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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조선사 > 조선전기(개국~임진왜란 이전)
· ISBN : 9791191874976
· 쪽수 : 632쪽
· 출판일 : 2022-10-20
목차
[태조 4년 - 1395년]
1395년 01월 / 736
1395년 02월 / 746
1395년 03월 / 752
1395년 04월 / 758
1395년 05월 / 771
1395년 06월 / 776
1395년 07월 / 780
1395년 08월 / 790
1395년 09월 / 795
1395년 윤09월 / 802
1395년 10월 / 805
1395년 11월 / 818
1395년 12월 / 828
[태조 5년 – 1396년]
1396년 01월 / 836
1396년 02월 / 841
1396년 03월 / 846
1396년 04월 / 852
1396년 05월 / 857
1396년 06월 / 867
1396년 07월 / 873
1396년 08월 / 881
1396년 09월 / 887
1396년 10월 / 892
1396년 11월 / 896
1396년 12월 / 906
[태조 6년 - 1397년]
1397년 01월 / 912
1397년 02월 / 920
1397년 03월 / 929
1397년 04월 / 948
1397년 05월 / 962
1397년 06월 / 971
1397년 07월 / 978
1397년 08월 / 988
1397년 09월 / 994
1397년 10월 / 999
1397년 11월 / 1007
1397년 12월 / 1014
[태조 7년 - 1398년]
1398년 01월 / 1026
1398년 02월 / 1033
1398년 03월 / 1047
1398년 04월 / 1057
1398년 05월 / 1073
1398년 윤05월 / 1090
1398년 06월 / 1110
1398년 07월 / 1125
1398년 08월 / 1132
1398년 09월 / 1167
1398년 10월 / 1186
1398년 11월 / 1194
1398년 12월 / 1200
❖ 찾아보기 / 1215
❖ 신의 전원 건원릉으로 사진 여행 / 1229
책속에서
서언
이성계는 일찍 죽은 아버지 이자춘을 대신해 고려의 벼슬을 물려받았다. 그때만 하더라도 그는 그저 함경도 변방 출신의 무명 장수일 뿐이었다. 젊어서부터 무술이 뛰어났던 이성계는 고려를 괴롭히던 홍건적과 왜구를 물리치는 데 공을 세우며 무장으로서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1378년(우왕 4년)에 내륙까지 침범한 왜구를 크게 물리친 황산대첩으로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다졌다. 이후 이성계는 신흥 무인 세력의 선두주자가 되어 중앙 정계의 실력자로 부상했으며, 1388년(우왕 14년) 위화도 회군으로 정권을 장악해 재상인 수문하시중의 자리까지 올랐다.
이성계의 형제로는 동복누나인 정화공주와 이복형 이원계, 이복동생 이화가 있다. 자녀로는 잠저 시절에 혼인한 첫째 부인 신의왕후 한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이방우, 이방과(훗날의 정종), 이방의, 이방간, 이방원(훗날의 태종), 이방연, 경신공주, 경선공주 등 6남 2녀가 있고, 둘째 부인 신덕왕후 강씨와의 사이
에서 낳은 이방번, 이방석, 경순공주 등 2남 1녀가 있다.
고려 말 중앙 정계는 권문세족을 대표하는 문하시중 최영과 신흥 무인 세력을 대표하는 이성계가 세력을 양분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힘을 합쳐 권신 이인임, 임견미 등을 몰아냈다. 이들은 출신 성분뿐만 아니라 정치적 성향, 지지층까지 상반된 배경을 지니고 있었다. 최영은 친원파로 귀족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는 공민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우왕의 장인이기도 했다. 반면 이성계는 동북아의 새로운 강국으로 떠오른 명나라를 지지하는 친명파로, 권문세족들에 대항하며 성장한 신진사대부들의 지지를 받았다.
두 세력의 대립이 극에 달하게 된 사건이 발생했다. 원나라의 영토를 야금야금 잠식해 가던 명나라가 급기야 고려의 영토인 동·서북면 일대까지 차지하려고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우왕과 친원파들은 즉각 반발했다. 우왕은 명나라의 행태를 두고 볼 수 없다며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입장이었다. 최영도 이에 반대하지 않았다.
