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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한국에세이
· ISBN : 9791189958152
· 쪽수 : 192쪽
· 출판일 : 2019-11-01
책 소개
목차
1부
평화 10
격포항(擊浦港)에서 18
고금도의 하관(下棺) 24
글의 눈동자 33
금오도 공무도해가 38
닭발 가지 45
바다로 가는 날개 50
2부
발바닥의 표정 58
백수해안에서 만난 우주 70
빗금의 노래 78
서울로 가는 달 84
세 가지의 고집 90
수평으로 출렁이다 98
쉼을 위한 변론 101
3부
오월의 이프 섬 108
외팔이다람쥐원숭이 116
유쾌한 사내의 죽음 122
파의 핏줄 131
학문(學文)외과 방문기 138
호접몽(胡蝶夢) 149
4부
혼자서도 잘해요 156
산책길에 호르르르 165
쇼크 178
가지의 간격 184
절친 189
붉은 산호 196
저자소개
책속에서
나는 그 여자가 내게 준 이름 석 자를
그 여자를 위해 네모 칸에 쓴 다음
서둘러 수술실로 들어가는 그녀에게
간단한 수술이라고 웃으면서 말했다
간단한 수술이라고,
잘못하면 영영 잘못될 수 있는
간단한 수술이라고
어쩌면 다시 보지 못할 수 있는
간단한 수술이라고
눈이 멀고 한쪽 몸이 마비되어
어쩌면 일어나지 못할지도 모르는
간단한 수술이라고
영원한 이별이 될 수도 있는
간단한 수술이라고
말의 머리와 몸통을 자르고
‘간단한 수술’이라는 말에만 힘을 주어
말하는 방법 밖에는 도리가 없었다
수술실 문이 열리고 닫히는 그 순간이
그녀와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길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수술실에 그녀가 들어가고 난 이후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기다리는 일 외엔 남아 있지 않았다
수술 중이란 단어가 뜬 전광판을
멍하니 바라보고 서 있는 그림자들
그 사이로 한숨과 눈물과 흐느낌이
버무려지고 있는 오후 네 시
대기실에서 중년의 한 여자가
나를 대신해서 울어주는 듯
참을 수 없는 설움 비슷한 감정이
울컥울컥 목구멍으로 올라와
노을 진 바다에서 끼룩거리는 갈매기처럼
슬픔의 무게를 더해주고 있었다
그 슬픔의 무게 속에 앉아 나는
묘한 슬픔과 위안을 얻으며
나는 울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마음은 나보다도 이미 울고 있었고
어쩌면 그 여인의 울음은 나의 것이기도 해서
나의 울음, 나의 통곡
나의 무너짐이기도 해서
가슴에서 뭔가가 치고 올라올 때마다
지금 이 시간에 할 수 있는 일이란
참아내고 기다리는 일보다는
그저 우는 것만이 최선일 것 같기도 했다
더 이상의 기다림을 참을 수 없을 때
나는 일어서서 일 층 로비로 내려가
마음의 허기를 달래 줄 뭔가를 찾다가
중독성 지닌 블랙의 검은 액체를 뽑아
목구멍으로 차갑게 한 모금 넘겼다
회전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니
햇볕은 따갑게 거리를 달구고
가로수 사이로 비둘기가 날고
현관 분수가 허공으로 솟구쳐
튀어 올랐다가 후드득 떨어지고
분수 너머로는 영업용 택시들이
손님을 태우기 위해 정지된 화면처럼
즐비하게 길가에 늘어서 있었고
기다리다 지친 택시 기사 몇몇이
문을 열고 나와 담배를 빨아댔고
니코틴 연기는 위안처럼 나에게 넘어왔다
의사 서너 명이 커피를 입에 물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지나가는 모습이
다른 세상의 일처럼 생각될 때
수술이 끝났다는 연락이 왔다
수술실에서 실려 나오는 그녀는
괴로움으로 몸을 뒤틀고 있었는데
저?뒤틀림의 고통이 날?낳았을 것이라
그리 생각하니 마음이 뭉클해졌다
이제는 뼈만 남은 저 한?여인이,
가련한 목숨의 한 가닥을 부여잡은
한 여인의 눈이 나를 바라보면서
‘내가 네 어미다.’ 말하는 것 같았다
깃털보다 가벼울 것 같은 당신이
저를 낳고 안아 길렀으며
당신의 팔과 다리가 먹이고 입혔으니
당신 앞의 내가 당신의 아들입니다
나의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다시 중환자실로 들어간 그녀를
또다시 앉아서 기다리는 시간
나는 침묵의 깊은 갱도에 빠져
빠져나오지 못하고 허우적거리며
마른 침이 고인 입을 끔벅도 못하고
의사의 부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보이지 않은, 크고 거대한
절대자의 부름을 기다리는 구도자의
심정이 되어 두 손을 모아 기도하였다
‘제발 어머니를 살려만 주세요,
그 다음은 마음대로 하세요.’
다시 대기실에서 삼십 분 정도를 기다리고
간호사에게 주의사항을 다시 듣고
다시 삼십 분을 대기실에 앉아 있었다
보호자가 중환자실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소독기에 손을 깨끗이 씻어야 한다기에
손을 씻는 그 짧은 시간에 문득
자궁 안에서 나온 나의 언어들이
너무나 더럽혀져 있다는 생각에
부끄러운 내 혀도 씻어내고 싶었다
그녀의 육체에 꽂힌 주사바늘과
매달린 링거와 침대에 매달아 놓은
왠지 낯선 산소 호흡기를 바라보며
그녀의 가녀린 숨소리를 들으니
나도 모르게 평온이 찾아왔다
‘살아줘서 고마워요.’
그녀의 가녀린 숨소리가 맥박을 되찾자
그 소리에 뼈도 살도 깃털도 섞여
머지않아 그녀가 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앞으로 다가온 경험 많은 간호사는
앞으로도 많은 고비가 있을 거라고
그녀와 나를 보며 위로하듯 말했지만
다시 그녀와 나의 내일이 시작될 것이니
그런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웃으면서
병실 밖으로 난 창밖을 바라보았다
도시의 불빛들이 어둠을 밝히며
내일을 잉태하듯이
부풀어 올랐다, 평화로웠다
강대선의 가사수필 「평화」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