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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인문학 > 인문 에세이
· ISBN : 9791194513490
· 쪽수 : 296쪽
· 출판일 : 2026-03-31
책 소개
한때 나였던 너와 한때 너였던 내가 있을 뿐
그리하여 나는 너를 다만 지탱하는 것일 뿐
“세계는 저 멀리 있고,
나는 너를 짊어지고 가야만 한다.”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 파울 첼란은 고등사범학교에서 함께 근무했던 동료 자크 데리다에게 시집을 한 권 선물했다. 몇 년 후 한스게오르크 가다머의 죽음을 애도하던 데리다는 이 시집의 한 구절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첼란의 시를 함께 읽으며 경탄과 존경의 마음을 나누었던 친구 가다머와의 시간들이 떠올라서이다. 이 시에는 첼란이 있고, 가다머가 있으며, 그들과 함께 사유하고 교류했던 세계가 있다. 세계는 저 멀리 있고 ‘나’만 이곳에 남아 있다. 남은 자로서의 ‘나’는 그 세계를 잊지 않기 위해 ‘너’를 짊어지고 나아가야만 한다.
애도의 (불)가능성
일상적으로 우리는 애도를 무언가를 잃고 나서 시작하는, 즉 상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으로 여긴다. 하지만 데리다는 그 특유의 화법으로, 애도는 이미, 그리고 항상 발생하고 있으며 동시에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이라 말한다. 그에게 우정이란 “둘 중 하나가 더 오래 살아남아, 먼저 가는 친구의 죽음을 지켜볼 가능성”으로부터 생겨난다. 우리는 죽음을 경험할 수도, 느낄 수도, 생각할 수도 없다. 우리가 겪는 것은 오직 타인의 죽음이다.
함께했던 사람의 죽음은 언제나 하나의 세계, 어떤 세계의 가능성 자체의 끝을 알리는 것이다. 하나의 전체로서의 세계, 고유하고 대체 불가능한 세계의 끝. 그렇기에 무한한 세계의 종말을 선언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타인의 죽음을 목격하는 우리는 되돌릴 수 없는 파괴의 순간들을 겪는 난파선처럼 위태롭고 처참한 잔여물이자 부서진 생존자이다. 가족, 형제, 친구, 연인처럼 소중한 관계에서의 이별과 상실은, 자아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는 자아의 죽음이기도 하다. 살아남은 자로서 나는 그 죽음을 계속 살아가야만 한다. 이처럼 삶에는 끊임없이 죽음이 유입되고, 죽음만이 내가 살아 있음을 일깨워 준다.
따라서 애도란 근원적으로 불가능한 것으로, 이미 시작되었으며 결코 끝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너를 만나는 순간, 애도는 이미 시작되었고 반드시 올 것이며 그러한 사실이 관계를 비로소 가능하게 한다.
존재한다는 것은 상속하는 것
1930년 알제리에서 태어나 2004년에 프랑스에서 삶을 마감한 데리다는 90여 권의 책을 남겼고, “탈구축”(해체), “디페랑스”(차연), “대리보충”, “환대”, “유령”, “애도”, “도래할 민주주의”, “사건의 (불)가능성”, “타자”, “아카이브” 등의 개념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어떤 용어나 문장으로도 요약할 수 없는 독특한 세계를 펼친 철학자이다. 그래서 많은 학자가 그를 어떠어떠한 철학자라고 규정하거나 몇 개의 키워드나 개념으로 환원하는 우를 범하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데리다는 스스로 자신의 텍스트를 열어 둠으로써 다양한 오해와 비판을 허용하며 읽는 자의 세계에서 저마다 다르게 살아남도록 내버려 둔다.
그의 관점에서, 존재한다는 것은 상속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아무런 선택권 없이 이미 있는 것들 가운데 무언가를 부여받으며 태어났다. 그런데 이 유산 혹은 상속은 “결코 하나로 모아지지 않으며 그것 자체로 하나가 되지 않는다”. 상속자는 여러 가지 가능성을 읽어 내고 선택하며 재확인해야 한다. 정해진 의미, 본래의 의미는 따로 없는 세계에서 각자가 의미를 만들어 내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결단을 내릴 때 그것은 항상 이전의 흔적에 의해 조건 지어지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과는 다른 주체로 나아가게 한다. 어떤 결단도 완전히 자유로운 결단은 아니다. 내가 이미 경험한 것들, 교육과 규범, 실시간 맞닥뜨리는 타인의 표정과 몸짓, 의식조차 하지 못하는 나의 충동과 감정들이 나의 결정을 조건 짓는다. 하지만 바로 그 조건들 덕분에 나는 똑같은 결정을 다시 내릴 수 없고, 항상 조금 다른 방식으로 세계에 응답하게 된다.
애초에 세계가 없다면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 세미나였던 『짐승과 주권자』 세미나에서 데리다는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도 동의할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같은 세상을 살고 있고, 같은 것을 이야기하며,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우리는 그것이 전혀 사실이 아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미 공통된 세계, 우리가 함께 살고 있는 하나의 세계란 없다는 것. 그것이 환상이라는 것을 알기에 나는 너를 공허 속에서 지탱한다. 애초에 세계라는 것이 없다면, 어차피 끝없이 먼 곳에 있는 것이라면, 내가 해야 할 유일한 일은 세계를 초대하는 것이다. 너를 위해, 너를 향해 네가 있도록 세계를 불러오는 것이다. 이 불가능한 항해, 우리에게 주어진 제한된 시간 안에 설령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 잠깐 동안이라도 내가 살 수 있고 네가 살 수 있도록, 나는 너를 다만 지탱하는 것이다.