우왕은 1388년(우왕 14년)에 요동 정벌을 단행하겠다고 선언했다. 당연히 친명파들은 무모한 계획이라며 반대했다. 그러나 우왕은 요동 정벌을 반대하는 이자송을 처형하는 등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 우왕과 최영이 이처럼 요동 정벌을 강행한 데는 고려의 영토를 침범한 명나라를 응징하는 것뿐만 아니라 차제에 친명파인 이성계 등 신흥 무인 세력을 일시에 제거하기 위해서였다. 팔도도통사 최영은 우왕을 모시고 평양에 남아 있고, 우군도통사 이성계와 좌군도통사 조민수가 전방으로 나아갔다. 최영이 비록 나이가 많다고는 하나 전장에 서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우왕도 같이 있자고 하고, 굳이 무모한 전쟁에 나설 이유도 없었다.
당시 고려의 전력으로는 명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기는 어려웠다. 결국 전쟁에 패해 목숨을 잃게 될 확률이 높았다. 설사 어렵게 승리한다고 해도 친명파인 이성계는 명분상 치명타를 입게 되어 있었다. 이러나저러나 우왕과 최영에게만 좋은 일이었다. 이에 이성계는 ‘사불가론’을 들어 요동 정벌에 반대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이성계는 울며 겨자 먹기로 출정에 나섰다. 그러나 요동에 도착하기도 전에 정벌군에게 시련이 닥쳤다. 압록강 하류의 섬인 위화도에 이르러 심한 장마를 만나 더 이상 진군하기가 어려워진 것이다. 군사들의 사기는 떨어지고 도망병이 속출했다. 마침내 이성계는 회군을 결심했다. 왕의 명령을 어긴 회군은 명백한 반역 행위였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조민수도 회군에 찬성할 수밖에 없었다. 이성계는 여러 장수들을 모아 놓고 회군의 명분을 고려사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우리가 대국 명나라를 공격한다면 바로 명나라가 반격할 것이다. 약소국인 고려가 대국 명나라의 공격을 견딜 수 있겠는가? 온 국토가 유린되고 백성들은 도탄에 빠질 것이다. 나 이성계가 여러 차례 이런 상황을 들어 상감과 최영에게 회군을 요청했으나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더구나 최영은 이제 나이가 일흔인 노인이라 정신이 온전하지 못하다. 모두 함께 회군해 왕을 직접 만나 사정을 이야기해야만 한다. 그래야 백성들을 도탄에서 구할 수 있다.”
- 고려사 열전 중에서 -
이성계의 결단은 여러 장수들과 군사들의 지지를 받았다. 군심을 얻은 이성계는 말머리를 돌렸고, 회군 소식은 곧바로 평양에 머물러 있던 우왕과 최영에게 전해졌다. 평양에는 소수의 친위군 정도만 남아 있었을 뿐 반란군에 맞설 병력이 없었다. 우왕과 최영은 개경으로 후퇴했으나 결국 이성계와 조민수의 공격을 받고 생포되었다. 우왕과 최영은 유배되었다가 죽임당했다.
우왕과 최영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한 이성계는 평소 존경하던 이색을 문하시중의 자리에 올리고, 본인은 좌시중이 되었다. 위화도 회군에 동조했던 조민수는 우시중에 올랐다. 또한 조준, 정도전 등의 친명파 신흥 세력이 조정에 대거 포진했다. 이들은 개혁의 칼날을 뽑아 들었다.
먼저 전제 개혁부터 실시했다. 당시 고려의 권문세족들은 권력을 남용하고 각종 비리를 저지르며 수많은 사전을 소유하고 있었다. 일부 특권층이 사전과 노동력의 대부분을 독점하고 있다 보니 국가 재정은 파탄 지경에 이르렀다. 문제는 새로 정권을 잡은 신흥 세력에게 나누어 줄 녹봉과 수조지가 모자라고, 군사비 조달이 쉽지 않다는 점이었다.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권문세족들이 움켜쥐고 있던 사전과 수조권을 빼앗을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실시한 것이 과전법이었다. 과전법은 수조권을 국가가 회수해 공전을 늘리고, 관료들에게는 등급과 명목별로 과전, 군전, 공신전, 외역전 등의 수조권을 나누어 주는 것이다.
