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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시 > 한국시
· ISBN : 9791191897562
· 쪽수 : 124쪽
· 출판일 : 2023-06-01
책 소개
목차
시인의 말
제1부
리페르셰이의 날 – 11
왕표연탄 – 12
아무것도 되지 말고 – 14
라디오미르 – 16
발등으로 걷기 – 18
도로풍 아래서 – 20
낙민동 – 22
좀비영화에서 엑스트라의 팔을 자르는 고무 도끼 제작자의 심정으로 – 24
히에로니무스의 올빼미 – 26
고통에 대하여 – 28
8절지 스케치북 – 30
아 좀 더 적극적으로 – 32
마흔 – 34
제2부
도유리 – 37
알 방법이 전혀 없는 것처럼 – 38
지극히 정상이었지만 – 40
글루코사민 – 42
쌔리삔 이야기 – 43
당리동(堂里洞) – 44
교룡의 날 – 46
가장 큰 오점처럼 – 48
과도 – 49
삼촌사우루스 – 50
대박이 – 52
수박 세일 – 54
냉암소의 날 – 55
요절 – 56
제3부
땅강아지 – 61
기상특보 – 62
서로의 좁은 등을 긁으며 – 64
축사를 찾다 – 66
그런 적 없는데 – 68
건기 – 70
저서성 – 72
받아라, 바다 – 73
오로라를 보러 가려던 – 74
좌부동자에게 – 76
산 11-6 – 78
능 – 80
문향 – 82
긴 숨은 장마처럼 – 83
제4부
테디베어가 웃는다 – 87
테네리페 – 88
겨울잠 밖에서 – 90
뻐꾸기 – 92
암순응 – 94
시스템 동바리 – 96
카우 – 98
잠수함 – 100
중력 새총 – 101
Hard times come again no more – 102
저녁의 창자들 – 104
남아 있는 볕 – 106
백목련 – 107
침대가 비고도 – 108
해설 박상수 가능성의 중간 지대 – 110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왕표연탄
당신 없이 오던 곳에, 당신과
훗날의 내가 옵니다 별 여유도 없이
떠나온 곳으로 가끔 도망치기도
도망쳐 온 곳으로 가끔 떠나오기도
거기 아직도 멀뚱히 선 절반의 나도
살았던 시간보다 갑절 오래된
지금의 나도 우수처럼 녹아 흘러 나갈 테지만
어려서 오르지도 못하던 고개 위에서
색깔만 아름다워진 옛 피란민촌을 보며
당신은 이렇게 예쁜 마을이 있던가 했고
나는 그들이 새 삶을 꾸렸던 연탄방도
여기 어디쯤이란 것만 알고 있었습니다
내가 다녔던 천주교 유치원이 있고
고개를 넘어가면 태어난 집이 있고
아직도 빨래가 벽화처럼 널려 있었습니다
왕표연탄이 없어진 지가 언젠데
그때 담벼락 이름에 그때 소금기, 나는
바람이 사람보다 오래 산다고 읽었지만
대규모 철거에 마을 화장실과 타일이
햇살에 드러나 반짝이는 걸 보곤
내 말에 아무런 확신도 못 가졌습니다
어찌 됐건 지금이 더 나은 삶, 왜
아직도 여기 서 있느냐고 물어도
돌아가신 외할머니 손만 붙드는 아이
이십여 년을 가던 중국집이
최고 흥행 영화의 배경으로 나온 후론
면발이 퉁퉁 불어서 나왔습니다
이젠 떠나지 않아도 된다 믿을 때는
가장 떠나야 할 때였습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순간은 무슨
지나간 건 모두 찰나지,라고 말하며
나는 아무런 확신도 못 가졌습니다.
라디오미르
바늘에 불빛을 바르다 천천히 녹아 버린 몸들이 있었다 어리지도 늙지도 않은 별, 너의 보이지도 않는 베어링 위에서 손과 붓은 같은 이름으로 칠해지는 곳을 향해 크고 텅 빈 가방을 둘러메곤 했다 시침보다 빠르고 분침보다 느린 곳에서 시간은 몰래 바그너의 LP 따위를 걸었을 것이다
연금술을 배울 거야, 지구 반대편에서부터 황금시대든 황금 알이든 본 적도 없는 책들처럼 우리는 반짝이는 어둠만 그리워하며 모래를 치웠지, 그건 모래가 아니라 죽은 기억의 뼈들이었고 알고 난 후를 환, 그 이전도 환이라고 부르는 우리의 발음들이 서로에게 침 냄새를 묻혀 갈 때, 밤이 땅의 반대편에서 지울 수 있는 것은 밤뿐이라 여겼다 복족류처럼 끈적한 발을 우주까지 들이밀어 봤다면 우리가 사랑한 것은 반짝이는 것보다 반짝인다는 말을 위한 혀의 원리였을 거야 우리는 구개음화 이전의 해돋이 앞에서 스스로 빛나는 것 하나와 스스로 빛나는 방법 열 가지를 읽었고 너는 고작 한 가지인 나를 열 가지 방법으로 꺼뜨려도 좋다고 생각했었다
결코 조용한 적 없는 저 밤은 너머,라는 이름의 나라를 그리워하도록 우리의 걸음들에 기관처럼 이름을 붙였고 이름과 아름다움은 구별되지 않는 세포였다 우리를 붓질하던 발음은 사실 밤이 아니라 밤의 기억이라는 저주, 서로라는 말은 왕복운동, 각자라는 말은 회전운동이었던 손바닥 위에서 우리는 여행 이전의 심장을 동력학적으로 퍼올린다 네가 애초 맞지 않는 잠옷의 다리를 자르려 했을 때 밤은 혀를 잃었고 나는 맛을 잃었지만 말은 얻었다고 생각했었다 이불 속 같은 바다에 빛을 보러 가기 위해 창틀에 말려 놓은 해를 나는 끝까지 못 본 척했었다
해치를 열기 위해선 우선 닫아야 해, 녹아 버린 몸들이 너설을 걸어오던 선창 안에서, 물에 빠져 죽지는 마,라고 너는 내게 말했다.
좀비영화에서 엑스트라의 팔을 자르는 고무 도끼 제작자의 심정으로
자전만 있고 공전은 없는 춤들
달을 따라 수없이 떠돌려 했지만
허리도 무릎도 가진 적 없는 행성들은
그런 춤을 본 적이 없었다
가장 큰 신전에는 상현도 하현도 있었고
우리는 그것들을 사랑하고
튼튼하게 떠받쳤지만, 재생되지는 않았다
콘덴서가 나가면 콘덴서를 갈고
사람이 나가면 사람을 갈고
죽었던 괴물들이 살아 돌아왔다
누구는 달을, 누구는 괴물을 사랑했고
달은 누가 괴물이건 그들을 사랑했지만
재생되지는 않았다
그렇게도 울고 웃던 영화 제목을 모르겠어
내가 네게서 갑자기 떠날까 두려울 때
용서받지 않아도 되는 나이
전구를 갈아 줄 사람이 필요해서
전구를 갈았다
괜찮아, 천천히 멀어질 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