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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의 재산

친일파의 재산

(친일이라는 이름 뒤의 ‘돈’과 ‘땅’, 그들은 과연 자산을 얼마나 불렸을까)

김종성 (지은이)
북피움
2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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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의 재산
eBook 미리보기

책 정보

· 제목 : 친일파의 재산 (친일이라는 이름 뒤의 ‘돈’과 ‘땅’, 그들은 과연 자산을 얼마나 불렸을까)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한국근현대사 > 근대개화기
· ISBN : 9791198762931
· 쪽수 : 276쪽
· 출판일 : 2024-08-15

책 소개

‘친일파’. 태어난 지 100년도 넘은 이 단어는 익숙하지만 언제 들어도 불편하다. 정확한 학술적 개념까지도 필요없이, 상식적으로 친일파란 ‘일제강점기에 일본에 빌붙어 호의호식하면서 식민지 조선의 대중을 피 빨아먹고 살았던 부역자들’을 통틀어 부르는 말인데, 그들은 왜 친일을 했을까? ‘친일파’들은 ‘부득이하게 친일을 했다’고 변명하곤 한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새빨간 거짓말인지를 『친일파의 재산』은 낱낱이 알려준다.

목차

머리말 - ‘친일’이라는 이름 뒤의 ‘이득’과 ‘소득’

01. 임금의 형, 나라 팔아 이완용보다 5배 더 받았다
- 백성들을 넘긴 대가로 83만 원이라는 거액의 국채증서를 받은 이재면
02. “‘만세’가 아니라 ‘반자이’라 불렀나이다”
- 일왕 생일 파티에서 ‘만세’를 외친 이재극의 황당한 변명
03. “새야 새야 녹두새야, 박으로 너를 치자”
- 동학혁명을 진압하고 ‘을사오적’에 ‘경술국적’까지, ‘친일 2관왕’ 박제순
04. 매국의 아이콘, 경성 최대의 현금 부호가 되다
- 1925년 한국인 부자 2위로 기록된 이완용
05. 그 남자의 ‘통 큰’ 친일 재테크, 일제의 산림 착취는 ‘투자 찬스’였다
- 동척 감사, 조선산림회 임원으로 조선 수탈의 앞잡이 노릇을 한 조진태
06. 완용과 윤용, 의붓 형제는 ‘친일’도 경쟁했다?
- 이완용에 이어 두 번째로 일제의 훈장을 많이 받은 이윤용
07. 신선한 생선은 황후에게, 죽은 황후의 유품은 황제에게
- 아부와 처세술로 일관한 을사오적 이근택의 일생
08. ‘을사오적’의 부인은 왜 혀가 깨물렸나
- 고종 황제의 5촌 조카인 황족 이지용의 도박 중독과 파탄 난 개인사
09. 도박으로 알거지가 된 친일 귀족의 초상
- 줄소송, 작위 박탈, 파산으로 이어지는 조민희의 몰락사
10. 조선의 금을 일본으로 밀반출한 ‘쩐의 전쟁’ 뒤의 남자
- 일제의 금융침략을 도운 친일파 김종한
11. ‘후작’ 박영효, ‘백작’ 이완용보다 많이 받아먹었다
- 일본이 이완용보다 쓰임새를 높이 평가했던 박영효
12. 칼을 뽑아 고종을 위협하다
- 대한제국 군대 해산을 주도하고 의병운동을 진압한 친일 군인 이병무
13. 황족 여성이 받는 훈장을 첩이 받았던 이유는?
- 한국인 지주들의 땅을 강탈하는 데 ‘조폭’ 역할도 마다않은 박의병
14. 일본에 대한 충성이 부동산으로 돌아오다
- 홋카이도에 560만 평의 땅을 소유했던 송병준
15. 일본의 충견, 한국인을 향해 총을 쏘다
- ‘이토 히로부미 키즈’로 의병운동과 3.1운동 진압에 동원된 헌병보조원 조성엽
16. 조선총독부가 조선귀족들에게 공짜 일본 관광을 시켜준 이유는?
- 작위, 술병, 은사공채도 받고 일왕의 “끔찍한 총애”도 받은 이기용
17. 조봉암, 박헌영, 안창호를 체포한 악독한 친일 경찰
- 반민특위에서 유일하게 사형선고를 받은 김덕기
18. 일제의 떡고물이 참 좋았던, 어느 친일파의 50년
- 일본이 굳이 권하지 않았지만 자청해서 친일을 한 박영철
19. 고급 밀정의 절규, “조선총독부는 내 돈 내놔라!”
- 시베리아, 사할린, 도쿄를 무대로 오로지 돈을 위해 친일을 한 박병일
20. 친일 조폭, 일본 국회의원까지 해먹다
- 깡패에서 기업인으로, 반일운동·농민운동·노동운동을 탄압한 박춘금
21. 교회의 종을 일본에 바치다
- 예수를 팔아치운 ‘친일 목사’ 김응순
22. 오늘은 또 누구의 초상집을 찾아가볼까
- 도쿄에서 열린 이토 히로부미의 장례식에도 참석한 ‘경술국적’ 민병석
23. 충남 갑부의 스케일, 뇌물은 순금으로?· 207
- 단군 할아버지를 팔아 친일한 김갑순의 이상한 행운 뒤의 검은 거래
24. ‘고문왕’, 독립투사들을 사냥하고 살해하다
- 총독에게 수류탄을 던진 강우규 선생을 체포해 승승장구한 친일 경찰 김태석
25. 이토 히로부미가 총애한, 못 말리는 친일파
- ‘친일파 거두’이자 ‘반민 거물’이었던 박중양과 대구 동성로의 비밀
26. 공자님을 팔아 친일한, ‘좀 더 높이 나는 친일파’
- 학벌도 문벌도 없지만 ‘대일 충성도’는 최고였던 박상준
27. 독립투사를 죽여 압록강 얼음물에 던진 잔혹함
- 임시정부가 반드시 처단해야 할 인물로 지목한 ‘공작 수사의 달인’ 김극일
28. 고종의 러시아 망명을 일러바친 이토 히로부미의 ‘요녀’
- 친일이 ‘수지맞는 장사’였던 일본의 비밀 첩자 배정자
29. 식민지 조선 1호 부자, A급 전범 기시 노부스케를 돌보다
- 화신백화점 사장 박흥식의 용서받지 못할 과거
30. 심청이 공양미의 10배나 되는 쌀을 거둬들이다
- 하동군수 이항녕의 공출미 3,000석 수탈 대작전

