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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한국사 일반
· ISBN : 9791190908788
· 쪽수 : 288쪽
책 소개
목차
프롤로그 : 대논쟁, 역사를 읽는 새로운 접근법
1장 항전이냐 항복이냐
: 위만조선의 운명을 건 토착 세력과 이주민의 논쟁
유목민족과 중국의 시소게임 | 16세 황제, 위만조선을 침공하다 | 토착 귀족, 위씨 왕실에 반기를 들다 | 1이 아니라 3분의 1 | 삼한이 다스리는 삼신의 나라 | 투항이냐 항전이냐, 위만조선의 분열 | 순체가 촉발시킨 대논쟁
2장 신선교냐 불교냐
: 신라의 위기 탈출을 도운 사상 논쟁
고조선에서 고구려로 계승된 신선교 | 고구려의 전략 수정과 신라의 위기 | 하늘의 뜻으로 다스려진 고대국가 | 불교, 기적 대신 정치를 불러오다 | 신라는 왜 불교 공인에 늦었나? | 법흥왕과 이사부의 대논쟁 | 사상 개조로 통일의 기반을 닦다
3장 서진이냐 남진이냐
: 고구려의 대외 팽창을 둘러싼 논쟁
5호 16국 시대의 개막과 한반도의 팽창 | 장수태왕의 결단 | 동아시아 최강 수나라의 굴욕 | 뒤바뀐 승자와 패자 | 을지문덕은 왜 역사에서 갑자기 사라졌을까? | 고구려를 휩쓸고 간 대논쟁 | 당나라, 야욕을 드러내다 | 당태종에게 선전포고한 고구려 관원 해라장 | 연개소문, 서쪽으로 방향을 틀다
4장 혈통이냐 실력이냐
: 고려 지배 세력의 성격을 뒤바꾼 논쟁
개천에서 용 나는 나라 | 혈통이 지배한 종전의 관료 선발 방식 | 주름살 임금 혜종과 고려 초의 혼란 | 호족의 나라 고려 | 조심스러운 광종 | 군주의 사람을 뽑다 | 동아시아 정세와의 연동 | “신이 사는 집이 좀 넓으니 바치고자 합니다” | 피의 숙청 | 무사 중심 사회에서 문신 위주의 사회로
5장 대륙이냐 반도냐
: 조선사상 일천년래 제일대사건
“민족의 성쇠는 사상의 추세가 어떠한가에 달려 있다!” | 9~12시 국가에서 0~3시 국가로 | 김함보·권행 부자의 엇갈린 운명 | 동북 9성의 반환과 여진족의 최강자 등극 | 옛 하인의 출세에 자극받은 평양 사람들 | 이자겸의 쿠데타와 인종의 반격 | “서경으로 천도하면 36개국이 고개를 숙입니다!” | 묘청, 술법을 부리다 | 조선 사상 일천년래 제일대논쟁 | 불운과 조급성이 가져온 실패 | 그 후 천년에 끼친 영향
6장 이냐 기냐
: 생각하는 지배층의 세상을 연 철학 논쟁
사림파의 의외성 | 역사를 남긴 사람들 | 보이는 지배층과 보이지 않는 지배층 | 고려 향리, 사림의 근간을 이루다 | 사림파가 집권하기까지 | 생각하는 지배층, 철인정치를 구현하다 | 이와 기로 우주 만물을 해석한 이기론 논쟁 | “외척이 원흉의 문객보다는 낫지 않은가?”
