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미지

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역사소설 > 한국 역사소설
· ISBN : 9791186542286
· 쪽수 : 276쪽
· 출판일 : 2017-01-25
책 소개
목차
1. 안견, 그 높은 이름을 만나다
2. 오죽헌의 낮과 밤
3. 남녀가 다르다
4. 소녀, 태임을 따를까 합니다
5. 열아홉 사임당
6. 상견례
7. 혼인 전야
8. 불안한 날들
9.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10. 3년의 애도
11. 남편의 정, 아내의 도
12. 대관령을 넘어서 한양으로
13. 새로운 분신들
14. 작은 사임당 매창
15. 천재와 범재 사이
16. 검은 용
17. 파행의 시작
18. 치마폭에 앉은 포도송이
19. 장안에 퍼진 소문
20. 흔들리는 지아비
21. 쓸쓸한 외도
22. 칼날 위에 서다
23. 현룡 앞에서
24. 다시, 갈라지는 마음
25. 무너지는 몸
26. 무너지는 마음
27. 타오르는 내면의 불꽃
28. 풀과 나무와 새
29. 나비를 보았다
30. 그를 용서하다, 그를 놓아주다
31. 쓰러지다
32. 다시, 빛 속으로
작가의 말 - 차별을 뚫고 일궈낸 치열한 생의 미학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師
任
堂
둘째가 단정하게 무릎을 꿇고 앉은 자리 앞에 펼쳐진 하얀 한지에는 큼지막하게 쓴 세 글자가 앉아 있었다. 단아한 서체로 세로로 쓴 글씨 안에 담긴 호칭이 신명화의 시선을 단박에 사로잡았다. 신명화의 둘째 딸은 종이 위에 적힌 글씨, ‘사임당’을 자신의 당호로 쓰고, 그렇게 불리기를 요청하고 있었다. 할아버지에게, 아버지에게, 그리고 가족들에게.
“당호를 지었다고?”
신명화 대신 이사온이 말문을 열었다. 오죽헌에서는 이사온이 가장 나이가 많은 어른이긴 했으나 외손주들에게 덕과 행을 가르치고 다스리는 결정권자는 단연 그들의 아버지인 신명화다. 그렇기에 거드는 말을 할 뿐 다른 말을 하지는 못했다.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던 둘째가 눈을 들어 외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깊은 눈매와 초롱한 눈망울이었다.
“예, 할아버지.”
“사임당이라. 어떤 뜻을 품고 있는지 말해주겠느냐.”
기다렸다는 듯 둘째가 또박또박 답했다.
“사는 본받는다는 뜻입니다.”
“임은?”
“중국 문왕의 어머니 태임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사임당은 무슨 뜻이냐?”
“예. 문왕의 어머니 태임을 스승으로 삼고 덕을 통해 널리 사람들을 깨우치고 싶다는 뜻입니다.”
“그래. 그 뜻은 음미할 만하구나.”
이사온이 침묵을 지키는 신명화를 대신해 입을 열었다.
“하지만 당호라는 건, 뛰어난 업적을 남긴 사대부 남자들에게 주어지는 게 대부분이다. 여성들은 비록 사대부 집안 사람이라 해도 호를 갖는 경우가 거의 없는데.”
이씨 부인이 옆에서 거들었다.
“그래. 둘째야. 어린 네가 당호를 짓다니. 가당치도 않아.”
거기에 신명화가 질문했다. 정곡을 찌르는 질문이었다.
“호를 지으려는 의도가 무엇이냐? 혹 너의 그림 그리는 재주 때문이냐?”
“한양까지는 먼 길이니 예서 잠깐 쉬었다 갑시다, 부인.”
가마가 내려지고 사임당도 밖으로 나왔다. 시원한 바람이 목덜미를 쓰다듬고 지나가는가 싶더니, 눈앞에 펼쳐진 것은 첩첩산중 험준한 고개였다.
“여기는……?”
사임당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난생처음 보는 높은 산봉우리가 눈앞에 보였다. 쳐다보고 있노라면 아찔한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온통 짙푸른 녹음에 둘러싸인 거대한 산. 그리고 녹음에 가려져 드문드문 보이는 좁고 구불구불하게 한없이 이어진 길.
“대관령이라오. 넘어가기가 많이 힘들 것이오. 하지만 한양으로 가려면 반드시 이 고개를 넘어야 한다오.”
“그럼, 서방님은 한양에서 오실 때도 이 험준한 고개를 넘어오셨습니까?”
“한 번 넘기가 힘들지, 두 번 세 번 넘다보면 괜찮아지는 것 아니겠소? 부인도 다음에 장모님 뵈러 올 때는 이 고개도 수월하게 다닐 수 있게 될 거요, 하하!”
이원수의 호방한 웃음소리에 사임당도 따라서 미소를 지었다. 유약해 보이기만 하던 지아비가 이 험준한 고개를 몇 번이나 넘어 한양과 강릉을 오갔다니. 문득 지난 3년 동안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미더움이 느껴졌다. 그렇다. 이 고개 너머에 기다리고 있을 세계에서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지아비 아닌가.
대관령 너머는 어떤 곳일까, 어쩌면 나는 두 번 다시 대관령을 넘지 못하는 건 아닐까. 아니다. 사임당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나는 서방님과 시어머니를 모시고 내가 추구할 길을 꿋꿋하게 추구할 것이다. 나는 사임당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