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미지

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한국근현대사 > 일제치하/항일시대
· ISBN : 9791194533054
· 쪽수 : 332쪽
· 출판일 : 2025-04-05
책 소개
목차
004 발간사_안후상
006 축간사_이학수
010 해설: ‘보천교 민족운동’과 관련 구술의 활용_안후상
동학농민전쟁과 차치구·차경석, 그리고 강증산 탄생지
022 “정읍 농민 대접주 차치구, 손자 용남”_이이화
029 차경석 출생지 ‘연기동’_김은수 구술
034 차경석의 출생과 ‘기해농민봉기’_차용남 구술
048 차경석과 ‘영학당 사건’, 그리고 보천교_차봉남 구술
057 차치구와 최재칠_안영승 구술
060 동학농민전쟁의 차치구와 최재칠, 그리고 차경석_최학주 구술
072 차윤덕과 보천교, 그리고 전봉준_차진수 구술
092 차윤덕과 ‘차씨 가계’_차정민 구술
102 “나의 할아버지와 보천교”_박수옥 구술
114 ‘증산원불교’와 강증산 탄생지_강석환 구술
보천교의 후천선경 신정부 건설운동
118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 관련자 상당수는 주소를 전라북도 정읍에 둔 적 있다”_이대수 구술
121 경남 함양 지곡면의 ‘대황산록 고천제’ 장소_서상수·서옥철·서만삼 구술
127 ‘왜산 물산 안 쓰기 운동’과 보천교_최종섭·최원팔 구술
142 “경주 양동에서 오신 나의 조부님”_이동화 구술
144 “보천교 직조산업과 나의 조부님”_강형희·강희석 구술
148 “나의 조부 김정곤과 보천교”_김지현 구술
167 정읍의 ‘라용균 생가’와 부안군 동진면 ‘경주이씨 재실’_곽형주·이재욱 구술
169 “나의 조부 신철희와 보천교”_신효근 구술
180 청송 중평리 신씨들의 독립운동_신준태 구술
보천교의 독립운동 자금 지원
190 보천교 핵심 간부 김홍규와 그 아들 탄허_서상기 구술
205 해방 공간에 백범 김구가 정읍 태인의 김부곤 집에 머물다_곽규·김금숙 구술
213 “보천교에서 임규를 통해 라용균에게,
라용균이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5만 원을 건넸다”_이강오 구술
217 “만주 신민부의 독립자금은 김성수 씨와 보천교에서 많이 댔다”_박환 구술
보천교계 신종교의 독립운동
220 ‘황극교 사건’과 은세룡_은희반 구술
224 황극교와 ‘김판봉의 항일운동’_김병수 구술
236 원군교를 감시한 어느 한국인 순사의 증언_황석현 구술
245 ‘원군교 사건’의 홍순옥과 홍순문_김우곤 구술
251 태인의 ‘신인동맹 사건’과 장득원_장지홍 구술
260 ‘조선건국단’과 배상일_배효갑 구술
보천교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학술 사업’
268 “풍운아 ‘차천자’와 보천교의 민족운동 조명한 ‘안후상’
… 역사의 그늘진 밭, 발로 찾아내 일궈 햇빛 보게 해”_유기상
274 “정읍 지역 신종교 현지 조사 기록”_김재영·안후상 구술
308 ‘보천교 독립운동 역사’ 복원에 앞장서다_장학수 구술
저자소개
책속에서
[펴내는 글]
‘구술사’란 구술 채록을 의미하지만 구술 채록에만 국한하지는 않는다. 채록으로 생성된 사료를 바탕으로 한 ‘역사 쓰기’도 구술사이기 때문이다. 그간 ‘일제강점기 보천교’는 억울한 측면이 많았다. 일제가 씌운 사교, 사이비종교 등의 프레임 때문이다. 최근에 연구자들은 관련 사료의 발굴을 계기로 일제강점기 보천교가 민족운동을 한 단체 또는 독립운동을 한 단체로 재평가하였다.
그동안 일제강점기 신문과 잡지의 보천교 관련 기사들은 보천교 연구에 활용되었다. 보천교 측 자료가 아닌, 객관적인 자료로써 논문을 구성하겠다는 연구자들의 열정은 이전부터 분명 있었다. 최근에 보천교 관련 일제의 판결문과 검경 자료가 쏟아져나오면서 보천교의 민족운동 연구는 이 전보다 더욱더 활기를 띠었다.
보천교 관련 연구는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지만, 역사 연구가 다 그러하듯, 문헌이 갖는 한계를 관련 연구자들은 절감하였다. 그러한 한계를 구술로써 보완하려는 움직임이 없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보천교와 관련한 구술사를 본격 추진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보천교의 민족운동은 불과 100여 년 전의 일이다. 따라서 관련 연구가 본격 시도되던 당시까지만 하여도 적지 않은 관련 교인이 생존해 있었다. 안타깝게도 그들이 타계하면서 그들의 구술을 더는 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의 생생한 기억을 간직한 후예들이 아직 남아 있다.
필자는 오래전부터 보천교 관련 구술사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이때가 30여 년 전인 1990년경이다. 그때부터 조금씩, 조심스럽게 몇 분 안 되는 보천교 교인을 찾아 나섰다. 그리고 그들의 기억을 들었다. 교주인 차경석의 아들들을 만났고, 당시 보천교 간부를 지낸 이들도 만났다. 좁게는 전라북도 정읍을 위시해 완주와 전주, 그리고 넓게는 서울과 경기도, 경상북도 청송과 경상남도 함양을 찾았다. 관련 기억을 메모했고, 때로는 녹취하였다. 기억을 듣고 나서는 곧바로 활자화 작업에 들어갔다. 그렇게 생성된 기억의 일부는 교차 검토한 끝에 연구에 활용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신중에 신중을 기하다 보니, 관련 구술들은 사장되기 일쑤였다.
문헌의 한계를 절감한 요즈음, 오래전에 생성 축적된 구술이 떠올랐다. 이제는 이러한 구술이 적어도 관심 있는 이들에게 읽혀도 되겠다고 생각하였다. 다행히 정읍시의 지원으로 추가 구술이 더해져서 ‘보천교 독립운동 구술사’라는 책을 발행하기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