7장 3년이냐 1년이냐
: 왕과 신하, 권력의 주도권을 둘러싼 상복 논쟁
사림파의 분열과 반전의 세력 다툼 | 인조와 소현세자의 갈등 | 효종과 송시열의 독대 | 효종의 죽음과 상복 논쟁의 시작 | “첫째 아들이 죽으면 둘째 아들을 세워 장자라 한다” | 송시열의 반격과 4종설 | 허목과 윤선도, 꺼져가던 논쟁에 불을 지피다 | 서인의 오류가 불러온 2차 예송 | 51년 만의 정권교체 | 근기 남인의 등장과 달라진 정치 지형 | 예송이 바꾼 역사의 흐름
8장 동양이냐 서양이냐
: 자주독립의 방향을 둘러싼 논쟁
서세동점의 전야 | 위정척사파의 두각, 서양은 기氣다 | 최익현, 실천하는 지식인 | 새로운 조일 관계의 수립과 경제 자주 | “러시아나 미국이나 일본이나 다 똑같은 오랑캐입니다” | 허수아비 임금의 권력 의지 | 신기선과 동도서기론 | 법을 바꿔 스스로를 굳건히 한다 |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의 한끗 | 정변 세력의 지향점, 변법 | 변법자강을 향한 마지막 기회, 독립협회
9장 찬탁이냐 반탁이냐
: 민족 통합을 가로막은 끝나지 않은 논쟁
아직 우리는 신탁통치 논쟁의 그늘 아래 있다 | “부드럽게 말하되 큰 곤봉을 휴대하면 성공할 것이다” | 우드로 윌슨과 민족자결주의 |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과 그 한계 | 운명의 모스크바삼상회의 | 오보인가, 가짜 뉴스인가? | 맥아더의 의도대로 되다
에필로그 : 한국사 대논쟁의 패턴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특정 시기에 대논쟁이 발생했다는 것은 그간 축적된 모순이나 문제점이 그 시점에 이르러 극도의 단계에 도달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대논쟁은 사회 변화의 흐름을 파악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대논쟁이 벌어지면 사회는 어떤 형태로든 변모한다. 논쟁의 승자를 중심으로 사회질서나 사회구조가 바뀐다. 그렇기 때문에 대논쟁을 기준으로 역사를 살펴보는 방식은 왕조 교체를 기준으로 역사를 공부할 때에 접할 수 없었던 새로운 통찰력을 선사한다. _ <프롤로그> 중에서
당시 신라에는 두 개의 정치세력이 대립했다. 하나는 법흥왕을 지지하는 쪽이고, 또 하나는 이사부異斯夫를 지지하는 쪽이었다. 내물왕의 4대손으로 법흥왕과 항렬이 같은 이사부는 우산국을 신라에 편입시킨 주역이다. 이사부는 기존 신선교 세력의 수장으로, 소국의 이해관계를 대표하는 쪽이었다. 반면 법흥왕은 신흥 종교인 불교 세력을 이끌었다. 그는 당연히 왕실의 이익을 대변하는 쪽이었다. … 양자의 대결에 종지부를 찍은 이차돈은 아진종의 손자이자 길승의 아들이다. 부계 기준으로 이사부의 조카가 된다. 이차돈은 혈연적으로 는 이사부와 가깝지만 정치적으로는 법흥왕과 가까웠다. 이 점이 이 시대에 벌어진 대논쟁의 판세를 가름하는 뜻밖의 변수로 작용했다. _ <2장 신선교냐 불교냐> 중에서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승리한 고구려는 가만히 있는데, 패배한 수나라가 계속해서 도발해 왔다. 제1차 침공에서 나라가 휘청거릴 정도의 타격을 입은 수나라가 거듭 재침을 시도한 것이다. 반격을 해도 시원찮을 고구려는 몸을 웅크리고, 수비에만 진력해도 모자랄 수나라가 도리어 대드는 기현상이 계속됐다. 더 이상한 일은 살수대첩의 전쟁 영웅인 을지문덕이 역사 기록에서 갑자기 사라졌다는 점이다. 그에 대한 기록은 살수대첩 이듬해부터 나타나지 않는다. 사건을 연대순으로 정리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는 살수대첩 이후의 을지문덕이 어떻게 됐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살수대첩에서 그에 관한 기록이 멈춘 것이다. 그의 생애를 더 자세히 다룬 《삼국사기》 <을지문덕열전>에도 살수대첩 이후의 행적에 관한 기록은 없다. 수나라 군대를 꺾고 동아시아 최고의 명장 반열에 오른 인물이 갑자기 역사 기록에서 사라진 것이다. _ <3장 서진이냐 남진이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