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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과학 > 기초과학/교양과학
· ISBN : 9791190254427
· 쪽수 : 248쪽
· 출판일 : 2025-06-18
책 소개
‘당신은 알고 있었으면서 무엇을 했습니까?’라고 물을 때
우리가 들려줄 수 있어야 할 종류의 이야기이다.”
이것 아니면 저것을 빠르게 구분하고 선택하기를 추동하고 동원해 온
‘정상 과학’을 향한 호소이자 모든 근대적 관행을 겨냥하는 시의적 제언
2018년2월, 한 온라인 저널에 실린 이자벨 스탱게르스의 『다른 과학은 가능하다』에 대한 서평을 먼저 짧게 살펴보자. 서평가는 스탱게르스의 책이 당면한 비판으로, 미국 대학의 한 약리학과 교수가 <타임스 고등교육(Times Higher Education)>에 기고한 리뷰의 일부를 인용한다. “약리학자로서 나는, 한쪽에서 환자들이 새로운 치료제가 각종 규칙과 절차를 지켜 사용 승인이 나기를 기다리다가 죽어가는데도, 재차 과학을 느리게 하자는 주장에 열렬히 반박하고자 한다.”(2017) 서평가는 이 약리학과 교수가 책 전체를 찬찬히 읽었는지 의문시하지만 그의 이의 제기는 역설적으로 스탱게르스의 진단 중 많은 부분을 확인해주는 증거라고 서술한다. 그 약리학과 교수의 주장은 스탱게르스의 ‘다른 과학’을 오독하는 전형적인 방식에 다름 아니다. 이 책의 여섯 개 장에서 다뤄지는 주제들은 하나같이 이 같은 오해와 오독의 가능성을 노정한다. 상상력을 작동시키는 것을 철학자의 임무로 받드는 스탱게르스의 실천은 견고한 통념에 균열을 내고 경계를 교란해 어느 하나의 사실(증거)에 권위를 부여해 온 ‘빠른 과학’(혹은 ‘빠른 학문’)의 성공 방정식에서 의식적으로 벗어나는 사유 방법을 보여주려는 것으로 보인다.
빠른 과학은 과거의 영예로운 훈장일까
과학 지식을 만들어내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린다. 혼자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비단 실험적 입증이 필수적인 분야만 그런 것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탱게르스의 기본 입장을 듣고 처음에는 납득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책에서 누누이 강조되지만 빠르고 느림은 속도의 문제가 아니다. 사실상 빠른 과학을 최초로 모델링한 화학자 유스투스 폰 리비히의 사례와 저자가 말하는 느린 과학의 대비를 보아야 한다.
디드로(Diderot)와 달랑베르(d’Alembert)의 『백과전서(Encyclopaedia)』중 ‘화학’ 항목에서, 화학자 가브리엘 프랑수아 베넬(Gabriel Fran?ois Venel)은 화학을 ‘광인의’ 열정으로 묘사했다. 그는 조향사부터 금속공, 약제사에
이르기까지 화학의 여러 기예와 기법에 관련된 미묘하고 복잡하고 종종 위험한 화학적 작업들에 대한 실질적인 지식과 능력을 습득하는 데에는 평생이 걸린다고 썼다. 반면에, 리비히의 실험실에서 학생들은 4년간의 집중적인 훈련을 받으면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하지만 이들은 이러한 수많은 전통적인 기예와 기법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 대신, 정제되고 잘 식별된 반응물과 표준화된 실험 절차만을 사용했으며 최신 방법과 기술만을 배웠다. _176쪽
이런 체계를 확립한 리비히의 대학 실험실은 오늘날 대학들에서 일반적인 모델이 되었다. 어떤 창시자의 지위에 있는 그가 발명한 ‘빠른 화학’은 다른 한쪽에서 새로운 화학 산업이 창설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즉 그는 오늘날 우리가 ‘선형 모델’이라고 부르는 개념의 창시자다. 이 선형 모델은 유명한 ‘황금알을 낳는 거위’ 비유를 동반한다.