참고문헌 및 참고자료

저자소개

김종성 (지은이)    정보 더보기
성균관대학교 한국철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교 사학과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월간 「말」 동북아 전문기자와 중국사회과학원 근대사연구소 방문학자로 활동했으며, 문화재청 산하 한국문화재재단이 운영하는 <문화유산채널>(구 <헤리티지채널>)의 자문위원과 심사위원으로 활동한 바 있다. <문화유산채널>에 명사 칼럼을, 「민족 21」과 웅진씽크빅의 「생각쟁이」에 역사 기고문을 연재했으며, 「오마이뉴스」에 <김종성의 히,스토리>, <김종성의 사극으로 역사읽기> 등을 비롯한 여러 개의 시리즈를 연재 중이다. 삼성경제연구소 Seri CEO에서 기업인들에게 한국사를, 삼성인력개발원에서 외부강사로 삼성 신입사원들에게 역사를 강의했고 기독교방송(CBS), 교통방송(TBS), 불교방송(BBS) 등 여러 방송의 역사 코너에도 고정 출연했다. 지금은 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대논쟁 한국사』, 반일 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 『나는 세종이다』, 『역사 추리 조선사』, 『당쟁의 한국사』, 『패권 쟁탈의 한국사』, 『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조선 노비들』, 『왕의 여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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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이완용이 매국의 대가로 재산을 축적하는 모습은 ‘알뜰살뜰’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만든다. 일거수일투족이 역사에 기록될 위치에 있었던 사람치고는 ‘명분’보다 ‘수입’을 상당히 우선시했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그는 자신이 무너트린 대한제국 관직을 그만둘 때 퇴직금도 따박따박 챙겨갔다.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 멸망을 전후해 잔무를 처리해준 것에 대한 대가 역시 수령해갔다. 그는 (1910년) 10월 3일 퇴직금으로 1,458원 33전을 받았고, 합병 전후 3일간(28일~30일)의 잔무처리수당으로 60원도 받아 챙겼다.
국권 침탈의 잔무를 사흘간 처리해준 대가로 군수 월급 수준의 수당을 받아 간 것이다. 자신의 조국인 대한제국을 멸망시킨 것에 대한 미안함이나 회한 따위는 손톱만큼도 없었던 것이다.
매국노라는 이유로 그 전해 겨울인 1909년 12월에 가톨릭 성당 앞에서 저승 문턱까지 갔다가 겨우 돌아온 그였다. 그런 일까지 겪은 사람이 바로 그 이듬해 여름에 대한제국 퇴직금을 수령하고 사흘치 잔무처리수당까지 받아 갔다. 훗날의 역사적 평가에 개의치 않는 파렴치한 삶을 살았던 것이다.
퇴직금에 잔무수당까지 ‘알뜰살뜰’ 모은 결과, 이완용은 식민지 한국인 중에서 1, 2위를 다투는 갑부 반열에 올랐다. 김윤희 교수의 『이완용 평전』에 따르면 그는 68세에 죽었는데 죽기 1년 전인 1925년에는 친일파 민영휘에 이어 한국인 부자 2위로 기록됐다. 현금 보유액은 그가 최고였다. ‘경성 최대의 현금 부호’라는 말이 있었을 정도다.
(<이완용> 편에서)