타자의 탄생은 곧 내가 접근할 수 없는 세계의 출현이자 세계의 기원이다. 그리고 타자의 죽음은 세계의 끝을 알린다. 세계에 대한 유일한 열림이었던 타자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탄생과 죽음에서 세계는 멀리 있으며, 데리다에게는 그것이 바로 책임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따라서 데리다에게 애도는 상실에 대한 응답 혹은 타자에 대한 윤리적 책임의 개념을 넘어선다. 이것은 분산된 주체성의 감각이다. 끊임없이 타자에게 말을 건네고 타자의 말이 자신을 장악하고 흘러넘치게 함으로써 자신의 발화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그의 글들은, 우리 존재 자체가 이미 타자의 상실과 자아의 상실에 기반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나는 이미 어제이다
주체란 자신을 반복하며 조금씩 어긋나는 존재이다. 이 반복 속의 어긋남, 동일성 안의 차이 때문에 나의 결단은 항상 나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나타난다. 이 고유함은 어떤 독특함이 아니라, 완전히 동일할 수 없고 완전히 통제할 수 없으며 완전히 설명될 수 없는 어떤 특이성이다. 대신 살아 줄 수 없고 대신 죽을 수 없으며 대신 응답할 수 없음이다. 그렇기에 ‘나’라고 하는 것은 결코 새롭지 않지만, 고유하며 완성될 수 없기 때문에 윤리적일 수 있다.
마지막 세미나에서 그가 남긴 말은 마치 유언처럼 들린다. 개인의 유언이 아닌, 나와 너의 유언이자 인류의 유언처럼 말이다.
“즐거움은 오직 애도에서, 애도된 즐거움으로부터 태어난다. 어떤 애도나 어떤 죽음에 대한 기억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에 대한 애도이다. 나는 어제에서 왔다, 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더 이상 현재에 존재하지 않으며, 나는 이미 어제이다.”
데리다가 말하듯 기쁨과 즐거움은 애도에서 나온다. 어제에 대한 노스탤지어, 어제의 나는 더 이상 없다는 것. 그리해 이미 우리는 흔적이고 교차이고 얽힘이라는 것. 그렇다면 오늘의 나는, 어제의 너는 도래할 타자일까? 그가 한때의 나이고, 내가 한때의 너라는 것을 우리가 만약 희미하게나마 기억해 낸다면 삶은 더 괜찮아질까? 별자리를 이루고 있는 별들처럼 누구도 삶을 혼자 짊어지지는 않기에.
목차
1부 세계는 저 멀리 있고
1 편지 11
2 시차 22
3 우편 31
4 네거티브 능력 38
5 탈구축 45
6 디페랑스 63
7 담론 72
8 흔적 77
9 코라 87
10 환대 101
11 이항 107
12 반복 (불)가능성 114
13 바퀴 124
14 나 130
15 굴 136
16 섬뜩함 146
17 사후성 153
18 자-타율성 161
2부 나는 너를 짊어지고 가야만 한다
19 괴물, 인간, AI 173
20 언어 180
21 유령 189
22 용서 197
23 장례 205
24 너 213
25 발텐 226
26 미래 245
27 서명 250
28 기원 없음, 종말 없음 257
데리다의 생애 267
에필로그 279
참고문헌 287
찾아보기 292
저자소개
책속에서
철학사상 최초로 ‘타자성’(alterity) 개념을 가장 높은 반열에 올려놓은 레비나스의 공로를 주목하면서 데리다는 이 개념을 더욱 급진적인 방식으로 파고든다. 그는 타자성을 결코 절대화할 수 없다고 봄으로써 오히려 절대 타자를 넘어서는, 더 타자적인 타자에 대한 사유로 나아간다. 타자가 절대적 기원이자 종착지로 고정되는 순간, 그 타자는 더 이상 타자일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응답할 자가 나라고 확신한다는 것은 곧 선택받은 자로서의 오만과 나르시시즘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데리다의 우편에 대한 비유는 정신분석에 대한 비판에서 비롯되었지만, 그 간극은 여러모로 중요한 통찰을 제시한다. 우편은 보내는 이와 받는 이 사이의 단절, 왜곡, 지연을 암시한다. 어쩌면 우리의 이해나 소통도 우편을 닮은 것이 아닐까? 두 사람이 얼굴을 보고 직접 나누는 대화조차 완전하게 이해되기는 어렵다. 우리는 서로 다른 시공간에 처해 있고, 각자의 경험에 따라 세계를 다르게 해석하기 때문이다. 감정에도 생각에도 경험에도 시차가 존재한다.
데리다는 ‘차이’를 뜻하는 프랑스어 “difference”의 e를 a로 바꾼 신조어 “differance”를 통해 이 개념을 명명한다. 발음은 ‘디페랑스’로 동일하지만 철자가 다른 이 단어는 차이의 발생, 지연, 흔적, 결정 불가능성이라는 의미운동을 포함한다. ‘디페랑스’(differance)는 우리가 현상들의 시간성을 인식할 때 그 안에서 발견되며, 형이상학이 자신의 결정을 내리기 위해 절단했던 결정 불가능한 자원을 가리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