산업계가 학문 연구로부터 거리를 두고 과학계가 스스로의 질문을 결정할 수 있는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 산업계 자신에게도 최선의 이익이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오직 과학자만이 각 단계에서 어떤 질문이 유익할지, 어떤 질문이 빠른 누적적 발전으로 이어질지, 어떤 질문이 아무런 성과 없이 단순한 경험적 사실 수집으로 끝날지를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산업계가 자기만의 질문을 설정하려 든다면, 이는 곧 거위를 죽이고 알을 잃는 것과 같다. _177쪽
리비히의 시대를 뒤로 하고 시간이 지나자 빠른 과학 모델은 부메랑이 되어 돌아와 거위를 위협한 지 오래되었다. 순수과학(은 없지만 편의상 이렇게 부르겠다)과 응용과학 혹은 대학 연구실과 산업계의 선형적 관계 혹은 밀착 외에 다른 속성도 있다. 빠른 과학은 ‘지식경제’ 도래 후 ‘탁월성’에 대한 인정을 얻기 위한 경쟁이 학문적 생존의 조건이 되었고 이러한 경쟁은 일류 학술지 게재라는 희귀한 자원을 둘러싸고 이루어진다. 저자는 이 주류 학술지 출판을 통한 평가를 매우 혹평하는데, 폐쇄적일 뿐만 아니라 연쇄적인 부작용을 낳고, 궁극적으로는 이 체계가 과연 과학 자신을 위해 지속가능한가라는 근본적인 의문과 염려를 불러일으킨다.
어떻게 하면 과학의 속도를 늦출 수 있을까
그렇다면 느린 과학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프랑스어 원서의 부제는 Manifeste pour un ralentissement des sciences인데, 영어 slow의 명사형에 해당하는 ralentissement은 발생한 현상의 정적 상태(느리다)에 대한 묘사라기보다는 느려지기(감속하기), 느리게 하기에 가깝다고 한다. 하지만 가속 페달에서 발을 떼는 것은 “정직하고 훌륭한 연구자들이 동료들에게 공정하게 인정받던 다소 이상화된 과거”로의 회귀도 아니거니와 관행을 바꾼다는 것은 분명 정치적 사안임을 정확히 인식해야 한다.
스탱게르스는 빠른 과학에 대해서도 느린 과학에 대해서도 깔끔한 명제로서 정의하지 않는다. 빠른 과학은 우리가 일궈 왔고 현재 가진 것이므로 비판적으로 검토된다. 느린 과학은 가져보지 못한 것, 상상의 이미지조차 합의된 바가 없다. 대신 저자는 하나의 대비를 통해 설명을 시도하고자 들뢰즈를 예시한다.
상위 철학 학술지(일반적으로 분석철학 성향의)에서 그의 인용 횟수는 미약할 것이다. 그의 생산성에 대해 말하자면, 그는 많은 논문을 발표하지 않았고 발표한 논문의 대부분은 인정되지 않는 학술지에 실렸기 때문에 하찮게 평가될 것이다. 그의 저서 역시 인정되지 않을 텐데, ‘진짜 연구자’는 심사위원이 정한 범위 내에서 동료들을 위해 출판하기 때문에 그의 저서는 ‘평가 바깥에’ 있다. 따라서 ‘동료들에 의한’ 빠른 평가는 들뢰즈의 방식으로 철학을 하는 것을 비난한다. (…) 들뢰즈 자신에게는 ‘빠른 철학자들’의 학문적 번영은 철학의 훼손과 거의 동일하기 때문이다.
선명한 대비를 통해 손쉬운 이해를 획득하지만, ‘유능한 동료’에 의한 평가 모델은 사실상 모든 학문 분과에 걸쳐 적용되고 있다. 그럼에도 과학이 여타 학문과 확연히 다른 점은 있다. 다른 분야들은 “유능한 동료라는 개념이 학문 공동체를 하나로 묶는 데 실패”하는 데 비해 과학은 “이른바 근대과학의 참신함을 만들어내는 동료 간의 연결이라는 문제를 중심으로 과학들의 차이라는 문제를 조명한다.” 바꿔 말하면 과학에서는 “교리상의 분열”이 좀체 일어나지 않으며, 판단의 준거를 정의함에 있어 충돌은 없고, (실험적) 사실이 가치를 향해 승리를 선언할 때 사실에 대한 조직적인 반격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는 ‘다원성’의 결여로 이어진다.
