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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한국근현대사 > 한국전쟁 이후~현재
· ISBN : 9791186061619
· 쪽수 : 508쪽
· 출판일 : 2019-02-20
책 소개
목차
서문 / 개관
남조선 력사 제1~3부(해방~1960년까지)
필자의 말·분노하는 몸짓으로 거짓 역사를 거부하며|이동욱
제1부 군정기의 정보 공작
제1장 소련군의 MGB vs. 미군의 CIC
제2장 남로당의 분투
제3장 지구촌에 냉전을 부른 리승만
제4장 제1호 애국렬사 성시백 동지
제2부 조국해방전쟁시기의 대남공작
제1장 초기 공작의 성과
제2장 정보 실패의 교훈
제3부 조봉암 공작과 리승만 제거 공작
제1장 조봉암 공작
제2장 4·19와 리승만 탄핵 공작
남조선 력사 제4~5부(1960년~1979년까지)
필자의 말·박정희 시대는 북한에는 나쁜 시대였으나 대한민국에는 좋은 시대였다|이강호
제4부 박정희의 등장과 공화국의 위기
제1장 남조선 집권자 박정희 평가에 대하여
제2장 박정희에 대한 경제적.정치적 평가
제3장 공화국에 비수를 꽂은 한·일협정 타결
제5부 닉슨 독트린과 1971년 대선
제1장 미군 철수라는 혁명적인 상황
제2장 김대중과 한민통
제3장 ‘10월 유신’과 남조선 변혁운동의 피 어린 발자취
제4장 서독의 ‘방어적 민주주의’ 체제와 남조선의 유신체제
남조선 력사 제6부(1980년~2016년까지)
필자의 말·5·18과 80년대, 대한민국을 좌익으로 물들이기 시작한 본격적인 국가 반역의 출발|이동호
제6부 정권 획득을 위한 남조선 혁명가들의 노력과 공화국의 지원
제1장 피의 기록, 광주 무장 봉기
제2장 광주무장봉기 이후 한국 인민의 투쟁
제3장 북한의 혁명적 군중노선에 따른 전투적 총학생회론과 전대협 건설
제4장 남조선혁명을 위한 공화국의 노력(남조선혁명을 지도할 지하당 건설을 위한 노력)
남조선 력사 제7부(2016년~2018년까지)
필자의 말·남한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북측의 시선으로 보아야|김철수
제7부 박근혜 탄핵, 드디어 적의 숨통을 끊다
제1장 공화국 적대에 안달이 난 박씨 일가
제2장 세월호로 얻은 성공
제3장 뜻밖의 낭보
제4장 총공세의 시작
제5장 반제반미세력의 총궐기와 세월호의 부활
제6장 보수괴뢰언론의 자멸
제7장 허수아비 된 국정원
제8장 보수패당 새누리당의 적전분열과 공화국 검찰의 탄생
제9장 박근혜의 선택 그러나 위대한 남조선 해방의 첫 깃발, 탄핵소추
제10장 마지막 관문을 뚫다. 남조선 인민헌법재판소의 박근혜 심판
제11장 탄핵혁명과업 및 조국해방전선의 승리에 대한 평가와 기대
보론: 남조선 문학예술혁명 100돌을 앞두고 되돌아본 문혁 전사들의 위대한 투쟁
필자의 말·확증편향과 인지부조화의 빅뱅|황정은
제1장 남조선문학예술혁명 100돌을 준비하며
제2장 남조선문학예술혁명의 교본과 교시
제3장 남조선문학예술혁명의 려정
제4장 남조선문학예술혁명의 단계
제5장 무기로서의 문학예술(1945~1980, 남조선문혁)
제6장 문학예술혁명의 전장에 선 문혁전사들
제7장 1990년대 남조선문혁과 진지전
제8장 2000년대 남조선문혁
제9장 문학예술 블랙리스트, 공격이 최선의 방어다
제10장 촛불문화제, 남조선 문학예술혁명의 보검
제11장 혁명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참고 문헌 / 참고 누리집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대구폭동… 그 전개 과정과 시사점
1946년 9월, 남로당이 지휘한 철도 파업으로 대구 일원에 식량사정이 나빠졌다. 이에 앞서 남로당 대구시당은 4월 26일 ‘남로당 노동자 총파업 대구시 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조직적인 파업을 지휘하면서 6개월 가까이 각종 유언비어를 유포시켜 민심을 선동해오고 있었다.
