빼버리고 이성으로부터의 고립, 학업 방기, 육체의 쇠약화 등 깔지 않아도 되는 포석만 족족 골라 깔아댄 것은 어인 까닭인가.
책임자를 추궁할 필요가 있다. 책임자는 어디 있나.
오즈와 나의 만남에서 이 년을 훌쩍 건너뛴다.
3학년이 된 5월 말이었다.
나는 사랑하는 다다미 넉 장 반에 앉아 가증스러운 오즈와 마주 노려보고 있었다.
내가 기고하는 곳은 시모가모 이즈미가와초에 있는 시모가모 유스이 장이라는 하숙이었다. 일설에 따르면 막부 말기의 혼란기에 불에 탔다 재건된 이래로 바뀐 데가 없다고 한다. (…)
그날 밤, 오즈가 하숙에 놀러왔다.
둘이 음울하게 술을 마셨다. “먹을 것 좀 주세요”라고 하기에 핫플레이트에 어육 완자를 구워주자, 딱 한 입 먹고 ‘제대로 된 고기가 먹고 싶다’ ‘파 소금장을 얹은 소 혀가 먹고 싶다’ 하고 사치스러운 소리를 했다. 울화통이 터져 지글지글 구워진 뜨거운 완자를 입에 쑤셔 넣어주자 조용히 눈물을 흘리기에 용서해주었다.
스승님이 그렇게 날카로운 표정을 지으면 어쩐지 고귀함이 느껴진다. 시모가모 유스이 장처럼 무너지기 일보직전인 다다미 넉 장 반에는 전혀 걸맞지 않고, 어느 유서 깊은 가문의 젊은 도련님이 세토 내해를 항해하던 중에 난파당해 이 누추한 다다미 넉 장 반이라는 고도에 표류한 것처럼만 보였다. 그렇건만 스승님은 낡아 후줄근해진 유카타를 버리지 않고, 육수로 삶은 듯한 다다미를 깐 넉 장 반에 눌러앉아 있었다.
“가능성이라는 말을 무한정으로 쓰면 아니 되는 법. 우리라는 존재를 규정하는 것은 우리가 지닌 가능성이 아니라 우리가 지닌 불가능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