느리게 하기, 되찾기, 문명화하기
스탱게르스는 과학이 동원되고 경쟁하고 벤치마크 평가에 굴복하는 등 일련의 속도전에 익숙해지면서 “저항, 마찰, 주저함 등 우리가 이 세상에서 혼자가 아님을 느끼게 만드는 것들에 대해” 둔감해져 왔다는 사실을 안타까워한다. 거듭 강조되지만 그런 이유로 빠른 과학은 단지 속도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속도를 늦춘다는 것은 다시 배울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는 것이며, 다시 사물들에 친숙해지는 것이고, 상호의존의 관계를 다시 엮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사고하고 상상하며 그 과정에서 타자들과 포획의 관계가 아닌 관계들을 만들어내는 것을 의미한다. 즉 우리 사이에서 그리고 타자와 함께, 병든 자들에게 효과적인 종류의 관계를 만들어내는 것을 의미한다. 타자와 함께, 타자로부터, 타자 덕분에 배우기 위해 서로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한 관계 속에서, 우리는 살 만한 삶이 무엇을 필요로 하며 가꾸어야 할 가치가 있는 지식이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다. _130쪽
인용문에 내포된 내용은 마치 인클로저가 무자비하게 지워버린 집단지성과 연결의 감각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느린 과학은 과학자들이 세계의 복잡한 난맥상을 온전히 감안하라는 명령어가 아니다. “과학자들이 자신들의 사고 양식이 지니는 특수성과 선택적인 성격에 대해 집단적으로 인식하고 이를 발전시키라는 도전을 직시해야 함을 의미”하며, 수련 과정에서 이러한 내용이 실현되려면 “과학자들을 문명화하는 것”이 요구된다. 근대적 기획의 문명화는 진정한 문명화가 아니었다. 스탱게르스의 문명화란 “특정 집단의 구성원들이 다른 집단의 구성원에게 모욕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즉 관계 형성을 가능하게 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다.”
저자는 흥미로운 비유로 이 관계 맺기를 설명한다. 내가(인간이) 마주 보는 엄지를 가졌다고 해서 타인에게 나를 그런 존재로 표현하는 것에 대해 우리는 거리낌이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실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과학은 입증할 수 있는 하나의 사실에 권위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영역을 공고히 하고 발전해 왔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어도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에 제약을 가한다는 것은 객관성과 합리성이라는 준거(벤치마크) 대신 지식의 부분적 특성을 인식하고 ‘관심의 문제’를 향해 열린 태도를 함양하는 것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한다.
이자벨 스탱게르스는 누구인가
스탱게르스가 한국에 이름을 처음 알린 것은 노벨화학상 수상자 일리야 프리고진과의 공동 저작 『혼돈 속의 질서』(민음사, 1997; 2011년 자유아카데미에서 『혼돈으로부터의 질서』로 재출간)을 통해서였다. 이 책과 저자를 소개하는 몇몇 자료를 살펴보면, 그는 현재 과학기술학계의 핵심적 문제의식과 연구 관심, 주요 개념을 공유하는 과학사가이자 과학철학자임을 알 수 있다. 저자의 연구 관심은 ‘코스모폴리틱스’라는 개념으로 집약되어 나타난다. 그가 오해를 무릅쓰고 다시 꺼내든 ‘가이아의 침입’이라는 화두는 우주지정학으로 풀어서 표현할 수 있는 코스모폴리틱스를 ‘위치짓는’ 중요성을 갖는다. 또한 화상 미팅을 통해 그를 만난 인터뷰 전문 온라인 매체에는 과학기술학자 브뤼노 라투르와의 지적 교유를 짐작할 만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 흥미롭다. 라투르가 그를 최고의 학자(ultimate master)로 꼽으며 글에 대해 논박하면서 자신을 울게 할 수 있는 “그 채찍이 두려운 유일한 사람”으로 표현했다는 것이다. 과학기술학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어 가는 지금, 세 학자의 학문적 영향 관계가 이 책의 번역을 계기로 한국 과학기술학계의 연구를 통해 대중적으로 알려지길 기대해본다.
