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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사회과학 > 한국정치사정/정치사 > 한국정치사정/정치사-일반
· ISBN : 9791195872213
· 쪽수 : 322쪽
· 출판일 : 2016-11-10
책 소개
목차
막을 열다 | 광란의 한국 정치사, 그 서막을 열다
일, 혼돈 속 벌거벗은 임금님, 이승만 정권(1945~1960)
김영삼, 김대중, 박정희 사상의 형성기
한국동란
1954년의 제3대 민의원 선거
제4대 민의원 선거와 김영삼, 김대중, 박정희
이, 데모 또 데모, 장면의 단명 내각(1960~1961)
3·15 부정선거
제1공화국의 허와 실: 벌거벗은 임금님 1대손
4·19 학생혁명과 제2공화국의 장면 내각제 등장
데모로 해가 떠서 데모로 해가 지는 9개월 단명 내각과 5·16 군사정변
삼, 대한민국 산업화의 주역, 박정희 정권(1963~1972)
호남 덕분에 당선된 박정희 후보
한일협정
월남 파병과 제1차 경제개발
제6대 대통령 선거
제7대 국회의원 선거
삼선개헌 저지운동
40대 기수론과 김대중의 급부상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와 8대 국회의원 선거
1970년대 초의 국내외 정세와 닉슨 쇼크
사카린 밀수 사건과 정인숙 사건
사, 경직성과 한계, 실패한 유신정권(1972~1979)
유신헌법의 등장
제8대 대통령 선거와 제9대 국회의원 선거
유기천 총장과 황산덕 교수의 유신 참여와 거부
김대중 납치 사건
문세광 사건
전태일 사건
월남전 패망과 김영삼·박정희 영수회담
김옥선 파동
최종길 교수와 장준하 선생의 의문사
3·1 민주구국 선언
이철승의 총재 등장과 중도통합론
카터의 주한 미군 철수론과 박동선 코리아게이트
제3공화국 악인 배신자 김형욱 미스터리
함평 고구마 사건과 안동 감자 사건
이철승의 퇴진과 김영삼의 총재 복귀
YH 사건과 김영삼 제명
유신정권의 몰락과 박정희 경제정책의 한계와 실패 요인
오, 멀어진 민주화의 꿈, 전두환 정권(1980~1987)
12·12 군사쿠데타와 5·16 군사정변 비교
프라하의 봄이 된 서울의 봄
심재철과 신계륜, 이태복, 윤상원의 의견대립 그리고 위화도 회군
광주민주화운동
국보위의 조직과 역할 및 김대중 내란음모 누명
신군부의 위협, 삼청교육대
종속이론과 독재정부
광주 미문화원 방화 사건
부산 미문화원 방화 사건
대구 미문화원 폭발 사건과 미문화원 점거농성
보수와 진보의 기준과 잣대
NLPDR파 NL파와 PD파와 주사파와 민주화운동
김영삼 단식농성과 김대중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 귀국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와 12대 총선
삼민투쟁위원회와 박종철 고문 사망사건
통일민주당 창당과 용팔이 사건
언론통제와 정경유착 사건들
6월 민주화 항쟁과 크레인 브린턴의 혁명의 해부
6·29 선언의 의의와 플라톤의 동굴론
| 막을 닫다 | 피의 투쟁, 마침내 민주화를 개척하다
참고한 자료
인물 찾아가기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1948년 8월 15일에 시작된 제1공화국은 초기부터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출발하였다. 한국은 미국의 절대적인 영향권에 있었다. 미국은 미국 편에 설 수 있는 친미주의자를 대통령으로 선택하고자 하였다. 당시 미국이 주목하는 인물은 민족주의자인 김구와 친미주의자인 서재필 및 이승만을 들 수 있다. 이 중에서 이승만이 서재필보다 적격인 이유는 이승만이 서재필보다 친미적 성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권모술수를 소유한 인물로서 의사 출신인 서재필보다 정치적 성향이 강했다.
한국의 군사정변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미국에 대해서 박정희가 꺼내놓은 카드는 이승만 정권 이후 성사되지 못한 한일관계 정상화 카드였다.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군사정변 직후에 한국을 방문한 미국 국무장관 딘 러스크를 통해서 조속한 시일에 한·일 국교 정상화를 약속하였다. 그해 가을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미국 방문에 앞서 일본을 방문해 당시 이케다 하야토 수상을 방문하여 양국 간의 국교정상화를 제의하였다. 이러한 박정희의 한·일 국교 정상화 카드에 미국의 존 에프 케네디 대통령은 한국의 군사정변을 인정하게 되었다.
5년 후 유신호 침몰의 결정적인 간접적인 요인은 바로 문세광 사건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박정희의 인사 스타일은 한번 사람을 쓰면 금방 바꾸지 않고 오래두는 스타일이다. 만일 문세광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더라면 박정희는 경호실장 박종규를 그대로 등용하고 후에 10·26 사건의 장본인인 차지철을 경호실장으로 등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문세광 사건 이후 박종규는 사건에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그리고 후임에 차지철이 등용 되면서 박정희를 등에 업고서 월권행위를 하였다. 그 결과 박정희 역시 암살당하는 역사적인 불행이 발생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