과전법 실시에 앞서 도당에서 찬반 투표를 했다. 이때 53명 중 이성계를 비롯하여 18명 만이 찬성을 하고, 정몽주는 중립을 지켰으며, 이색을 비롯해 나머지 권문세족들은 반대했다. 대부분 권문세족들은 과전법이 실시되면 손해를 볼 사람들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정몽주의 태도였다. 이성계는 자신의 편이라고 믿었던 정몽주가 중립을 지킨 데 적지 않게 당황했다. 결국 이때부터 이성계와 정몽주 사이에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고, 두 사람은 역성혁명이라는 역사적 운명 앞에서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권문세족들의 반발에도 과전법은 이성계와 그를 지지하는 신진사대부들의 뜻대로 진행되었다. 이미 대세는 기울어 있었다. 과전법을 실시하기 위해 기존의 모든 토지문서를 불태웠는데, 불길이 사흘 동안 꺼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게 시작된 과전법은 고려 말과 조선 초기 토지 제도의 근간이 되었다.
권력과 부의 재분배를 위해 실시된 전제 개혁의 혜택은 신흥 세력들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권문세족들의 착취로 고생하던 농민들에게도 돌아갔다. 그러자 민심마저 이성계를 지지했다. 이제 이성계는 새 왕조 창업에 한 걸음 더 다가섰다.
위화도 회군 이후 유배된 우왕을 대신해 그의 아들 창왕이 왕위에 올랐다. 이는 이색과 조민수, 변안렬의 주장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우왕의 아들이 왕이 된 것에 이성계를 비롯한 신흥 세력들은 불만이 많았다. 그러던 중 1389년(창왕 1년)에 김저가 정득후 등과 함께 유배된 우왕을 만나 이성계를 죽이려고 모의한 사실이 발각되었다. 이성계는 이를 계기로 우왕을 죽이고, 창왕과 창왕의 지지 세력인 이색, 조민수, 변안렬 등을 귀양 보냈다가 죽였다.
1389년(공양왕 즉위년)에 신종神宗의 7대손인 공양왕을 왕위에 올렸다. 이성계 일파는 신돈의 아들인 우왕과 창왕을 폐하고 왕씨를 세운다는 ‘폐가입진론廢假立眞論’을 주장했다. 그러나 우왕이 신돈의 아들이라는 확실한 증거도 없었다. 그저 이성계 일파의 입맛에 맞는 허수아비 왕을 세우기 위한 구실에 불과했다.
공양왕 즉위 초기만 하더라도 고려 조정에는 구세력과 신세력이 함께 공존하고 있었다. 공양왕은 두 세력의 완충 역할을 하며 자리를 보존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이성계는 경제권을 장악한 데 이어 군사권까지 장악했다. 1391년(공양왕 3년)에 기존의 5군을 폐하고 3군으로 개편한 후 이성계가 삼군도총제사, 조준이 좌군총제사, 정도전이 우군총제사가 된 것이다. 그들은 우왕과 창왕을 죽이고, 창왕을 옹립하고 우왕 복위를 모의했다는 죄목으로 이색, 우현보, 변안렬 등의 구세력을 처단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정몽주를 필두로 한 반이성계 세력들은 최후의 저항을 했다. 속설이기는 하지만 1389년(창왕 1년) 10월 11일 이성계의 생일날 이성계가 이방원을 시켜 정몽주와 변안렬을 초대해 자기들에게 동조할 뜻이 있는지 여부를 타진했다고 한다. 이방원이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라는 「하여가何如歌」를 부르자 정몽주는 “이 몸이 죽고 죽어…….”라는 「단심가丹心歌」를, 변안렬은 “가슴팍 구멍 뚫어…….”라는 「불굴가不屈歌」를 불러 끝까지 고려에 충성할 뜻을 밝혔다고 한다.
