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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조선사 > 조선시대 일반
· ISBN : 9791185430614
· 쪽수 : 464쪽
책 소개
목차
머리말
1부 대마도정벌
1장 왜구를 찾아서
‘왜’와 ‘구’는 도대체 무슨 뜻인가
왜구는 왜 한반도까지 왔을까
해적질 이상의 침략
근본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피해의 양상
2장 삼국시대: 왜구의 침입과 대응
고대 일본열도의 형세
고대 한반도와 일본열도의 만남
왜구의 탄생과 왜구 토벌사의 시작
신라 하대의 혼란과 왜구
해상왕 장보고의 활약과 왜구의 위축
3장 중세 고려: 왜구 침략의 극성기
고려 후기의 왜구 침입, 그리고 대마도
고려-원 연합군의 일본 공격
두 차례의 침공 실패가 일본에 끼친 영항
고려의 반격: 제1차 대마도정벌
격변하는 동아시아 3국과 왜구 문제
4장 조선의 대왜구 정책과 군사 행동
조선 초기의 대외 정책
다시 나타난 왜구와 조선의 군사력 증강
왜구의 침입 양상
제2차 대마도정벌
정벌 이후 거류왜인들의 변란
5장 왜구와 일본
왜구를 대하는 동아시아 3국의 시각 차이
왜구와 일본, 그리고 역사의 교훈
2부 보주 강 야인토벌
1장 여진을 찾아서
야인은 누구인가
주르친, 숙신, 여진
여진의 대이동
이만주, 그리고 멍거테무르
2장 조선과 여진, 압록강을 두고 맞서다
약탈과 납치가 끊이지 않는 압록강 유역
제1차 야인토벌: 조선군 보주 강으로 출동하다
후르가이 부족, 오미부로 쫓겨나다
조선의 방어 태세
3장 조선, 두만강 국경을 확보하다
청 태조 누르하치와 여진
멍거테무르의 죽음
세종의 군사 작전과 조선 동북부 영토 개척
오도리 부족, 이만주와 합류하다
두만강 유역에 육진을 개척하다
4장 건주여진의 침입과 조선의 대응
제2차 야인토벌
압록강 유역에 사군을 개척하다
건주삼위
5장 조선과 명의 대여진 정책
조선의 여진 정책: 회유와 토벌
우디거 족속
조선군과 명군의 연합작전
건주여진의 끈질긴 생명력
6장 청제국의 건설과 조선의 운명
동북 야인의 줄기찬 침입
임진왜란: 조선, 명, 여진 모두의 갈림길
토벌의 실패
건주여진, 분열과 통합
후금에서 청제국으로
호란의 참패와 치욕
3부 나선정벌
1장 조선의 패전과 러시아의 동진
조선과 청의 전쟁: 치욕적인 패배와 이어진 부담
청, 러시아라는 새로운 적을 만나다
2장 제1차 나선정벌
청의 출병 요청과 조선군 출병 준비: “나선은 어떤 나라인가?”
제1차 나선정벌군의 작전 지역 이동
제1차 전투
제1차 나선정벌이 남긴 것
3장 조선의 군사력 증강과 청의 견제
효종의 북벌 의지와 현실적 난관
제2차 나선정벌 준비
4장 제2차 나선정벌
헤이룽 강으로 출동하다
헤이룽 강 전투
철수 문제
제2차 나선정벌이 남긴 것
나선정벌 이후 청과 러시아, 그리고 조선
참고문헌
찾아보기
책속에서
1부 대마도정벌
왜구의 발생 요인은 두 가지 측면에서 검토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먼저, 구성원 전체가 일본인이라는 점에서 고대-근세 일본의 국내 상황과 침략의 목적이 무엇이었는가 하는 문제를 짚어볼 필요가 있다. 그다음으로, 이 문제에 대한 한국 역대 왕조의 정치적.외교적.군사적 대응책은 어떠했는지 그 실체를 짚어볼 필요가 있다.
한반도와 일본열도는 지리적으로 아주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선사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역사적.문화적으로 끊임없는 교류를 이어왔다. 하지만 양자 간의 교류는 경제.문화 면에서 대등한 수준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고대에 한반도가 이미 수준 높은 금속문화 단계에서 고도의 농업생산력을 보유한 데 비해, 일본열도는 매우 열등한 문화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기원전 3세기 무렵부터 활발한 교류를 해온 신라와 왜의 경우가 그러했듯이, 양자 간의 교류는 현격하게 차이가 나는 불균형 상태에서 이루어졌다.
