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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91185962177
· 쪽수 : 396쪽
· 출판일 : 2020-10-25
책 소개
목차
1~25장
저자소개
책속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그는 한 인간이 지닌 슬픔은 영원히 가시지 않으며 그것은 땅속에 들어갈 때라야 잊히는 법이라고 굳게 믿게 되었다. 슬픔은 참거나 잊히는 것이지, 탕감되거나 저절로 사라지는 게 아니라고. 인간은 어느 곳에 올 때 그가 지닌 모든 것과 함께 오지만, 그에게서 떨어져 나온 씨앗 하나로부터 다시 새로운 뿌리가 내리는 법이다. 그게 단절과 연결의 의미일 거라고 그는 그때 막연히 생각했다. 그러나 스무 살 무렵이 되자, 그는 자기 존재에 대해 무엇보다 깊게 고민하고 숙고했다. 그러다 어느 날 바닷가를 거닐다가 문득, 이런 생각을 해봤다.
‘이 카리브 해로 흘러들어온 것 중에 뿌리를 내리지 않고 살아난 게 있던가?’
이 순간, 그는 시와 음악이 그의 발밑으로부터 싹이 돋아나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것은 거의 본능적인 깨달음이었고, 그의 영혼에 닻이 내려지는 것 같은 강한 확신감이었다.
그들이 사귄 지 1년가량 되었을 때, 그녀는 매우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했다. 그때조차 그는 코앗사 코알코스 강에 연꽃 같은 풀 하시아토가 떠 있을 때 그 꽃을 바라보던 갈색 눈의 소녀가 무슨 생각을 하였는지 전혀 관심 두지 않았다. 비가 오면 꽃잎들이 떠내려갈 때 소녀가 왜 강의 끝까지 내달리며 그 꽃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보려 했는지도. 이건 분명히 그가 간과한, 치명적인 실수였다. 어떤 점에선 한계였음에 틀림없다. 여자의 과거를 알고자 하지 않는 남자는 여자를 사랑하는 게 아니니까. 그는 한참 뒤에야 아나가 얘기했던 그 강이 흐르던 지역을 또렷이 더듬어 볼 수 있었다.
경비원이 술을 마시고 잠든 한밤중에 아버지는 유리병에 물을 채워서는 몰래 그 마른 우물 속으로 끈을 드리워 주었지. 아버지의 행동은 들키기만 하면 매질 받을 만한 거였지만, 그래도 당신은 용기내서 그를 도왔지. 그러곤 아버지는 다시 조용히 돌아와 누우셨다. 그 밤의 스산한 나무 그림자가 그의 머리맡에까지 와 닿았던 풍경도, 그 때문에 무서워 넝마 같은 모포 속에서 몸을 떨던 기억도 났다. 다음날까지도 농장에선 우물에 처박힌 사내가 다소나마 갈증을 해소했다는 사실을 누구도 몰랐다. 그 남자는 나중에라도 아버지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는지 모르겠군. 하지만 그랬든, 안 그랬든 어떤가. 우리는 혁명 때 이들처럼 하찮을 일을 하는 사람들로부터 생사를 건 도움을 받기도 했는데. 단순히 혁명군에게 물 한 잔을 줬다는 이유로 내통 혐의로 찍혀 정부군에게 붙잡혀 뒤통수에 총을 맞아 죽은 농부들도 있었으니까. 그들은 정말 안 됐지. 이 쿠바에서 가장 불쌍한 계급의 사람들이었고, 그들이야말로 내란 중 가장 극심하게 당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