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미지

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우리나라 옛글 > 산문
· ISBN : 9791189171186
· 쪽수 : 256쪽
· 출판일 : 2019-04-22
책 소개
목차
책머리에
「운영전」과 「영영전」을 읽기 전에
「운영전」
선비 유영의 수성궁 나들이
수성궁 달밤의 기이한 만남
안평 대군과 궁녀 열 명
숨겨 둔 마음을 털어놓다
벽 틈으로 전한 편지
옥 같은 얼굴은 눈에 있는데
궁녀들의 우정
위험한 사랑
특의 흉계와 대군의 의심
들켜 버린 비밀
다음 생을 기약하며
주인 없는 수성궁에 봄빛은 옛날과 같은데
작품 해설 「운영전」 꼼꼼히 들여다보기
「영영전」
첫눈에 반하다
막동의 꾀
너무 짧았던 만남
허물어진 담장 틈으로
생이별의 슬픔
변치 않는 그리움
마침내 이룬 사랑
작품 해설 「영영전」 꼼꼼히 들여다보기 - 「운영전」과 겹쳐 읽기
해설 「운영전」과 「영영전」에 대하여
저자소개
책속에서
「운영전(雲英傳)」과 「영영전(英英傳)」을 한데 묶는다. 각각 ‘수성궁몽유록(壽聖宮夢遊錄)’, ‘상사동기(相思洞記)’라는 제목으로도 일컬어지는 두 작품은 왕족의 사적인 궁궐 안에서 생활하는 궁녀와 재주 있고 용모 준수한 선비의 사랑을 소재로 채택하고 있다. 말하자면 ‘금지된 사랑’인 셈인데, 당대 봉건사회의 제도가 쌓아 놓은 높은 장벽을 뛰어넘으려는 인물들의 투쟁이 기본 서사의 축으로 작용하게 된다.
서로 시대적 배경이나 인물의 이름을 달리하고 있기는 하나 「운영전」과 「영영전」은 위와 같이 여러 모로 공통점이 많은 작품들이다. 「운영전」의 ‘특’이나 「영영전」의 ‘막동’과 같이 꾀 많은 하인이 등장한다는 점, 「운영전」의 ‘무녀’나 「영영전」의 ‘노파’처럼 두 연인 사이의 가교(架橋) 역할을 하는 인물이 등장한다는 점도 기억해 둘 만하다.
반면 두 작품의 가장 뚜렷한 차이점은 역시 결말 구조에 있다. 「운영전」이 ‘이루지 못한 사랑’의 한스러움을 주된 정조로 한 작품이라면, 「영영전」은 금기를 뛰어넘어 결국 ‘사랑을 성취’하는 행복한 장면으로 마무리되는 작품이다.
“제 성은 김가(金哥)입니다. 열 살에 이미 시와 문장의 이치를 알아 글재주로 이름이 났습니다. 열네 살에 과거에 급제하여 그때부터는 사람들이 저를 김 진사라고 불렀지요. 하지만 어린 나이에 넘치는 혈기와 호탕한 마음을 스스로 억누르지 못했습니다. 또 그때 만난 여인과의 인연 때문에 부모님께서 물려주신 몸을 지키지 못하고 일찍 목숨을 끊어 천지간의 큰 죄인이 되었습니다. 이런 죄인의 이름을 왜 꼭 알려고 애쓰십니까?”
젊은이는 옆에 앉은 여인과 뒤에 나란히 선 시녀들을 한번 돌아보고 다시 창연한 표정을 지었다. 옛날의 일이 떠오른 것인지 여인들의 얼굴에도 슬픈 빛이 서렸다. 젊은이는 유영에게 여인들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이 여인의 이름은 운영(雲英)입니다. 저 두 여인의 이름은 녹주(緣珠)와 송옥(宋玉)입니다. 이들은 모두 옛날 안평 대군의 궁녀였습니다.”
유영은 그제야 이들이 뿜어내는 신비로운 분위기를 이해할 수 있었다. 네 사람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안평 대군의 궁녀요, 그 시대의 선비라니……. 이미 허물어졌으나 그 고색창연한 흔적마저 아름다운 수성궁처럼 이들의 옛적 사랑도 맑고 우아했을 것 같았다.
“진사께서 말씀을 꺼내시긴 했으나 여기서 멈춘다면 제겐 충분치 않습니다. 아예 처음부터 이야기를 하지 않은 것만 못합니다. 안평 대군이 활약하던 당시의 일을 소상히 알고 계시겠군요. 대군과 혹시 친분이 있으셨습니까? 그런데 진사께서는 그때의 일을 떠올리면서 왜 이리 상심하시는 겁니까? 외람되지만 그 곡절을 제가 들을 수 있겠는지요?”
진사는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돌려 운영을 바라보았다.
“해가 여러 번 바뀌어 세월이 이미 많이 흘렀는데, 그 오래 전 일을 당신은 자세히 기억할 수 있겠소?”
운영이 대답했다.
“가슴속에 깊이 맺힌 원한인데 그동안 어느 날인들 잊고 살았겠습니까? 제가 한번 이야기해 볼 터이니 낭군께서 들으시면서 기록해 주세요. 그리고 혹시 제가 빠뜨린 것이 있으면 덧붙여 주십시오.”
운영은 또 시녀에게 눈짓을 보내며 말했다.
“너는 먹을 갈아 주겠느냐?”
밤하늘에 퍼지는 나직하고도 맑은 목소리를 따라 운영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동시에 김 진사의 붓은 달빛 아래 흰 종이 위를 거침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마침내 노파와 약속했던 단옷날이 되었다. 김생은 날이 채 밝기도 전에 노파의 집으로 달려갔다. 그동안 별일 없었느냐는 인사는 하는 둥 마는 둥 다른 말을 할 겨를도 없이 다짜고짜 물었다.
“일이 어떻게 되어 가오?”
노파는 헐레벌떡 달려온 그가 우스꽝스럽기도 했지만, 어떤 장담도 할 수 없는 형편이라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어제 회산군 댁을 찾아갔습니다. 부인께 간절하게 청하였지요. 그러자 부인께서는 ‘회산군께서 평소에 영영의 바깥출입을 엄하게 금하시므로 네가 바라는 대로 해 줄 수가 없구나. 그러나 혹여 내일 조정 대신들의 초대로 나리께서 단오 모임에 가실지도 모르겠다. 그렇게만 된다면 영영에게 잠시 말미를 줄 수도 있겠다’ 하시더군요. 부인께서는 틀림없이 그렇게 말씀하셨으나, 회산군께서 외출하실지 여부는 저야 알 수가 있나요?”
김생은 반신반의하여 기뻐하기도 하고 근심하기도 하면서 좀처럼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초조하게 책상에 기대어 앉아 문을 활짝 열어 놓고 밖을 내다보며 기다렸지만, 거의 정오가 가까웠는데도 영영은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가슴이 점점 답답해지고 애가 타서 우두커니 앉아 멍하니 있노라니 김생의 몰골은 마치 서리를 맞은 파리처럼 보였다.
김생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부채로 기둥을 치면서 노파를 불러 말했다.
“근심하느라 애가 끊어지고 목을 빼고 바라보노라니 눈이 다 침침하오. 거리에는 행인들이 오고 가지만, 기다리는 영영은 아니니 내 소원은 물거품이 되는가 보오.”
노파는 혀를 끌끌 차며 김생을 달랬다.
“나리,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마음을 좀 편하게 가지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