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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한국고대~고려시대 > 한국고대사
· ISBN : 9791194263265
· 쪽수 : 416쪽
· 출판일 : 2025-01-31
책 소개
목차
들어가며
선사
8000년 전 쓰레기 더미에 숨겨진 고대 생활사 | 동삼동 유적 외
청동기에 담긴 벌거숭이 남성의 밭갈이 | 농경문청동기 외
수백 미터 이어진 2열 구덩이의 비밀 | 송국리 유적
엿장수 덕에 국보로 살아난 청동기시대 유물 | 대곡리 유적 외
삼한
도굴꾼의 손길을 피한 무덤 밑바닥 | 다호리 유적
밭에서 건진 천년 왕국 신라의 초기 300년 | 조양동 유적
금호강변에서 발견된 2000년 전 청년 왕 | 양지리 유적
고구려
광개토왕이 남긴 ‘묘지기 관련 당부’ | 광개토왕릉비
한강을 놓고 펼쳐진 삼국의 각축전 | 몽촌토성 외
한강 이남에 주둔한 고구려군의 흔적 | 충주고구려비 외
백제 I
한성기 백제사 해명의 일급 사료 | 석촌동 고분군
세종시 강변에 세운 백제의 ‘계획도시’ | 나성리 유적
백제부터 조선까지 활용된 천혜의 요새 | 공산성
백제 웅진 천도의 든든한 배경 | 수촌리 고분군
백제 곳곳 들어선 ‘열쇠구멍 무덤’의 수수께끼 | 신덕고분 외
바다와 연못, 우물 속 용왕님께 올린 제사 | 죽막동 유적 외
‘영생’의 소망 담긴 사후 통행증 | 금동신발
최악의 발굴, 50년 넘게 이어진 교훈 | 무령왕릉
백제 II
행방이 묘연한 백제 성왕의 두개골 | 능산리 고분군
‘전륜성왕’ 꿈 담긴 백제 절의 비밀 | 대통사지
성왕이 추진한 왕권 강화 정책의 산물 | 은화관식
창왕이 이끈 백제의 ‘조용한 부흥’ | 왕흥사지
봉황과 용, 신선이 어우러진 백제 예술의 극치 | 금동대향로
선화공주 흔적을 지운 사리봉영기 | 미륵사지
백제사 최고의 미스터리, 익산 천도론 | 왕궁리 유적 외
패망한 백제를 그리며 돌에 새긴 불상 | 불비상
신라 I
신라의 ‘강철 부대’를 뒷받침한 제철 장인들 | 황성동 유적 외
‘용면와’에 ‘수세식 화장실’까지 갖춘 신라 궁궐 | 월성
신라 ‘호국 도량’에서 쏟아져 나온 유물 | 황룡사지
비석이 증언하는 ‘신라판 책임시공제’ | 남산신성비
저습지 발굴로 찾아낸 신라 유물의 타임캡슐 | 월지
문무왕의 호국 염원이 서린 절 | 사천왕사지
김유신 저택 우물에 숨겨진 비밀 | 재매정
신라사의 흐름이 반영된 장례 풍습의 변화 | 장골기
‘조상묘 찾기 열풍’ 속에 뒤바뀐 신라 왕릉 | 신문왕릉
신라 II
1500년 만에 세상에 나온 신라 왕의 유골 | 황남대총
신라사의 수수께끼를 품은 생소한 이름의 무덤 | 서봉총
금방울과 흙인형이 밝혀낸 어린 왕자 | 금령총
주인을 찾지 못한 황금 장신구 | 노서동 215번지 고분
신라 무덤에서 나온 광개토왕 그릇 | 호우총
신라 왕 직계 가족의 장례 용품 | 금관
신라의 실리 외교를 보여주는 외래 문물 | 새 날개 모양 관식
삼국시대 권력과 외교 관계를 읽는 단서 | 금귀걸이
신라 사람들의 삶이 담긴 ‘19금’ 흙인형 | 황남동 토우
실크로드를 거쳐 신라까지 온 유리 제품 | 로만글라스
가야
금관가야를 역사의 무대에 올린 발굴 | 대성동 고분군
대가야의 수수께끼를 풀 유일한 사료 | 지산동 고분군 ①
외교력에 의존하다 몰락한 대가야 | 지산동 고분군 ②
이름만 남기고 사라진 ‘다라’의 비밀 | 옥전 고분군
가야연맹의 리더를 꿈꾼 ‘안라’의 금동관 | 말이산 고분군
1900년 전 바닷길을 장악한 남해안의 강소국들 | 늑도 유적 외
창녕 출토 유물에 감춰진 비화가야의 비밀 | 교동·송현동 고분군
참고문헌
저자소개
책속에서
도굴꾼의 손길을 피한 무덤 밑바닥 | 다호리 유적