이런 차이로 말미암아 일본열도 주민은 한반도를 통해 경제적・문화적 욕구를 충족하려고 몹시 노력했다. 그들이 이러한 욕구를 충족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정상적인 외교 경로를 거쳐 교역을 하는 것, 또 하나는 비정상적인 방법 곧 밀무역 또는 약탈무역을 하는 것인데, 왜구의 존재가 바로 이 가운데 두 번째 경우로, 비정상적인 방법을 택해 상대방의 재물을 약탈하고 인명을 살상하는 이른바 “왜인들로 구성된 도적떼”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_34~35쪽
개국 초기에 조선 조정은 일본과 외교적 교섭을 통해 왜구의 금압을 꾀하는 한편, 조선 영토 연안에 출몰하는 왜구를 직접 회유하여 투항시키는 일에도 힘썼다. 투항한 왜구들에게는 벼슬과 토지, 가옥 따위를 주어 감화시켰으므로 태조 말년에는 투항 귀순하는 왜구들이 부쩍 늘어났다. 조선 측은 이들을 ‘항왜降倭’ ‘투화왜投化倭’ 또는 ‘향화왜向化倭’라고 불렀다.
조선 땅에 영주하기를 희망하는 왜인들은 ‘항거왜인恒居倭人’이라 하여 일정한 지역에 거주할 것을 허락했고, 조선과 무역을 원하는 왜인들에게는 ‘흥리왜인興利倭人’ 또는 ‘상왜商倭’라 부르며 교역을 허락했다. 또한 표류민의 송환이나 진귀한 물품을 바친 자, 또는 양국 외교상에 두드러진 공적을 세운 자와 특수한 기능이나 예능을 보유한 자 들에게는 ‘수직왜인受職倭人’이라 하여 벼슬을 주고 회유했다. 이들에게는 성姓을 지어주고 이름을 바꾸는 것을 허락하여 내국인과 구분하지 않고 거주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그러나 투항 왜구의 수가 늘어나면서 폐단도 적지 않았다. 왜인들이 차지하는 경제적 비중이 늘고, 조선인 남녀와 교제하는 경우도 생겨났으며, 심지어 조선의 군사기밀을 은밀히 본국 일본 측에 제공하는 자도 나타났다.
왜인들의 폐해가 점점 늘어나자 태종은 왜인을 통제했다. ‘항거왜인’의 거주 지역을 각박하게 제한하고 ‘흥리왜인’을 지정된 포구의 교역 장소에서만 무역할 수 있도록 제한하는 조치들을 취했다. 태종 때의 여러 가지 통제로 말미암아 투항 왜구의 수는 전대에 비해 크게 줄어들었다. 그러나 이들은 당국의 통제가 가해지자 곧바로 침략자의 속성을 드러내어 조선 연안지대를 또다시 침범하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욕구가 관철되지 않자 이를 달성하기 위해 평화롭고 순종적인 왜인에서 약탈을 자행하는 왜구로 돌변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보았을 때 왜구에 대한 회유정책은 일시적 방편으로서는 성과가 있었으나 근본적인 왜구 금지정책으로서는 한계가 있었던 셈이다. 그리하여 종국에는 강경책으로 군비를 강화하여 대마도정벌을 계획하기에 이르렀으며, 또 그 계획대로 실행에 옮기지 않으면 안 되었다.
2부 보주 강 야인토벌
조선 왕조는 15세기 초 세종 재위 때부터 압록강과 두만강 연안 일대에 산재한 여진 부족들을 집단으로 토벌하여 두 하천의 북방으로 그들을 쫓아내고 사군-육진을 설치하여 조선 영토로 고착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리하여 조선과 여진 부족들 사이에는 주종관계가 확립되었으며 이들의 침략과 약탈 행위도 크게 줄어들었다.
조선은 이들에게 경제적.문화적 혜택을 주어 회유하는 한편, 경우에 따라서는 소규모로 압록강이나 두만강을 건너 그 근거지를 소탕하기도 했다. 특히 후르가이나 오도리를 비롯한 여진 부족들이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에 대한 조선의 지배권을 위협할 움직임을 보이면 이들을 가차없이 무력으로 응징했다.
