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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여행에세이 > 해외여행에세이
· ISBN : 9791195008322
· 쪽수 : 336쪽
책 소개
목차
Prelude
Chapter 1 에스파냐
솔 광장의 햇빛
톨레도 냄새
아, 게르니카
세고비아 대성당의 꽃
아빌라에서
모호한 빛
쿠엥카, 시간의 심연 속으로
회전하는 집
산티아고 밤 열차
대성당
피니스테레, 또 다른 대양을 향한
Restaurante caffeteria ‘DAKAR’ 15:8
Chapter 2 포르투갈, 그리고 다시 에스파냐
리스보아의 푸른 꽃
페나, 나의 궁전
엄만 밥 안 하니까 좋아?
카르모나 파라도르 파티오
코르도바, 멀고 외로운
말라가, 히라솔
네르하, 루마니아 여인
외로운 론다
그라나다, 침묵의 언어
물에 상처받은 아이를 찾아서
나의 천국, 헤네랄리페
무슨 말을 해야 하나
피게라스의 갈라테아
예술가들
아디오스, 에스파냐
Chapter 3 이탈리아
트라파니의 저녁 바다
잃어버린 낙원, 파비그나나
팔레르모를 여행하지 않고 어떻게 살 수 있어요?
카푸친 카타콤
체팔루의 정복자 펠레
아그리젠토 아그리젠토
우리에겐 아직 가야 할 몇 마일이 있다
기차가 바다를 건널 때
나폴리, 폼페이
물에 잠긴 푸른 동굴
파르네세의 헤라클레스
드디어, 로마
라파엘로와 붉은 꽃
바티칸, 디오게네스
엄마가 잘못했다
굿나이트 앤 굿바이!
밤의 포로 로마노
네가 이상한 거야
산타마리아 노벨라 성당
오래된 베키오 다리
시에나 골목
피렌체 야영장을 떠나며
베네치아의 섬들
꿈틀거리는 마법의 숲
트레비소의 눈물
베네치아의 바바리맨
밀라노에서 이틀
Chapter 4 프랑스
이탈리아를 떠나 니스
모나코 태양 아래
기차는 멈출 것이다
크레이프를 기다리는 시간
마르세유 가는 기차
론 강의 낮달
아비뇽, 생 베네제 다리
님으로 가는 길
나는 당신을 이해합니다
엑상프로방스 아침 시장
낭트는 수상해
신은 어디에나 계시니까
골짜기의 백합
카르나크, 시간이 남기고 간 자리
그 여자는 한국말을 모르니까
오래된 엽서들
천국보다 아름다운
어쩐지 눈물나는 파리
징글징글한 루브르
엄마, 나도 사랑을 하게 될까?
슬픔이여 안녕?
24시 메트로 카페
좋은 시대
얼마나 부서지기 쉬운 존재인가
지베르니 가는 길
보들레르, 에스카르고
당신은 한국을 사랑하나요?
네 마음이 이끄는 곳으로
리뷰
책속에서
아빌라에 간다. 태양은 나무들에게 제 모양대로 그늘을 주었다. 투명한 초록의 잎들이 은빛으로 빛난다. 버스는 아카시아꽃이 만발한 작은 마을 라 카소나로 들어간다. 닫힌 버스 안에서도 꽃향기가 난다.
“아빌라는 책자에도 없는데 엄마는 뭐 볼 게 있다고 가?”
“나도 몰라. 시인 로르카가 좋아한 곳이라 그냥 가보고 싶어.”
광활한 평원과 완만한 구릉. 도로변에는 노란 꽃. 꾸미지 않아도 아름다운 여인처럼 꽃들은 어울리는 자리에 흩어져 피어 있다.
열일곱에 나는 이런 길을 가지고 있었다. 노래를 부르며 해가 질 때까지 걷던 길, 자전거를 타고 햇살 속을 달리던 길.
코스모스가 피고 미루나무 가로수 사이로 버스가 오가던 길. 나는 허락한 적이 없는데 누가 그 길들을 다 없애버렸나.
로르카는 《인상과 풍경》에서 아빌라를 쓸쓸하게 그렸다. 추운 겨울 저녁이라 그랬을까. 아름다움 앞에 오는 슬픔 때문일까.
우리는 아름다운 것들에서 슬픔을 먼저 느낀다. 내게 머물 수 없기에, 내가 가질 수 없기에, 바람에 흔들리는 꽃잎을 어찌하랴.