10월 1일에는 장난삼아 “시청에서 쌀 배급을 준다더라”라는 유언비어를 유포시켰다. 이로 인해 부녀자 1,000여 명이 대구시청 앞으로 그릇을 들고 몰려들었다. 그 와중에 “배급이 일절 없다”는 사실을 퍼뜨리자 화가 난 부녀자들이 대구 시청에 난입, 난동극이 벌어졌다.
이날 오후에는 대구시 태평로 일대에 운수·금속·화학 노조원으로 구성된 500여 명의 시위대가 모여들어 관공서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해가 지고 밤이 오자 허헌, 김원봉 등이 이끌던 지휘부는 시위대를 더욱 공격적으로 지휘했다. 그러자 무장경찰도 150명으로 증강 배치됐는데 밤 11시쯤 드디어 지휘부가 그토록 바라던 사건이 터졌다. 경찰의 위협사격이 촉발된 것이다. 그리고 얼마 뒤 파업 운동원 한 명이 경찰의 총에 맞아 쓰러져버린 것이다.
이 순간을 기다리던 황태성 동지가 연단에 올라와 군중들을 흩어지지 않게 열정적인 선동을 해가기 시작했다. “민중의 기, 붉은 기는 전사의 시체를 싼다. 시체가 식어 굳기 전에 혈조는 깃발을 물들인다…”라는 적기가가 노래로 불러지자 군중은 광분한 전사로 변해갔다.
다음날 새벽, 대구 남로당 본부에는 평양에 주둔 중이던 MGB 정치장교들의 지령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MGB 정치장교들은 대중의 분노를 자극하여 가공할 힘을 발휘하게 하는 데는 시체만 한 것이 없다는 점을 동유럽에서 이미 체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고 그 방법을 상세히 전수해 주었다.
10월 2일 아침이 밝아오자 황태성이 이끌던 조직원들이 경북대 의대에 있던 해부용 시체를 살해당한 노동자의 주검이라며 메고 장례행진을 시작했다. 장례 행렬이 태평로를 거쳐 대구경찰서까지 가는 동안 군중은 10만 명 이상으로 불어났다. 오후 1시쯤에 경찰서 무기고를 급습하면서 동지들은 무기를 손에 쥐기 시작했다. 일제 때 독립운동조차 이렇게는 하지 못했던 남조선에서 대한민국의 건국을 저지하려는 무장투쟁이 최초로 벌어지게 된 것이다.
미군정 당국이 10월 2일 오후 6시를 기해 대구시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하면서 폭동 사태는 수습된다. 우리는 대구폭동에서 남로당의 조직적인 시위와 북한의 지령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알 수 있다. 일반 시민만으로는 이런 폭동이 일어날 수 없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북한은 이승만을 어떻게 보았나
1945년 해방정국 당시 북쪽 당국은 이승만에 대해 전투 경험과 조직·선동 분야에 경험이 없으며, 유교 가부장적 인물로 보았다. 반면에 미국 유학을 바탕으로 한 외교에 능숙하다고 평가 했다. 당시의 보고서를 보면….
▶리승만과 정면 대결을 피할 것. 그는 교활한 여우로 보아야 할 것임.
▶강점: 영어를 매우 잘하고 미국에서 고학력자로 활동해 와 미국 정치인들을 마음대로 주무를 정도의 외교적 역량이 강함. 남조선 인민들에게 이름이 예상외로 많이 알려져 있음.