1392년(공양왕 4년) 3월, 명나라에 갔다가 귀국하는 왕자 석奭을 황주까지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돌아오는 길에 사냥을 하다가 낙마해 다리가 부러진 것이다. 정몽주 등은 이번 기회에 이성계의 심복들을 제거하고 나아가 이성계 세력을 일망타진하려 했다. 그리하여 그날 밤에 조준, 정도전, 남은, 윤소종 등의 8장상을 탄핵해 제거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이방원이 정몽주를 격살함으로써 수포로 돌아갔다.
정몽주는 병문안을 핑계로 이성계의 집을 방문해 정세를 살피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이때 이방원은 수하인 조영규, 고여 등을 시켜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쳐 죽였다. 이 소식을 접한 이성계는 크게 노했다. 이성계는 이방원을 불러 다음과 같이 꾸짖었다.
“우리 집안은 본디 충효로써 세상에 알려졌는데, 너희들이 마음대로 대신을 죽였으니, 나라 사람들이 내가 이 일을 몰랐다고 여기겠는가? 부모가 자식에게 경서를 가르친 것은 그 자식이 충성하고 효도하기를 원한 것인데, 네가 감히 불효한 짓을 이렇게 하니 내가 약을 마시고 죽고 싶은 심정이다.” - 태조실록 총서 중에서 -
이방원은 “정몽주가 우리 집안을 망하게 하려고 하는데 가만히 앉아서 당할 수는 없다.”며 모두가 아버지를 위한 효심에서 비롯된 일이라고 항변했다. 그러나 이성계의 노여움은 풀리지 않았다. 이 일로 이성계와 이방원 사이가 벌어졌다. 이성계는 이방과 등을 공양왕에게 보내 정몽주가 충량한 신하들을 해치려 하여 처형했다고 거짓말을 했다. 이제 이성계의 역성혁명을 막을세력은 아무도 없었다.
위협을 느낀 공양왕은 보신책으로 이성계와 형제의 맹약을 맺자고 했다. 그러나 이방원, 정도전, 남은, 조준 등 52인의 이성계파는 공양왕이 이성계를 찾아와 맹약을 맺기 전에 폐위시키고자 했다. 그리하여 공민왕비인 정비를 협박해 무능한 공양왕을 폐하고 이성계를 권지고려국사로 추대하는 밀지를 내리게 했다.
이성계는 1392년(공양왕 4년) 7월 17일에 정비의 명과 문무백관의 추대로 개경 수창궁에서 왕위에 올랐다. 이가 곧 조선의 태조이다. 이에 앞서 이성계는 정도전, 배극렴, 조준 등이 국새를 가져오자 한사코 거절했다고 한다. 실록에 따르면 “두려운 마음에 거조(행동거지)를 잃었다.”라는 표현도 나온다. 자기가 하고 싶어서 왕위에 오른 것이 아니라 천명과 인심이 쏠려 그렇게 됐다는 것이다. 이성계는 “예로부터 제왕의 일어남은 천명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실로 덕이 없는 사람인데 어찌 감히 이를 감당하겠는가?”라며 사양했다고 한다. 그러나 대소신료가 거듭 왕위에 오를 것을 권고하니 마침내 그 뜻을 받아들였다.
475년을 이어 온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었다. 이때 이성계의 나이 58세였다.
새 왕조를 연 이성계는 농본주의, 숭유억불, 사대교린을 국시로 삼고, 조림을 명나라에 보내 자신의 등극을 알렸다. 또한 밀직사사 한상질을 보내 ‘조선’이라는 국호를 승인받았다. 조정에서 논의된 새 국호 후보에는 이 외에도 이성계의 고향인 ‘화령’이 있었다. 명나라는 ‘조선’과 ‘화령’중 ‘조선’을 새 국호로 정한 것이었다. 1393년(태조 2년) 1월 15일부터 고려를 버리고 새 국호 ‘조선’이 사용되었다.
