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미지

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91190885560
· 쪽수 : 388쪽
· 출판일 : 2021-01-22
책 소개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50년대 초, 내가 결혼해서 시집살이를 한 동네는 좁고 꼬불탕한 골목 안에 작은 조선 기와집들이 처마를 맞대고 붙어 있는 오래된 동네였다. 특별히 가난할 것도 넉넉할 것도 없는 평범한 주택가였지만 전쟁이 막 끝난 때니만큼 사는 모습들은 제각기 치열하고도 남루했다. 출구가 보이지 않고, 막무가내로 답답하기만 한 시절, 어느 날 우리 집에서 멀지 않은 한 동네 낡은 조선 기와집에 ‘現代文學社’란 간판이 붙었다. 워낙 살기가 어려울 때라 살림집도 길목만 좋으면 한쪽 벽을 헐고 구멍가게를 내는 일이 흔했다. 그런 동네 구멍가게와 다름없는 집에 그 간판이 붙자 그 집뿐 아니라 그 골목까지 갑자기 찬란해졌다. 그 남루하고 척박한 시대에도 문학이 있다는 게 그렇게 내 가슴을 울렁거리게 했다.
한길에서 그 집을 들여다보면 대문이 보이지 않고 고궁에서나 볼 수 있는 홍예문이 보였다. 홍예문은 사랑마당으로 통하는 문이었고 안채로 통하는 대문은 홍예문이 달린 담장과 기역 자로 꺾인 곳에 달려 있었다. 난 왠지 문지방이 돌로 된 위압적인 솟을대문보다는 단아하고 고풍스러운 홍예문에 더 압도당하고 있었다. 추녀를 나란히 한 고만고만한 조선 기와집하고는 격이 달라 보였다. 마침 짐을 나르던 청년이 우리 곁에서 머뭇대며 아는 척을 하고 싶어 하는 눈치를 보이자 노마님이 우리 막내라고 인사를 시켰다. 서글서글한 미남이었다.
나의 모멸감을 아는지 모르는지 박수무당은 둘둘 만 다섯 개의 깃대를 내 앞으로 들이댔다. 영문을 몰라 뒷걸음질을 치는 나에게 시어머니가 우리 새아기는 이렇게 아무것도 모른답니다, 하면서 나에게 깃대를 하나 뽑으라고 일러주었다. 나는 둘둘 만 깃발 쪽은 자기 겨드랑이에 끼고 내민 대 중에서 하나를 뽑았다. 면할 길이 없다고 체념한 뒤였지만 까닭 없이 떨렸다. 펄렁하고 남색 깃발이 딸려 나왔다. 시어머니 안색이 굳어졌다. 좋은 징조는 아닌가 보다. 박수무당도 고개를 갸우뚱하고 나서 한 번 더 뽑으라는 시늉을 했다. 나도 까닭 없이 긴장해서 단박에 뽑지 않고 호흡을 가다듬으면서 신중하게 두 번째 기를 뽑았다. 이번에는 초록색이었다. 그것도 길한 색은 아니란 걸 나는 눈치로 알아차렸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떤 색 깃발이 나와야 좋은지 아는 바 없이도 불길한 색깔만 뽑았다는 건 기분 나쁜 일이었다. 나는 잘못한 거 없이도 허물을 뒤집어쓸 수 있다는 미신의 힘에 공포를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