이지용은 친일 중독자인 동시에 도박 중독자였다. 이 점은 친일 귀족 상당수에게 나타나는 공통점이다. 도박으로 인해 몰락 직전에 내몰린 친일파들을 위해 일제는 1929년에 창복회(昌福會)라는 구제단체까지 만들었다.
“한일합병 이후에는 날마다 도박으로 소일하며 밤을 지샜다. …… 이지용이 소유하고 있던 한강변 언덕 위의 우람하게 솟은 양옥집은 도박으로 날려 이미 남의 손에 넘어갔고, 중부 사동(寺洞)의 자택은 완전히 도박장이 되었다. 도박장에 던져지는 돈은 매일 5, 6만 원 이하로 내려가지 않았는데, 이지용은 11만 원을 한꺼번에 던지기도 하였다.”
이지용은 나라를 판 대가로 일본 백작이 되면서 10만 원을 받았다. 그런 사람이 하룻밤 도박에 11만 원을 쓰곤 했다. 나라 판 돈을 하룻밤에 탕진하곤 했던 셈이다. 1912년 12월에는 도박죄로 검거되어 2월에 태형 100대를 선고받았고 3월에는 중추원 고문에서 해임되었다. 이로써 13년의 공백기가 설명된다. 도박죄로 커다란 물의를 일으키는 바람에 13년간 중추원 연봉을 받지 못했던 것이다.
(<이지용> 편에서)


일본은 박영효를 우호적 인물로 평가했다. 이완용 때문에 잠시 ‘탈선’했던 그를 관대하게 대했다. 일본은 그의 위상을 이완용보다 높게 설정했다. 1910년 한국 강점 뒤에 이완용에게는 백작 작위를 줬다가 1920년에 후작으로 높인 데 비해, 박영효에게는 처음부터 후작 작위를 부여했다. 또 1911년에 이완용에게는 은사공채 15만 원어치를 준 데 비해, 박영효에게는 28만 원어치를 줬다. 이들은 은행에 예금되는 이 돈의 이자를 받아 곳간에 채웠다. 1910년부터 1921년까지 평안도와 경기도에서 군수로 부역한 친일파 김연상(1878~1924)이 1910년에 받은 월급은 50원이다. 이완용에게는 이 월급의 3,000배, 박영효에게는 5,600배가 일왕 하사금으로 주어졌던 것이다.
일본이 볼 때 한국 강점 이전에는 이완용이 더 필요했다. 하지만 그 후에는 박영효가 더 필요했다. 대한제국을 헐값에 넘겨받는 데는 매국노 이완용의 역할이 절실했지만, 일단 넘겨받은 뒤에는 한국의 민심을 억누르는 게 급선무였다. 왕실 일원인 박영효가 자신들을 지지한다는 사실을 선전하는 것이 일본에 더 유용했다.
(<박영효> 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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