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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판타지/환상문학 > 한국판타지/환상소설
· ISBN : 9791188793167
· 쪽수 : 251쪽
· 출판일 : 2018-03-15
책 소개
목차
에피소드14 와룡촉대
에피소드15 줘도 불만이야
에피소드16 요강 도둑
책속에서
“저, 이걸…….”
떨리는 두 손이 머뭇머뭇 내민 것은 길이 17센티미터, 폭 10센티미터의 핑크색 편지 봉투였다.
편지를 담고 주소를 적을 수만 있으면 편지 봉투의 역할은 다하는 거라고 생각하는데 핑크에, 하트 무늬에, 입구를 봉한 것도 반짝반짝 하트 스티커라니 주제넘은 봉투다. 게다가 그걸 들고 있는 인간도 전혀 마음에 안 든다.
이럴 때는 뭐라고 말해 줘야 하는 거지?
머릿속으로 과격한 액션을 동반한 적절한 예시가 몇 가지 떠올랐지만 참기로 했다. 어쨌든 상대는 아직 어리다.
“그…… 네 마음은 고맙지만 말이다, 일단 내가 성인인 이상 받아 주는 건 미성년자보호법 위반이란다. 게다가 너는 지금 학업에 열중해야 할 아아주 중요한 시기거든. 연애는 대학 가서 해. 그리고 무엇보다 난 남자에게 관심 없…….”
“누가 아저씨 준대요!”
봉투를 내민 채로 수호 녀석이 버럭 외쳤다. 나는 사이좋게 핑크빛이 된 녀석의 얼굴과 봉투를 번갈아 보았다. 새벽 같은 아침부터 남의 작업장에 뛰어 들어와서 나를 찾더니 대뜸 핑크색 편지 봉투를 내놓고는 주는 건 또 아니라네.
“지금 나한테 주고 있잖아. 나 주는 거 아냐?”
“주, 주긴 줄 거지만 읽으라고 주는 게 아니고요! 고쳐 달라고 주는 거예요.”
뭘 고쳐요? 편지를 고쳐요? 봉투를 고쳐요? 아니, 그전에 이 편지의 어디가 고장 난 건데? 내가 보기에 고장 난 건 네 개념 쪽인 것 같다만.
유황 냄새를 풍기며 타오른 불꽃이 양초 심지에 옮겨 붙자, 과연 펄럭 옷자락 소리와 함께 여자가 도로 나타났다. 나타나더니 훅 하고 바람을 불어 촛불을 꺼 버린다.
“얼굴 보기 참 힘드네. 나는 해명…….”
소개를 하려는데, 이 여자가 다시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다. 야…….
사람이 인사를 하는데. 동방예의지국에서 목신이 인사를 안 받아? 너 어디서 배워먹은 버르장머리야, 그거?
불만과 짜증이 똬리를 틀며 기어 올라오는 것을 꾸욱 눌러 참았다.
참자. 참자. 나는 온화하고 관대한 해명 도령이다. 저 못 배워먹은 목신이 철없는 짓을 했다고 같이 화내면 지는 거다. 좋아. 한 번 더.
성냥을 그어 양초에 한 번 더 불을 붙였다. 양초 심지에서 불꽃이 오르자, 기다렸다는 듯이 여자가 나타나 다시 바람을 훅 불어 꺼 버렸다.
“잠깐 가지 말고 술이나 한 잔…….”
말을 시작하기 무섭게 그녀는 다시 사라졌다. 이것 봐라.
다시 불을 붙인다. 목신이 나타나 불을 끈다.
“술이 싫으면 차나…….”
목신이 사라진다. 다시 불을 붙인다. 목신이 나타나 불을 끈다.
“떡이나 부침개는……?”
목신이 사라진다. 다시 불을 붙인다. 목신이 나타나 불을 끈다.
“영화는 어떠…….”
목신이 사라진다. 다시 불을 붙인다. 목신이 나타나 불을 끈다.
“아 사람이 말을 하면 좀…….”
목신이 사라진다. 다시 불을 붙인다. 이런 식으로 성냥개비 숫자만큼 그녀를 불러냈지만 성냥갑이 텅 빌 때까지 목신은 불만 끄고 사라져 버렸다.
……아무래도 설화 속 해명 도령의 성격은 잘못 구전된 것 같다.
성냥개비 숫자만큼 울화가 쌓였다. 좋아. 해명 도령이고 뭐고 이렇게 되면 자비는 없다. 꽁꽁 묶어 놓고서라도 물어볼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