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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한국에세이
· ISBN : 9791187514879
· 쪽수 : 336쪽
· 출판일 : 2022-06-20
책 소개
목차
프롤로그
1부 내 손이 카잘스의 손을 스칠 때
그리운 사차원 서재
꿈을 실현하는 완벽한 매뉴얼
삶은 왕복 없는 편도 여행
를르의 시절
내 손이 카잘스의 손을 스칠 때
팥칼국수와 설탕 두 숟가락
옛날 옛적 내가 보물지도를 그릴 때
나를 살려준 당신의 이름은
고귀한 말들의 정류소
식물과의 대화에 대하여
몽당연필의 시절
맨 손가락으로 달의 지도를 더듬는 밤
인생에 한 번은 고고학자
표지가 아름다운 책은 바다가 보이는 창문과 같아
천천히 녹아내리는 시간에 대하여
비가 좋다
2부 루카치를 읽는 밤
별은 인간의 영혼을 덥힌다
내게 남겨진 최후의 책
내 영혼의 남산도서관
번역의 다채로움
루카치를 읽는 밤
입술 이전에 속삭임이 있었지
가없고 끝없고 영원한 것들에 관한 짧은 기록
어린 스티븐 킹의 다락방 상자
인간 내부의 얼룩과 은유로서의 호러
오늘도 근사한 악몽을
위대한 기만으로서의 시
진정성은 슬픔의 영토에서 빛난다
불리든 불리지 않든 신은 존재한다
나인디스크의 시절
경쾌하게 반복되는 우수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유혹
바람은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는지
영원으로의 상상의 비행
3부 시간을 마음에 인화하는 법
좋아하는 사람과 무서운 것을 보고 싶었어
구련보등의 신비
옛날 옛적 내가 발레를 배울 때
커피 마니아만 대접받는 이 더러운 세상
아직도 난 멀더가 되고 싶다
내러티브의 근본주의에 대하여
신선한 인생에 대하여
시간을 마음에 인화하는 법
특이한 낱말의 수집에 대하여
목요일의 아이
음악의 취향
명랑한 음악이란 게 존재할 수 있을까
아무래도 가을밤이니까
나와 아바타
꽃눈
어느 날 문득 내가 한 권의 책이 된다면
그게 호였다
열려 있는 문에 관한 아홉 가지 단상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어린 시절 난 마법의 선물이란 말을 좋아했다. 누군가에게 마법의 선물을 주려면, 우선 온갖 기괴한 재료를 섞어 푹푹 끓여낼 수 있는 딸기색 가마솥이 있어야 하겠지. 그리고 어디로 배달을 나갈지 목적지를 알려주는 수정구슬도 필요할 테고. 그렇게 해서 약을 짓고 목적지를 확인하면 난 멋들어진 깜장망토를 두르고 고깔모자를 쓴 다음 마법 지팡이를 타고 하늘을 날아올라 마법의 약을 배달 나가는 거다. 와인이 엎질러진 색깔의 하늘이나 블루 벨벳이 내려앉은 것 같은 밤하늘을 휘휘 날아서 말이다.
어쩌면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상흔을 진득하게 끓여내는 행위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글을 계속 쓰기 위해서는 솥단지에 넣어야 할 다른 재료들이 더 필요할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백 년 묵은 지네랑 말린 두더지, 오래된 박쥐 이빨이나 순금색으로 피어나는 매그놀리아 꽃잎 같은. 그건 어린 시절 직접 겪었으나 세월에 따라 자기 내부의 심해에 침전한 기억이거나 끝내 토로하기 망설여지는 은밀한 죄 같은 거다.
누구나 생에 한 번쯤은 강렬하게 무언가에 매료된 적이 있을 것이다. 나에게 그것은 내 영혼을 잠식하는 다른 사람의 글이었다. 이를테면 나에게 그 글은 J. D. 샐린저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였고, 아서 C. 클라크와 김용이었다. 아마도 다른 사람은 다른 것에 매료되었던 적이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누구나 자신의 내밀한 꿈은 그 자신이 진정으로 매료된 것에 닿아 있다는 것이고, 그리고 거기서 자신의 재능이 온전히 발현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자신이 매료된 것을 찾아내는 것, 그리고 그것에 불씨를 당겨 자신의 영혼에 달아오르는 숯불로 오래 품도록 만드는 것. 만약 《꿈을 실현하는 완벽한 매뉴얼》이란 책이 있다면 이 두 가지가 그 안에 담긴 모든 것이리라.
세상에 태어나 인생을 살아가는 것을, 지구에 잠깐 들른 여행이라고 생각할 때가 있다. 모든 인간은 잠시 출발지를 잊었으나(모든 여행객들은 여행 기간 동안 고향을 잊는다) 두근두근 기대감을 가지고 여행지 지구에 도착한 것이다. 생명을 얻은 것도 굉장한 행운인데 지성을 가진 인간으로 태어나 숭고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목도할 수 있으니 말이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최초의 근원은 사춘기 시절 읽은 생텍쥐페리의 문장 때문이다. “가장 멋있게 인생을 사는 방법은 가능한 한 많은 것을 사랑하는 것이다”라고 그는 (동시대의, 그리고 먼 훗날의 여행자들에게) 다정하게 조언했다.
물론 자신에게 주어진 조건에 불만을 가질 순 있을 것이다. 마치 여행지에서 풀어본 캐리어에 미처 담아오지 못한 것들을 떠올리고 속상해하거나 부족한 여행 경비에 아쉬움을 갖는 것처럼. 학창시절의 나로 말하자면 학자가 되고 싶었지만 여러 가지 경제적 문제 때문에 졸업 후 바로 취업을 해야 했다. 그러나 지상에서 불가사의하게 사라지는 것으로 인생을 마무리한 비행사이자 작가인 생텍쥐페리의 조언을 늘 새기고 있었기에 난 직장에 충실하면서도 아름다움과 진리의 목격자로 살겠다는 다짐을 잊지 않았다. 내가 얘기하는 목격자는 니체가 얘기한 위버멘시에 견줄 수 있겠으나, 내가 꿈꾼 것은 낭만적인 위버멘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