▶약점: 국제정치에 경험이 많은 데 비해 국내정치에는 주목할 만한 업적이나 경험 및 탄탄한 조직이 전혀 없음. 김일성 동지처럼 유격전이나 군사적 경험이 전무함. 정치공작을 위한 조직과 운용법도 체득한 바 없음. 태생이 왕족이어서 충효 같은 봉건적 계급사상이 몸에 배어 있을 것임.(49쪽)
북쪽의 소련 점령군은 남한을 남로당을 이용하여 북한의 공산정권 영향아래 두고자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승만을 중심으로 세력이 결집되자 집중적인 견제에 들어가게 된다. 하지만 이승만은 대구 폭동 등 북쪽의 끈질긴 방해 공작 속에서 미국 정계와 유엔 외교를 통해 5·10 총선거를 치르고 1948년 8월 15일, 역사적인 정부 수립을 이루어낸다.
“리승만은 우리 김일성 동지처럼 역사조작을 통해 신격화하는 고난도의 심리전 작업도 하지 않았는데도, 소련군 MGB 같은 정보·정치공작대의 지원을 받은 바 없는데도 남조선 인민의 신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참 희한했다. 결국 리승만의 의도대로 이때부터 불과 여덟 달 만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99쪽)
북한 정권은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이 물러나자 남조선 적화의 호기로 삼았다. 그동안 남한 공작으로 권력 붕괴를 이뤄냈다고 평가를 했지만, 혁명이 국가 붕괴로 이어지지 않아 그들은 이를 ‘미완의 혁명’이라 명명하고 다음을 기약한다.
-통일혁명 세력을 짓밟은 박정희의 5·16
북한 정권은 출범 초기부터 군사력과 경제력에서 남한보다 우위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박정희 집권 시기에 남한은 북한을 앞섰다. 많은 반대에도 추진한 한·일 국교 정상화를 통해 세계시장경제에 편입하면서 수출드라이브 정책이 성공을 거둔 덕분이다.
박정희가 집권하던 무렵 남조선은 1인당 GNP가 70~80달러 수준으로 유엔 가맹국 125개국 가운데 105위였다. 당시 우리 공화국은 GNP가 약 300달러 수준의 50위권으로 말하자면 중진국이었다. 그러나 당시 남조선의 피폐상은 그 수치가 말해주는 것 이상이었다.
조국해방전쟁이 끝난 지 8년이었다. 원래도 변변찮았던 남조선의 산업현장은 전쟁의 여파로 다 무너진 상태였다. 우리는 빠른 속도로 후유증을 극복하고 혁명무력을 재건하여 다시 남조선을 겨누고 있었지만 남조선은 군인들에게 봉급을 제대로 줄 돈이 없었다. 도시에는 일자리가 없었고 농촌에는 보릿고개의 굶주림이 여전히 반복되고 있었다.
그런 만큼 우리는 박정희 패당의 재건이 어쩌고저쩌고하는 어설픈 놀음도 결국 모조리 실패로 돌아갈 것으로 판단했다.(184쪽)
북한의 입장에서는 박정희 경제성장이 부담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대남전략에 차질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4·19 이후 남조선의 정정(政情)혼란을 틈타 통일혁명세력의 활동 공간이 만들어졌다. 온 사회가 데모 천국으로 변한 가운데 학생들의 관심은 민주가 아니라 통일로 가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북한으로서는 고무적인 현상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여기에 찬물을 끼얹은 것이 바로 5·16 군사혁명이었다. 더구나 박정희의 혁명공약 1호는 “반공을 국시(國是)로 삼는다”였다.
박정희의 5·16을 단죄할 수는 없다. 5·16의 진짜 문제는 그 수구 정권을 무너뜨린 게 아니라 4·19 이후 마침내 다시 기지개를 켜고 일어서기 시작한 남조선 인민의 통일열망과 움직임을 짓밟았다는 데 있다.(196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