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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시 > 한국시
· ISBN : 9791191262490
· 쪽수 : 144쪽
· 출판일 : 2021-07-05
책 소개
목차
1부 오래 병에 정들다 보니
허기 충전
격자의 창틀 아래서
깎인 것에 대하여
점박이꽃
개의 표정
자운영 꽃밭
딱따구리 소리는 날 멈춰 세우고
물의 설법
오래 병에 정들다 보니
추석날 아침
빗방울에 대하여
덜어 낸다는 말
2부 물들고 터지고 빛나는
소매치기
만년필
적멸을 위하여
못,에 대하여
우루무치의 낙타
예감
시간 도둑
왕의 말씀
네 채의 집
말라 가는 벤자민 화분 곁에서
나무들의 묵시록
벚이라고 하고 벗이라고도 하는
사월의 혼례
3부 투명한 심장들이 안쓰러워
꽃 피는 소리
물방울 속으로
시
나와 고양이와 소녀 이야기
느티나무 화초장
어떤 산수화
이슬
빠지는 발톱의 말
저 꿀벌의 생
살쾡이와 다람쥐
외로운 개화
우연이라는 말
거미집
4부 내 몸에도 흐르는 살별들
오늘 내게 제일 힘든 일은
우화등선
수박
거룩한 허기
물벽
거미
숲의 제왕
정낭 개구리한테 불알 물린 이야기
경계
메추라기
팔공산 사내 이야기
단풍
그 눈들을 밤의 창이라 부르겠다
해설
공감 왕국의 대령숙수
-이숭원(문학평론가)
저자소개
책속에서
수년째 성업 중인,
그 묘한 허기가 떠오를 때마다 가는
밥집이 내 일터 가까운 곳에 있다
‘허기 충전’이란 상호를 내건
저 카운터의 흰머리 사낸 알고 있다는 걸까
한 끼의 식사 같은 거로는
원기가 충전되지 않는다는 걸
아니 충전된 허기가 더 검게 빛난다는 걸
밤새 달빛이 어루만지다 간 알 같은
부화를 기다리는
둥근 지붕의 저 식당에는
아닌 게 아니라
펄럭이던 검정 비닐에 구멍 뚫어
마늘을 심던 벌건 얼굴들의 담배 연기와
인근 공사장 인부들 발꼬랑내 나는 군화와
막걸릴 마시다 시비가 붙어
막 씩씩거리는 짧은 머리의 롱 패딩들
허기의 사촌쯤인 불만과
불만의 양아들뻘인 분노와 상처들이
연탄난로 위 주전자가 흘린 물방울처럼
따그르르, 츠잇츠잇 굴러다닌다
삶에 대한 계획 같은 건 아예 없는,
성실한 것이 아름답다고만 믿지 않는 눈빛의,
부시지 않은 빛 두르고 있는,
음지식물 같은
저들은
먹을수록 충전되는 단단한 허기
맷집처럼 키우러 집요하게
소슬한 저녁들을 찾아오는 게 틀림없다
─「허기 충전」 전문
두어 달 전 명절 끝날 산책길
인적 뜸한 고향 신작로를 지나다 들었네
점잖지 못하게 왜 그랬어?
오빠란 놈이 동생을 그렇게 하면 어째?
아침 공기 잔잔히 물들이는 어떤 중년의 음성
그 오빤 보이지 않고 하,
누렁이 한 마리가 고갤 숙여
그 말 고분고분 듣고 있는 곁엔
누운 암탉 한 마리
(아마 옛 버릇을 참지 못하고
유순하던 개가 닭을 물었던 모양)
머릿수건을 쓴
그의 아내인 듯한 환한 여인은 또
왜 암말도 안 하고 아궁이에 장작불만 지피고 있었는지 몰라
가축 두어 마리, 가금 대여섯
키 낮은 채송화 분꽃, 해바라기와 사는 필부인
그 사내 부부의 울타리 너머
꿈결같이 들은 그날의 음성과
실수 때문에
가책받은 얼굴로 고갤 숙이던
그 착한 개의 표정을 생각하면
지금도 내가 다 죄인인 듯 마음이 저려 온다네
알아듣기나 했으려나 그 말?
메아리 소리 곱게 울리던 그날 아침
아 참, 내가 진정 못 본 건 또 무얼까?
─「개의 표정」 전문
일기예보가 어긋났나,
피서 온 가족은 숫제 물의 지배 아래 들었다
폭풍우의 멱살잡이에 제 성질 못 이긴 창이 덜컹거린다
쿵쿵 우둥퉁 쳐들어오는 물기둥은
햇살에 수런대는 나뭇잎의 기척이며
지저귀는 새소릴 작살내고
배음으로 흐르는 시냇물의 아예 감옥으로 처넣는다
손을 넣어 만질 수도
벌컥 삼킬 수도 없는
저 돌멩이가 다 된 물은 무엇 때문에
혁명처럼,
쿠데타처럼 깡패처럼
세상을 온통 찢을 듯한 훈계로
도회의 더위와 피로 피해 찾아든 식솔들에게
막무가내 가르치려 드는가?
대답할 기회도 주지 않고
오도도 떠는 몰골로 들으라고만 하는가?
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습한 이불 끌어 덮어도
꿈속 몸을 불리는 불길한 새끼 원숭이들이
나타났다 사라지곤 하는 밤
딱딱한 공기를 더 딱딱하게
음울한 것을 더 음울하게
우리 간까지 슬슬 보는 손아귀에 가슴을 잡힌
세찬 급류의 며칠
돌로 핀 험상궂은 물의 말씀, 그와 맞닥뜨리기 전엔
생이 그리 놀라운 것도 두려운 것도 알지 못했다
─「물의 설법」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