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미지
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인문학 > 심리학/정신분석학 > 교양 심리학
· ISBN : 9791189895105
· 쪽수 : 500쪽
책 소개
목차
추천사
프롤로그
1장
2장
3장
4장
5장
6장
7장
8장
9장
10장
11장
12장
13장
14장
15장
16장
17장
18장
19장
20장
21장
22장
23장
24장
감사의 말
출간 후 이야기
출간 후 이야기 (2015년 판)
저자 인터뷰
옮긴이 후기
리뷰
책속에서
이건 극한의 두려움이나 공포보다 훨씬 더 묘사하기 어렵고 더 기괴한 경험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엄청나게 무섭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안다. 느껴본 적이 없다면 적어도 영화에서 보았거나 책에서 읽었거나 겁먹은 친구와 이야기를 나눠본 적은 있어서, 최소한 상상은 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와해'라고 부르게 된 이 일은 그런 두려움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이고 설명하기가 매우 어렵다. 의식이 서서히 응집력을 잃어간다. 한 사람의 중심이 붕괴한다. 중심이 버텨내지 못하는 것이다. '나'라는 것이 희미한 안개가 되고, 현실을 경험할 때 토대가 되는 탄탄한 중심이 질 나쁜 전파신호처럼 흩어진다. 상황을 바라보고 파악하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평가할 수 있는 견고한 전망대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을 바라보고 판단을 내리고 위험을 파악할 렌즈를 제공해 만물이 흩어지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중심부가 없어진다. 시간에서 마구잡이로 잘려 나온 순간순간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시각, 소리, 생각, 느낌이 다 제각각이다. 연속되는 순간과 순간이 의미를 구성할 수 있도록 일관적으로 시간 속에 배치하고 연결해주는 조직 원리가 사라진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슬로 모션으로 진행된다.
나는 거부했다. "사람은 자기가 열심히 노력해서 나아야지 무슨 약을 먹어서 나으려 해서는 안 돼요. 약을 먹는 건 편법이에요." 오퍼레이션 리엔트리의 상담사들이 했던 말이 커다란 놋쇠 종소리처럼 내 머릿속에서 울렸다. 너 자신을 스스로 책임져라. 내 입에 알약을 집어넣는다는 건 생각만 해도 역겨웠다. 내가 회복하려면 약이 필요할 정도로 허약한 인격의 소유자가 되었다는 생각 역시 그만큼 역겨웠다. 나는 단언했다. "나는 아픈 게 아니에요. 나쁜 거지."
그러던 어느 날 내 사고방식을, 아니 모든 것을 바꿔놓은 일이 벌어졌다.
거울 속 나를 본 것이다.
내 모습을 본 건 몇 주 만에 처음이었다. 복부를 주먹으로 세게 강타당한 느낌이 들었다. 이런, 맙소사. 저게 누구야? 나는 몹시 야위었고, 실제보다 서너 배 나이 든 사람처럼 자세는 구부정했다. 수척해진 얼굴은 음산했고 퀭한 눈에는 공포가 짙게 서려 있었다. 머리카락은 더럽고 제멋대로 뻗쳐 있었으며 옷은 구깃구깃하고 때가 잔뜩 묻어 있었다. 정신병원 뒤쪽 병동에서 오래도록 잊힌 채 살아온 미친 사람의 외양이었다.
나는 죽을까 봐 겁이 났지만, 거울에서 본 모습이 죽는 것보다 더 무서웠다. 나를 마주 보던 그 여자는 뭔가 몹시 끔찍한 곤경에 빠진 사람이었다. 나는 그 여자를 여기서 빼낼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겠다고 맹세했다.
수업 중에 내 의견을 말하는 것도 곤혹스러울 만큼 불편해했고 그래서 말을 한 적이 거의 없었다. 어느 기말시험이 끝난 후 담당 교수님이 내게 전화를 걸어 자신은 내가 누구인지 도저히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시험에서 내가 써낸 글이 가장 훌륭하다고 말했다. 과거에도 좋은 점수를 많이 받았음에도 이런 식의 평가를 받을 때마다 나는 늘 놀라움을 느꼈다. 그런 평가의 말을 머릿속에서 반복해서 재생해보고 나서야 항상 내 머릿속에서 돌아가고 있던 테이프를 끌 수 있었다. 그건 요컨대 이런 말을 하는 테이프였다. 뭔가 딱한 실수가 있었던 거겠지. 나를 다른 학생과 혼동했을 거야. 사실 내 진짜 성적은 그리 뛰어나지 않아. 모든 사람이 진실을 알아내는 건 시간 문제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