조선군의 토벌은 대체로 비정규전 성격을 강하게 띠었다. 정규군으로 게릴라를 산발적으로 토벌하는 형태였기에, 언제나 전과는 미미한 반면 토벌이 장기화하면서 국력을 점차 고갈시키는 악영향을 끼쳤다. 국가가 아닌 부락 단위로 이합집산을 거듭하는 여진족과의 싸움에서 단기간의 속전속결이란 애당초 불가능했고, 그들을 막자면 막대한 병력을 사군-육진 각처의 소규모 성채나 보루에 분산 주둔시켜야 했다. 이 때문에 방어 효과보다 지나치게 많은 군사비를 해마다 지출하는 고질적인 부담을 지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은 여진 부족들에 대해 외교적 회유책을 동원하고 경제적 혜택을 베풀어 포용함으로써 변방 지역의 안정을 꾀하려 했다. 하지만 외교적 회유책에는 항상 한계가 있었고 결국 건국 초기부터 엄청난 국력을 소모해가며 군사력을 동원할 수밖에 없었다.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 사군-육진 구축과 간헐적인 여진족 본거지 공격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_279~280쪽
명나라가 완전히 멸망한 것은 1662년이다. 1643년 청 태종 홍타이지가 병사한 후 아홉째아들 아이신기오로 푸린福臨이 뒤를 이어 청 세조世祖 순치제順治帝가 되었다. 이듬해 청군은 북경 도성을 점령했고, 그로부터 중국 전역을 줄기차게 정복해나갔다. 그리고 청 성조聖祖 강희제康熙帝 즉위 초년에 드디어 실질적으로 중원 천하를 모두 장악한 대제국을 이룩했다.
여진족(만주족)이 세운 청나라는 청 태종의 건국 때부터 1911년 신해혁명辛亥革命을 계기로 멸망할 때까지, 도합 11명의 황제가 대를 이어 276년 동안 중국 대륙을 통치하면서 동북아 전역을 석권한 패자로 군림했다. 승냥이와 이리 떼처럼 사납게 창궐한 여진족의 기세에 억눌리는 동안, 조선 왕조 중후기의 임금들은 건국 초기 세종대왕이 조상들을 기려 읊은 《용비어천가》 가운데 백열한 번째 노래를 다시 떠올리고 한탄했을는지 모를 일이다.
승냥이와 이리 떼가 화를 끼치는데 초가집 한 칸 없어,
움막을 묻어 사셨구나.
너르고 큰 집에 곱게 짠 담요를 펴고 보좌에 앉으셨어도,
이 뜻을 부디 잊지 마소서.
3부 나선정벌
조선은 1644년 9월 청이 북경으로 수도를 옮기고 명이 이미 멸망의 길로 들어선 상황에서도 명나라가 재기하기를 기대하며 청국에 설욕하겠다는 집념을 버리지 않았다. 효종은 17세기 후반부터 북벌에 대한 공감대를 넓혀가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각종 무기를 확충하고 군사 요충지에 성곽을 수축하는 등 방위력 증강 작업을 착실히 추진해나갔다. 이 사실이 누설되어 청의 위협과 정치적 압박을 받기도 했지만 어영청御營廳 소속 군 2,000명과 훈련도감 소속 군 1만 명을 확보하는 목표를 세우고 정예 중앙군을 양성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조선의 청에 대한 예속은 명나라의 몰락이 기정사실로 굳어지고 청의 중원 지배가 공고해질수록 심화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처지에서 청이 ‘나선羅禪정벌’ 참전을 요구해 왔다. 연합작전의 대상이 명나라가 아니라 ‘나선(러시아)’이라는 전혀 생소한 국가였기 때문에 이전과 상황이 크게 달랐다. 조선은 청이 요청한 기일을 지연하거나 작전을 기피하는 등의 행동으로 청군과 마찰을 일으킬 필요가 없었으며, 그렇게 할 수도 없었다. 게다가 ‘러시아인 정벌’에 참전하는 소수의 조선군은 독자적으로 작전을 수행하지 못하고 주력인 청군 사령관의 철저한 지휘 통제를 받으며 작전을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