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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세계의 소설 > 동유럽소설
· ISBN : 9791173322327
· 쪽수 : 404쪽
· 출판일 : 2025-05-26
책 소개
목차
제1부
제2부
제3부
옮긴이의 말: 불타는 시대의 유토피아
리뷰
책속에서
400쌍의 불안한 눈이 마치 땅에 코를 대고 냄새 맡는 개처럼 흘낏흘낏 작업반장의 무거운 발길을 한 걸음 한 걸음 뒤따랐고 작업반장은 마치 일부러 그러는 듯 느린 걸음으로 기계 사이를 돌아다니며 자신의 얼굴을 훑는 시선을 애써 피했다. 400명의 사람들이 기계 위에 몸을 숙이고 어떻게든 더욱 작고 더욱 회색빛으로 눈에 띄지 않게 되려는 듯 손가락을 바쁘게 움직이며 급하게 돌려서 뜨거워진 기계를 1초 1초 더욱 재촉했고 소리 없는 외침에 목이 쉬어 뒤엉키는 손가락은 이렇게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내가 제일 빨라요! 그러니까 날 자르지 마세요! 난 안 돼요!”
낯선 지역을 헤매고 다니다가 갑자기 아는 길로 접어들고, 의식적으로 생각해낼 수는 없었지만 다리가 자동으로 움직여 마치 졸린 말이 잠들어버린 마부를 한번 가봤던 길로 싣고 가듯 본능적으로 우리를 앞으로 데려가준 적은 아마 한두 번이 아닐 것이다. 누가 알겠는가, 어쩌면 우리는 냄새로 자기 흔적을 찾아가는 개처럼 한때 우리가 직접 디뎠던 자기 자신의 걸음을 우연히 그대로 되짚어 편안하게 발을 디디며 나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도시는 우리가 매일같이 돌아다니며 보았던 조각난 여러 장면을 시각을 통해 기억의 원화에 새기기 때문에, 우리가 도시에 흩뿌린 발자국들의 보이지 않는 실로 그 장면들을 모아서 이은 뒤에야 비로소 우리 머릿속에서 도시라는 일관된 개념으로 자라나 우리만의 고유한 파리의 복잡하고 알기 힘든 지도가 되며 그것은 우리와 똑같은 길을 돌아다니는 다른 사람들의 파리와는 다른 것이다.
저녁마다 두 사람은 노동의 피로도 잊은 채 오랫동안 이야기했다. 모임에서 헤어져 자기 방에 돌아오면 침상에 누워 판은 부드럽고 단순한 말과 호기심에 크게 뜬 눈을 떠올리며 마음속으로 되풀이했다. ‘내 소중한 사람!’ 그리고 그런 자신의 모습을 깨달았다. 이건 대체 뭐지? 사랑하나? 그게 대체 무슨 웃기는 소리야! 도대체 사랑이 뭔데? 육체관계와 자식들? 아니, 그건 절대 아니다. 뭔가 다른 것이다. 그냥 친한, 좋은 동료다. 하지만 좋은 느낌 정도-아니, 그것도 아니다! 그리고 판은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쓰다가 금방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