국왕에 대한 고명誥命은 그보다 9년이 지난 1401년(태종 1년)에서야 받을 수 있었다. 조선 건국 초기에는 명과 요동 지방을 둘러싼 영토 분쟁이 있었다. 이러한 양국 간의 갈등은 1396년(태조 5년)에 발생한 표전문 사건을 계기로 더욱 심화되었다. 표전문 사건이란 명나라가 조선에서 보낸 표전문의 문구가 불손하다며 그 책임자인 정도전을 잡아들이라고 한 일이다. 정도전은 실상 그 표전문을 쓰지도 않았고 감수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명나라가 정도전을 지목한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 조선은 겉으로는 존명사대尊明事大를 외치면서 여진족이 사는 동·서북면 지역을 조선의 영토로 편입시키고 있었다. 명나라는 조선의 이러한 이중적 태도에 불만이 많았다. 그래서 그런 정책을 실시하는 장본인인 정도전을 제거하고자 했던 것이다.
정도전은 이성계를 설득해 명나라와 일전을 불사하려고 했다. 결국 이 문제로 인해 실제로 표전문을 작성했던 김약항, 노인도 등이 명나라에 잡혀가 처형당했다. 정도전은 명나라에 대해 요동 정벌로 맞서자고 했다. 이성계 역시 정도전의 요동 정벌 정책에 반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요동 정벌 계획은 1398년(태조 7년)에 일어난 1차 왕자의 난으로 정도전이 제거됨으로써 무산되고 말았다. 명나라도 정도전의 반대파인 태종이 즉위하자 1401년(태조 1년)에 국왕의 고명을 내려주었다.
이성계는 구세력의 온상인 개경을 빨리 떠나고 싶었다. 첫 번째 후보지로 거론된 곳은 계룡산이었다. 그러나 공사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하륜이 풍수지리상으로 볼 때 계룡산이 도읍으로는 적당하지 않다며 반대를 했다. 그리고 무악을 새 도읍지로 추천했다. 그러나 태조와 함께 후보지를 둘러본 정도전과 무학이 너무 협소하다고 반대했다. 다음 후보지로는 무학이 추천한 청와대 자리가 거론되었다. 무학은 인왕산을 주산으로 하고 백악과 목멱, 남산을 좌청룡, 우백호로 삼아 동향으로 궁궐을 앉혀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정도전은 그 터는 너무 좁고, 도읍은 자고로 남향을 하는 것이 원칙이니, 지금의 경복궁 자리에 삼각산, 백악을 주산으로 하고, 안산과 낙산을 각각 좌청룡과 우백호, 남산을 남주작으로 삼아 도읍을 조성해야 한다고 했다. 결국 태조는 정도전의 의견에 따라 새 도읍지를 정했다.
1395년(태조 4년) 9월, 중앙에 경복궁과 동쪽에 종묘, 서쪽에 사직이 완성되었다. 이듬해에는 북으로 백악, 동으로 낙산, 남으로 남산, 서로 안산을 잇는 도성과 사대문이 완성되었다. 정도전은 이 모든 공사를 지휘, 감독했으며, 궁궐과 사대문의 이름을 직접 짓는 등 새 도읍의 설계자로서 역할을 다했다.
이성계는 즉위한 지 한 달 만인 1392년(태조 1년) 8월에 신덕왕후의 둘째 아들 이방석을 세자에 책봉했다. 태조와 신덕왕후의 마음은 원래 첫째 아들인 이방번에게 있었다. 그러나 배극렴이 기왕에 신덕왕후 소생으로 세자를 세우려면 좀 더 명민한 둘째 아들이 낫다고 했다. 그래서 10세에 불과한 방석이 세자가 된 것이다. 이때 공로를 고려하면 이방원이 세자가 되어야 한다는 의견이 있기는 했으나, 이성계의 첫째 부인인 신의왕후 한씨는 조선이 건국되기 1년 전에 이미 죽어 둘째 부인인 신덕왕후 강씨가 정식 왕비로 있었고, 또한 강비가 조선 건국에 공로가 많았기 때문에 불만이 있더라도 방석의 세자 책봉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세자를 지지하는 세력으로는 이성계의 신임을 받는 정도전과 방석의 장인 심효생, 과격한 개혁파 남은 등이 있었다. 정도전이 요동 정벌 계획을 핑계로 군권을 장악해 사병을 혁파하고 진법 교육을 강행하자, 이방원을 비롯한 전실 왕자들은 위기감을 느꼈다. 결국 이방원과 그의 동복형제들은 정변을 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 1398년(태조 7년) 1차 왕자의 난이 발발했다. 이 난으로 방번, 방석 형제와 정도전, 심효생, 남은 등 방석 지지 세력이 제거되었다.
