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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91191192537
· 쪽수 : 448쪽
책 소개
목차
서교동에서 죽다 /413
발문 /418
작가의 말 /438
저자소개
책속에서
광복절에도 나는 아침부터 자전거를 끌고 나갔다. 날은 무더웠고, 골목엔 아무도 없었다. 늘 하던 대로 홍익대학교의 정문 앞 공터—라고 하기에는 조금 어색하지만, 아무튼 우리는 그렇게 불렀다—까지 올라갔다.
지난 며칠 동안은 육영수 여사의 국장 기간이라 줄곧 장송곡만 나왔는데, 오늘 처음으로 원래의 프로그램으로 돌아간 거였다. 육영수 여사는 광복절이었던 며칠 전, 재완이와 성민에게 바람맞은 내가 버스의 뒤꽁무니에 붙어서 여의도로 들어가던 그 시간쯤에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문세광의 총에 맞았다. 성미산 언덕에서 돌아오는 길에 본, 전파상 앞에 몰려 서 있던 사람들이 그래서였다.
우리가 버스의 종점에서 내려서 향한 곳은 시장으로 통하는 길목에 있는 상가였다. 상가라고는 하지만 제각각의 모양으로 납작하게 엎드려서 나란히 늘어서 있는 건물들에 허름한 문방구와 약국, 철물점, 이발소, 전파상 따위의 업소들이 계통 없이 들어서 있었고, 그 끄트머리에 약간의 사과와 귤 따위 과일을 얹은 좌대를 앞에 내놓은 식품점이 하나 있고 그 뒤로는 본격적으로 시장 골목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시장을 지나면 주택가가 펼쳐졌다. 그러니까 크고 작은 차들이 빠르게 다니는 도시의 길과 안온하게 엎드려 있는 집들 사이의 완충지대로 시장이 있었고, 그 허름하고 짧은 상가는 큰길을 달리는 금속성의 차갑고 사납고 빠른 것들과 한자리에 쪼그려 앉아 있는 상인들, 그들이 다루는 생선이며 야채, 과일 같은 부드러운 질감의 물건들, 여기저기서 흐르는 물 때문에 항상 질척한 바닥, 그리고 그 사이를 돌아다니며 장을 보는 사람들 같은 느리고 부드러운 존재들로 채워진 시장통 사이의 기압 차를 해소해주는 역할을 하는 셈이었다. 사람들은 아침이면 이 짧은 상가 골목을 지나 세상으로 나가고, 저녁이면 그보다 조금 느려진 걸음으로 집으로 돌아올 것이었다. 그러니 이 상가에 있는 상점들은 좋게 말하면 통행인이 많은, 소위 ‘목’이 좋은 자리에 위치한 셈이었지만, 달리 보자면 주택가로부터 시장을 사이에 두고 격리돼 있어서 단골보다는 지나는 길에 들르는 뜨내기손님들을 주로 상대하게 된다는 문제가 있었다.
아버지 역시 이런 걸 읽어내고 있었던 걸까? 읽어내는 행위 이상의 의미는 전혀 없는걸? 공간만 충분하다면 무한히 이어질 장식적인 마름모들의 연쇄로 이어진 우주에서 단 몇 개, 아버지는 그것들을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면서 지냈다. 그것들은 어쩌면 아버지를 기억 속으로 이끌어 갈 아버지만의 마들렌이었을 수도 있고, 아버지가 가보고 싶었으나 일찌감치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 기르느라 그럴 기회가 없었던 토끼굴로 들어가는 입구였을 수도 있겠다. 당신을 가둬놓고 있는 수많은 창살들이었을 수도 있겠고. 그러나 그걸 누가 알겠는가.
나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선 채로 방안 풍경을 감상했다. 앉아서 무언가를 쓰고 있는 아버지, 방안 가득 펼쳐져 있는 우표들과 그걸 정리하고 있는 진수. 그렇게 서서 보고 있는 동안, 그런 모습을 내가 얼마나 그리워하고 있었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얼마나 그리웠는지, 눈앞에서 보고 있는 동안에도 그리웠다.
노래를 들으면서, 그리고 노래가 다 끝나고 나서도, 나는 어둠 속에 앉아 바깥에 내리는 밤눈을 보면서 까마득한 먼 데와, 내가 묻어놓고 온 옛 얘기들에 대해 생각했다. 생각 속의 세계는 처음에는 내가 살던 골목과 그곳에서 내가 겪었던 일들이었지만, 곧이어 내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들 속으로 뻗어갔다. 그 밤, 어둠 속에 앉아 음악을 들으면서 나는 아직 가보지 않은 그곳에 이미 가본 것 같았고, 해보지 않은 모든 일들을 이미 오래전에 해본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그리워졌다. 더없이 외로웠고, 이미 오랜 세월을 산 것 같은 기분이었다.
『서교동에서 죽다』의 회상과 묘사는 이 일회성과의 가망 없는 싸움 끝에 조금씩 풀려나오고 있다. 모르긴 해도, 소설에서 거듭 이야기되는 소년의 알지 못할 ‘서러움’과 정체 모를 ‘그리움’의 실을 따라가면 그 끝에는 회상하는 ‘나’의 이 가망 없는 싸움이 있지 않을까. 그 실패의 잔해들이 만들어내는 막막한 울림이 이 소설을 아리게 따라가게 만드는 힘의 정체인지도 모른다. -발문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