나는 타성에 젖지 않으리라 했다. 고정된 삶을 살지 않으리라, 절대로 《연금술사》에 등장하는 크리스털 장수 같은 삶은 살지 않겠다고 했다. 내 딸들에게 늘 “네가 원하는 길을 가라. 꿈을 포기하지 마라” 했다. 그러나 꿈을 갖고 살기처럼 힘든 일이 있을까. 그 꿈이 나이 들면 절망일 수도 있음을 알게 되면 어쩌나.
영화 <레볼루셔너리 로드Revolutionary Road>에서 아이를 낳고도 꿈을 멈추지 않는 ‘에이프릴’을 그녀의 남편도 친구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정신병원에서 나온 이웃의 수학자 ‘존’은 에이프릴을 이해했다. 존이 말했다. “사람들은 언제나 허무와 절망 속에서 살고 있다고 말하지만 진짜 절망을 보려면 용기가 필요해요.” 에이프릴이 말했다. “나보고 다들 미쳤다는데 미친 것이 제대로 사는 거라면 난 미쳐도 상관없어요!” 그러나 그녀는 자신을 구하지 못했다. 용기 내어 일어서려는 자는 절망을 각오해야 한다. 그 절망을 넘어서야 비로소 꿈이 시작된다.
레비 스트로스는 《슬픈 열대》에서 “인류학자란 필연적으로 자신의 사회 내에서는 비판자가 되며 자신의 사회 밖에서는 동조자가 된다” 했다. 자신의 사회에 결여된 무엇인가를 다른 사회에서 파악하려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류학자만이 그럴까.
예술가도 시인도 여행자도 그렇다.
세상의 모순을 피하려 하지만 더 큰 모순이 기다리고 있다. 내게 결여된 것들을 찾아 여행을 떠나지만 그곳에는 또 다른 결핍이 존재한다. 설령 기대한 것이 있다 해도 내게 올 수 없어 절망에 빠지기도 한다.
여행을 떠나면 세상이 달라지고 사람도 바뀔 줄 알았는데, 시칠리아의 저녁 바다에서 마주친 나는 여전히 모순투성이 인간으로 초라하고 솨니도 쓸쓸해 보인다.
중학교에 들어간 솨니가 불안불안하던 어느 날 “죽을 것 같아, 일분일초도 학교에서 못 견디겠어” 했다.
그즈음 우리 아파트 7층에 사는 고등학생이 투신해 우리 라인 현관 지붕 위로 떨어졌다. 오전 수업이 일찍 끝났다며 솨니가 학교에서 돌아와 현관문을 열고 서서 “엄마, 저기 어떤 사람이 누워 있어” 했다. 4층인 우리 집 계단참에서 엎드려 있는 남학생이 내려다보였다. 내가 늦잠을 자고 있던 토요일 오전이었다.
“일단 기말고사 끝나고 방학 동안 고민해보자.”
나랑 그렇게 약속해놓고 12월 1일 솨니는 방문을 잠갔다. 베란다 쪽 창문도 봉쇄했다. 전문가에 따르면 “이럴 때 부모가 방문을 강제로 열고 들어가면 절대 안 된다” 했다.
나는 아이가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하던 일을 모두 멈추고 방문 앞에서 인기척을 살폈다. 잘 때도 아이 방문 앞에서 잤다. 현관문의 잠금 고리에 작은 종을 달아놓았다.
아이는 식구들이 잠들면 창문을 넘어와 화장실에 가고 냉장고에서 음식들을 꺼내갔다. 나는 냉장고를 비웠고 먹을 것들은 안방에 두고 문을 닫았다. 아이가 볼 수 있도록 화장실 거울에 매일 편지를 붙여놓았다.
보름이 지난 늦은 아침, 아이는 앙상한 다리로 방문을 열고 나왔다. 아이는 국에 밥을 말아 먹으며 눈이 빨개졌다. 나는 식도가 다 헐어 밥이 넘어갈 때마다 쓰라렸다.
욕조에 물을 받아 아이를 씻겨주었다. 거실 해가 드는 곳에 아이를 눕히고 얼굴 마사지를 해주었다. 우리는 레스토랑에 갔고 서점에 들러 책을 사고 영화를 봤다. 솨니는 일단 검정고시를 보겠다고 했다. 다음 날 나는 학교에 가서 아이의 자퇴서를 제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