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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한국에세이
· ISBN : 9791188862245
· 쪽수 : 252쪽
· 출판일 : 2018-11-20
책 소개
목차
작가의 말 │7
개정판 작가의 말 │ 10
바빌론 │16
글쓰기, 라는 것의 시작 │31
애거사 크리스티와 고고학 │46
‘그들’과‘ 신들’, 그리고…… │59
그러나, 뿌리를 위하여 │73
몇 개의 순간들 │84
타인의 얼굴 │97
방앗잎, 그리고 해골에게 말 걸기 │109
서재 안의 흰고래 │121
늘어진 시계, 20센티미터의 여신 │135
기억과 기역, 미음과 미음 │149
바다 바깥 │162
발견의 편견 혹은 편견의 발견 │188
존재할 권리 │201
끝이 전해지지 않는 이야기 │212
사원과 꿈 │224
니네베 혹은 황성 옛터 │236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이 글을 쓰는 시간 동안 나는 자주 정원을 어슬렁거렸다. 정원을 다녀가는 손님들을 바라보았다. 새와 민달팽이, 지렁이와 나비와 쥐며느리, 잠자리, 그리고 바람에 실려 날아다니는 가벼운 씨앗들, 그 사이사이에 이라크에서는 전쟁이 지나갔고, 새로운 전쟁이 자살 폭탄을 등에 허리에 복부에 맨 이들에 의해 일어났으며, 전쟁이 지나간 아프가니스탄의 평원 지대에서는 양귀비꽃이 마치 붉은 양탄자처럼 불길하게 피어올랐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나는 정원을 어슬렁거리며 정원에 들른 손님들을 바라보다가 너에게 전화를 했다. 수만 리 저편의 너는 집에 없었다. 네가 집에 없었으므로 나는 기분이 좋았다. 너는 어디론가 가서 너의 현재의 시간을, 단 하나, 인간에게 주어진 살아 있는 시간을 살아가고 있을 것이므로.
누구든 잊힌다. 공룡도 그러했거니와 인간이라는 종도 언젠가는 잊음의 세계로 들어갈 것이다. 모두가 모두에게서 잊히는 것은 어두우며, 어둠은 견디기 힘들다. 우리는 잊음이라는 불길한 딱지를 지니고 이곳 지상으로 왔으나 잊음, 혹은 잊힘에 저항하는 존재도 우리가 아닌가. 공룡들은 그들의 종의 역사를 기록하지 못했으나 인간이라는 종은 아주 오래전부터 자신의 역사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잊음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역사를 기록하는 존재는 역사를 기록하지 않는 존재보다 약하다. 그 약한 존재인 나는 기록되지 않고 잊힐 폐허 도시 앞에 서 있다. 그러나 브레히트의 말대로 누가 그렇게 수없이 파괴당했던 바빌론을 다시 건설하는가.
발굴지에서 언제나 나는 냄새가 그리웠다. 코를 킁킁거리며 땅에 코를 박고 습기에 젖어 막 발굴로 거두어낸 검은 흙의 내음을 맡으면, 이 무향은 아마도 폐허를 증언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냄새라는 것은 거의 결정적으로 추억을 현재화시킨다. 냄새에 민감한 인간들이 가진 고초를 나는 짐작할 수 있다. 그들은 냄새가 환기시키는 모든 영상 앞에서 우울해하거나 즐거워하거나 가가대소하거나 혹은 고즈넉하게 삶의 한 시간을 즐기기도 한다. 냄새로 사로잡힌 삶이여, 죽은 지 오래된 인간들은 자신의 모든 냄새를 지우면서 드디어 흙으로 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