목차
1장 과학에 대한 대중지성을 향하여
‘대중’이 과학을 ‘이해’해야 하는가?
대중은 무엇을 이해해야 하는가?
과학에는 감식가가 필요하다
선한 의지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시험대에 놓인 과학
불편한 진실
의심의 상인들에게 저항하기
2장 올바른 자질을 갖춘 연구자들
젠더와 과학
진정한 연구자들
진정한 연구자의 구성
동원 해제?
3장 과학과 가치: 어떻게 하면 속도를 늦출 수 있을까?
평가의 지배 속에서
동료는 누구인가?
‘과학’, 용해되어야 할 결합물
대비
공생
속도를 늦추기…
4장 루드비크 플렉, 토머스 쿤 그리고 과학을 느리게 하는 과제
5장 ‘다른 과학은 가능하다!’ 느린 과학을 위한 호소
6장 코스모폴리틱스: 근대적 실천을 문명화하기
보장의 부재
정치생태학
정치를 문명화하기
옮긴이 후기
책속에서
‘관심의 문제’에서 핵심적인 것은, 단 하나의 ‘정답’이 있다는 생각을 버리고 대신 주저하고 집중하면서 세심하게 조사하는 과정이 불가피하게끔 종종 어려운 선택지를 더하는 데에 있다. 시간을 금으로 여기고, 금지되지 않은 모든 것을 허용하라고 요구하는 기업가들의 불평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게다가 과학적 전문성과 결탁한 선전은 너무도 자주 어떤 혁신을 ‘과학의 이름으로’ 올바른 ‘하나의’ 해결책으로 제시하곤 한다. 이런 이유로 나는 이해라는 개념을 대신하여 과학에 대한 ‘대중지성(public intelligence)’을 제안하고자 하는데, 이는 과학의 결과물뿐 아니라 과학자 당사자들과도 지성적인 관계를 창조하는 것을 포함한다. _1장 과학에 대한 대중지성을 향하여
오늘날 이 행렬은 이전의 웅장함을 대부분 잃어버려 다소 초라하고 불안해 보이지만, 울프가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그 질문에 대해 잠시라도 생각할 시간을 갖자고 주장하는 여성들과 남성들을 여전히 배제하고 있다. 울프는 모든 시대와 장소에서 “우리가 속한 이 ‘문명’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하기를 결코 멈추지 말자”라고 썼다. 그리고 이 물음을 확장하면, 다음 질문으로 이어진다. 탁월성이라는 이름하에 파괴되고 있는 이 학문 세계는 무엇인가? 우리는 실제로 과거로 무너져 내리고 있는 세계에 대한 향수라는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생각해야만 한다. _2장 올바른 자질을 갖춘 연구자들
내가 여기서 보여주려는 것은 이러한 모델이 ‘빠른’ 과학을 위해 고안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과학에서는 유능한 동료들에게만 전달되는 지식의 누적적 생산과 ‘통속화된(vulgarised)’ 형태의 지식이 엄격히 구분된다. 이와 함께, 나는 과학의 속도를 늦출 것을 호소하고 싶다. 이는 정직하고 훌륭한 연구자들이 동료들에게 공정하게 인정받던 다소 이상화된 과거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는 과학의 다원성을 적극적으로 고려하는 것이어야 하며, 서로 다른 유형의 연구에 적합한 평가 및 가치화의 방식에 대한 다원적이고 협상적이고 실용적인(즉 그 효과에 따라 평가되는) 정의에 대한 논의가 함께 이뤄져야 한다. _3장 과학과 가치: 어떻게 하면 속도를 늦출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