이 일로 충격을 받은 이성계는 그해 9월, 한씨 소생의 둘째 아들 방과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그가 조선의 2대 왕인 정종이다. 새 왕조가 열린 지 7년 만의 일이었다. 이성계는 그렇지 않아도 자신의 뜻을 거스르고 정몽주를 제거한 일로 방원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런데 방원이 이복형제인 방번과 방석을 죽이고 권력을 잡자 그를 더욱 미워했다. 정종은 형제상잔의 변이 일어난 한양을 버리고 개경으로 도읍을 잠시 옮겼다.
1400년(정종 2년), 한씨 소생의 넷째 아들 방간이 박포의 부추김으로 정변을 일으켰다. 이 정변은 방원에 의해 제압되었다. 이것이 2차 왕자의 난이다. 이 후 방원은 스스로 세제가 된 데 이어 1401년(태종 1년)에 왕위에 올랐다. 정종이 물러나고 태종이 즉위하니, 정종은 상왕이 되고, 태조는 태상왕이 되었다. 태종은 개경의 수창궁에 불이 나자 이성계의 뜻을 따라 다시 도읍을 한양으로 옮겼다.
이성계는 태종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고향인 함경도 지역에 머무르며 한양으로 돌아오라는 태종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함흥차사’라는 말이 생기기도 했다. 함흥으로 이성계를 모시러 간 차사들이 한 번 가면 돌아오지 못한다는 데에서 비롯된 말이다.
1402년(태종 2년)에 안변부사 조사의가 난을 일으키면서 이성계와 태종의 갈등은 극에 달했다. 표면적으로는 신덕왕후의 친척인 조사의가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되어 있지만, 그 뒤에는 이성계가 버티고 있었다. 다시 말해 아버지와 아들이 군사적으로 대립하게 된 것이다. 결과는 태종의 승리였다. 조사의의 반란군은 관군에 의해 진압되었으며, 이성계는 할 수 없이 한양으로 환궁했다. 함흥에서 돌아온 이성계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태종을 왕으로 인정하였다.
태종 이방원에게 백기를 든 이성계의 말년은 쓸쓸했다. 사실상 연금 상태에 있었던 이성계는 불교에 의탁해 먼저 간 부인과 자식 들의 명복을 비는 것으로 소일했다. 1408년(태종 8년) 5월 24일에 창덕궁 별전에서 죽었다. 향년 74세였다. 새 왕조를 세운 태조는 7년이라는 길지 않은 치세 기간 동안 정도전과 함께 새 나라의 기틀을 마련했지만, 그 완성을 보지는 못했다. 결국 창업 군주로서의 위대한 꿈은 이성계가 아닌 태종 이방원에 의해 이루어졌다.
역성혁명은 이성계가 함경도 변방 출신의 무장이었기에 가능했다. 그렇지 않았으면 고작 왕씨 출신의 왕이나 바꾸는 정도에 그쳤을 것이다. 이성계를 도와 새 왕조의 탄생을 주도한 정도전, 하륜 등 서얼 출신 인사들도 신분적인 제약에서 벗어나기 위해 역성혁명에 동참한 것이었다. 권력에서 소외되어 있던 일부 신진사대부와 신흥 무인 세력에 의해 조선의 500년 역사가 탄생한 것이다.
본서는 이렇게 구성하였다.
∙ 태조실록 원본 그대로 편집하였다. 지금까지 출간된 도서와는 달리 이성계가 왕이 되기 전의 실록을 온전히 수록하였다.
∙ 독자들이 읽기 편하게 한자를 과감하게 삭제하였다.
∙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각주를 달았으며, 당시 주요 인물들을 상세하게 각주에 처리하였다.
∙ 대화체로 기록되어 있는 소설 같은 이성계의 사람들 과 멋진 독서 여행을 떠나세요 …
2022년 가을에 편집진 일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