목관을 수습하는 날. 기중기를 설치하고 목관을 견고한 끈으로 동여매는 등 준비를 마쳤지만 혹시나 들어 올리는 과정에서 목관이 파손될까 우려했다. 작업 지시가 떨어지자 기중기의 체인이 감기면서 그 힘이 목관에 다다르자 육중한 무게의 목관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때 무덤 속에서 또 한 번의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쫙 깔렸습니다. 유물이 엄청 많아요.” 목관 하부에 유물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목관을 무덤 밖으로 안전하게 옮긴 다음 모두 무덤 속을 주시했다. 그 옛날 하관할 때 쓴 동아줄, 옻칠된 목기, 제사 지낼 때 뿌린 밤톨과 율무까지 다양했다. 가장 이목이 집중된 유물은 타원형 바구니였다. 대나무 조각으로 엮어 만든 바구니 속에 칼집에 든 동검과 철검, 중국 한나라의 청동거울과 동전, 붓과 손칼 등 많은 유물이 들어 있었다. 도굴꾼들이 목관 하부의 제사용 구덩이인 ‘요갱(腰坑)’의 존재를 몰랐기에 이 유물들이 온전히 남아 있었던 것이다.
한강 이남에 주둔한 고구려군의 흔적 | 충주고구려비 외
1979년 4월 충주 입석마을 입구에서 발견된 고구려비는 5세기 어느 시점에 고구려가 충주로 진출했음을 잘 보여준다. 비문이 심하게 마멸돼 비석 내용이나 세운 연대 등에 대해 논란이 있다. 비석이 처음 발견되었을 때 백제의 한성 함락 이후 세워진 것으로 본 견해가 정설이었으나 그 이후 5세기 전반에 세워진 것으로 연대를 올려보려는 주장이 제기됐다. 근래에는 5세기 후반의 비석에 5세기 전반의 사건 일부가 수록됐다고 보는 견해도 나왔다. …
고구려는 왜 충주를 장악하고 비석을 세웠으며, 고구려 사람들 은 왜 그곳에 살다가 묻힌 걸까? 학자들은 그 이유로 충주의 풍부한 철산을 든다. 그러한 주장의 근거는 2006년 이래 탄금대 남쪽 칠금동에서 확인됐다. 바로 철광석을 녹이던 용해로가 무더기로 발굴된 것이다. 아울러 충주 곳곳에서 제철용 백탄을 굽던 가마터 수백 기가 발굴됐다. 이는 전국 각지에서 조사된 백탄 가마의 절반에 가까운 수치다. 백제 한성기에는 이곳에서 만든 철기가 배에 실려 풍납토성까지 옮겨졌을 것이다. 충주는 양질의 철광석, 백탄을 만들 수 있는 풍부한 땔감, 남한강 수운이라는 3박자를 두루 갖춘 곳이었다.
금방울과 흙인형이 밝혀낸 어린 왕자 | 금령총
금방울과 금관 발굴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5월 29일 로만글라스 2점과 기마인물형 주자 2점이 출토되었다. 로만글라스는 지중해 연안 동로마 식민지에서 제작되어 실크로드를 통해 전해진 귀 한 물품이고, 기마인물형 주자도 유례가 없는 특이한 유물이다. …
신라 사람들은 왜 이처럼 특이한 토기를 만들어 무덤에 넣어둔 걸까? 이 2점의 토기는 흙인형으로서도 가치가 있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즉, 말의 몸통 속이 비어 있고 엉덩이 위쪽으로 액체를 담은 다음 앞쪽 주구로 따를 수 있는 구조를 갖추었다. 그렇다고 하여 일상생활에서 이 토기를 주자로 썼다고 보기에는 다소 어색하다. 통상의 주자와 달리 손잡이가 없고, 크기가 다른 토기 2점을 정교하게 만든 점으로 보면 장례용일 가능성이 더 클 것 같다. 주인상(왼쪽)은 의관을 갖추어 입고 어디론가 가는 모습인데 표정이 어둡다. 그에 비해 시종상은 일상의 거친 옷을 입고 방울을 흔들면서 누군가를 안내하는 모습처럼 보인다. 이 무덤에서 출토된 금관과 금허리띠, 장식대도 등 유물 크기가 작은 점도 눈에 띈다. 학자들은 이 점에 주목해 무덤의 주인공을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신라 왕자로 추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