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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91185430041
· 쪽수 : 476쪽
책 소개
목차
01 제망매祭亡妹
02 누이 생각
03 엘리아의 제야
04 플루트의 골짜기
05 이모
06 사십세
07 피터 버갓 씨의 한국 일기
08 찬讚 기 파랑
09 서유기西遊記
10 고요한 밤 거룩한 밤
11 아빠와 크레파스
12 우리 고장에선 그렇게 말하지 않아!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01 제망매祭亡妹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까? 그래, 국민학교 2학년 때였어. … 그날 집에 돌아와서는 엄마 경대 속의 내 모습을 빤히 쳐다봤어. 저 머리통 속에 있는 뇌가 손이랑 발이랑 눈까풀 같은 것에 명령을 내린단 말이지 하고 생각하다보니까, 갑자기 지금 저 뇌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내 뇌에 대해서, 그 뇌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내 뇌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내 뇌에 대해서, 그 뇌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내 뇌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내 뇌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내 뇌에 대해서—그 아이는 자기 말투가 우스웠는지 피식 웃었다—, 이어서 바로 그 뇌에 대해서, 이어서 또 바로 그 뇌에 대해서, 계속 생각이 뻗어나가는 거야. 오빠도 그런 경험이 있느냐고.”_22쪽
나는 그 말을 하며 무슨 위인전의 주인공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혜원이를 추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조금 뒤, 역시 위인전의 주인공은 아니지만, 혜원이와는 좀 다른 방식으로 장엄한 삶을 살아낸 인물의 묘비명 앞에 설 수 있었다. … 그러나 이 사람은 파리코뮌이 무너지고도 40년 가까이 더 살았다. 그것은 그의 장엄함을 위해서는 좀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나이 든 죽음에는 비극성이 없다. 그런데 비극성은 장엄함의 한 부분이다 _57~58쪽
03 엘리아의 제야
재채기가 나왔다. 재채기와 함께 거실 벽의 산타클로스가 노래를 시작했다. 징글벨스, 징글벨스, 징글올더웨이. 저 산타클로스 인형은 얼마 전 딸내미가 사다 벽에 걸어놓은 것이다. 건드리거나 큰 소리를 내면 징글벨을 부르기 시작한다. 한 절을 다 부르고 나서야 멈춘다. 크게 웃을 때나 크게 울 때나 큰 물건을 바닥에 떨어뜨렸을 때나 산타클로스는 징글벨스를 부른다. 징글벨스, 징글벨스, 징글올더웨이. 내가 그 노래를 처음 들은 게 언제더라? 어린 시절의 크리스마스는 괜찮았던 것 같다. 그 시절을 돌이켜볼 때면 지금도 더러 가슴이 뛰고 요의가 느껴진다._90쪽
“네, 친구 몇한테 전활 해봤는데, 다 오늘은 다른 약속이 있다는 거예요. 그리구 저두 혼자가 편해요.”
혼자가 편하다는 딸내미의 말에 가슴이 미어져왔다. 이 아이는 아마 혼자가 편하도록 스스로를 학습시켜왔을 것이다. 누이가 재스민차를 끓여 내왔다. 식도가 뜨뜻해지면서 마지막 술기운이 빠져나가는 것 같다. 딸내미는 혼기가 차오지만, 결혼할 수 없을 것이다. 혼기가 너무 많이 지나버린 누이 역시 아마 앞으로도 결혼하지 않을 것이다. 《엘리아의 수필》을 쓴 찰스 램은 신경증을 앓는 누이와 평생을 같이 살았다고 한다. 나도 아마 누이와 평생을 같이 살게 될 것이다. 램은 누이의 버팀목이었지만, 내게는 누이가 버팀목이다._113쪽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오빠가 새언니랑 헤어진 게 나한텐 다행인 것 같아.”
뜬금없는 소리였다. 그러나 내 마음 깊은 곳에서 뭔가가 흐무러지고 있었다. 나는 누이의 볼에 입을 맞췄다. 그러자 누이는 제 입술을 내 입술에 가볍게 포갰다가 뗐다. 누이는 제 머리를 내 어깨에 기댔고, 나는 한 팔로 누이의 어깨를 감쌌다. 누이의 가슴 뜀이 내 가슴에 전해져왔다. 도둑고양이 한 마리가 힐끔거리며 우리 앞을 지나쳐 놀이터 뒤 덤불 속으로 사라졌다._118쪽
04 플루트의 골짜기
인간 군집 안에서 제법 큰 위세를 뽐냈던 개체들이라면, 그 죽음이 부고란에 실리지는 않는다. 신문사에서는 따로 제목을 뽑은 독립적 기사를 그들의 죽음에 바침으로써 그들의 삶에 경의를 표한다. 인간 군집 안에서 아무런 힘도 휘두르지 못하고 자질구레하게 산 개체들의 경우에도, 그 죽음이 부고란에 실리지는 않는다. 신문은 부고란에조차 그들의 이름을 실어주지 않는다. … 부고란에 실린 이름들은 인간 군집 사다리의 중간쯤에 자리 잡은 개체들의 것이다. 사회가 그 죽음을 모른 듯 넘어갈 순 없지만, 그렇다고 버젓이 기록해야 할 만큼 위세가 있진 않았던 개체들._120쪽
유럽 지역이나 미합중국에서라면 내가 걸어온 에움길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심지어 이점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반도 남부 지역 대학의 드센 순혈주의 속에서 나는 갈 데 없는 아웃사이더가 되었다. 따지고 보면 나는 그보다 훨씬 전부터 아웃사이더였지만, 취직 자리를 알아보며 내가 두 겹의 아웃사이더라는 것을 절감했다. 한반도 남부 지역에서는 철학과 학생이었던 적이 없던 터라, 나는 이 지역의 철학계라고 불리는 인간 무리에 아무런 끈이 없었다. 그나마 이 지역의 인류가 가장 선망하는 대학을 나오지 않았다면, 시간강사를 따내는 것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지역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인류가 학교에 부여하는 서열의 견고함은 대단한 것이다. 내가 여성이라는 사실도 알게 모르게 내게 불리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 그들은 학교의 울타리 안에서 안전하게 세상을 욕하고 정치를 욕했지만, 바로 그들이 세상이고 정치였다. 그것은 그들도 인간이라는 뜻이었다._131쪽
섹스에 탐닉하는 것 외에 내가 그들과 할 수 있는 일은, 하고 싶은 일은 별로 없었다. 나와 몸을 섞는 종족을 경멸하는 것에 대해 나는 아무런 죄책감도 없다. 그들은 죄책감을 불러일으킬 만한 존엄을 아직 획득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과의 섹스가 찝찔한 불행의식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사람들 속에서 살며 사람을 싫어하는 자는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 갈리아 지역 출신 한 현대인의 말투를 훔치자면, 나는 그 불행의 느낌을 잊기 위해 섹스에 몰두했고, 내가 혐오하는 종족과의 섹스 때문에 다시 불행해졌다._13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