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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시 > 한국시
· ISBN : 9791186557761
· 쪽수 : 158쪽
· 출판일 : 2020-10-20
책 소개
목차
시인의 말
1부
말문
뜨거운 발
겨울에서 봄 사이
금서
개기일식
달콤한 무기
삭제된,
선유仙遊
은수이야기
수레
유고시집
과녁은 빗나가거나 묘미를 찾거나
키다리아저씨
화살나무 뼈
어미
곤드레밥
2부
몰입
가지가지
그 여자, 지니genie
강릉에서
골목이라는 말속엔
늙은 식탁을 위하여
담쟁이는 가능할까
길마가지 꽃
꽃 향유
녹청
등
의자
부패의 저녁
별똥별
여름을 보내는 방식
오래된 사과나무
3부
일요일의 키스
유리벽
심장을 가졌다
보르헤스를 읽는 밤
단단함에 대하여
은하수 편의점
거절 술
발효의 계절
혼자 놀기
돌탑의 말
발목 잡히다
목련에게 당하다
부다페스트 야경투어
전어를 굽는 저녁
한계령을 지나며
이 별의 시간
정약용
4부
파경破鏡
모과나무는 궁금하다
방목
칼과 달
자작나무 도서관
신, 규방가사
징후들
불쾌한 골짜기
땀을 위하여
봄을 수리하다
쌀죽 한 그릇
야생野生
위구르 여인
한 호흡
백두산 천지
서유구
해설
시의 심장을 가진 시인 │이숭원(문학평론가)
저자소개
책속에서
말문
하늘이 말문을 열었다
쏟아지는 장맛비에 꽃들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
진흙을 뚫고 수련이 말문을 열었다
과묵을 늘상 달고 다니던 아이가
아기아빠가 된 것 만큼이나
저 수다스러움은 위대하다
살아 있다고 소리치는 거
꽃이 잠깐 한눈판다 한들,
내가 엄마를 찢고 나와 처음 말문을 열었을 때
엄마도 그랬으리라
공원묘지의 봉분들, 말문을 닫은 그 이유라는 거
알고 보면 거기서 거기다
정선 비행기재를 지나는데
한여름 적요 속 터널이 속사포를 쏟아내고 있었다
살기 위해 죽을힘 다하는 폭포수처럼
고요라는 평형수가 터널의 말문을 닫아버린다
언젠가 말이 문을 닫을 때
그때를 위해 문장 하나는 남겨
심장을 가졌다
양파를 썰다가 왼손 중지 첫째 마디를 베었다
둑이라도 무너진 듯 솟구치는 통증 아래
붉은 아가미가 입 벌리고 있다
어떤 힘으로 마그마가 틈을 찾아냈는지
이미 굳어버린 고집을 흔들어 따뜻하게 대지를 적시는
붉은 소낙비
심장을 가진 것이 분명했다
눈물 흘리는 것으로는 너의 반의반도 적시지 못한다는 듯
신은 어느 날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하여 ‘버려진 어둠을 헤치고 담장 안에 장미를 심으라’ 명령을 내렸다
꽃과 가시를 내장한 채 줄줄이 담장을 넘어
가문의 명예를 걸고 전장에 나가는 붉은 군사들에게
신은 또 명령한다
꽃이라는 문장으로 세상을 제압해보라
생이라는 협곡을 통과하기 위해선
가시에 찔리고 피 흘릴 수밖에 없다는 것
소낙비가 그치고 붉은 아가미가 닫히고
넝쿨장미는 줄줄이 담장을 넘으며 너머의 세상을 향해
온몸을 발기하고 있다
발효의 계절
몽골 쳉켓 마을에서 염소젖 짜는 여자를 보았다
버터에 구운 빵을 위해 염소젖을 짜는 여자
염소는 건초를 우유로 바꾸고
젖 짜는 여자는 다시 치즈와 버터와 요거트로
나는 바꾸기로 했네
버터와 치즈를 고소한 시 한 편으로
꽃사과와 설탕을 항아리에 버무려 과실주를 담근다
술이 익는 동안 나는 연애편지 쓰듯 시 한 편 쓴다
아침이면 설익은 내 시를 다시 버린다
싸한 기운으로 내 안을 통과할 때까지
내 시는 좀체 발효되지 않는다
베란다 앞 산사나무 한 그루 빨강을 내 보인다
빨강 밥을 먹으려고 온갖 새들이 날아든다
이미 발효의 계절을 통과했다는 것
뿌리 근처에서 향기롭게 썩어간 이파리도 발효 끝에 꽃 피우고
빨강 열매를 가득 달고 왔다는 것
겨우내 뿌리를 단단히 붙들고 있었다는 것
밀가루 반죽이 발효되는 동안
내 시도 고소하게 부풀어 갈 것이네
효모를 약간만 뿌리고 소금을 살짝 첨가해 화덕에 구워내면
고소하고 영양 좋은 시 한 편 구워질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