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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91197138294
· 쪽수 : 224쪽
· 출판일 : 2023-11-30
책 소개
목차
사랑의 일환으로 _8
마이 구미 _48
안녕의 시간 _84
스노볼 _126
나의 비둘기 신부 _168
책속에서
"근데 저 진짜 모르겠던데, 일환역이 어디예요?"
"음…."
여자의 표정이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일환역이 아니고 일환이요. 예전에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그 사람이 거기를 정말 가보고 싶어 했거든요."
"지금은 어디 있는데요, 그 사람?"
"아마 거기로 갔을 거예요."
알 수 없는 말을 늘어놓은 여자는 커피를 빨대로 쑥 빨아들였다. 그 바람에 좀처럼 줄어들지 않던 음료가 절반밖에 남지 않았다. 여자의 옷깃에는 언제 묻힌 것인지 모를 민트색 휘핑크림이 묻어있었다. 그때 연호의 집으로 가는 버스가 정류장에 들어오는 게 보였다. 마지막으로 돌아본 여자의 얼굴색은 여자가 입고 있는 하얀 원피스만큼이나 창백해져 있었다. 연호가 급하게 버스를 향해 뛰어갈 때 여자는 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버스 차창 밖으로 보이는 여자의 몸이 점점 작아지다가 점이 되어 사라졌다.
-「사랑의 일환으로」 중에서
"창경궁 쪽까지 가볼래요?"
끊어진 말과 걸음을 도원이 이어 붙였다. 담벼락을 따라 인적 드문 골목이 길게 나 있었다. 도원과 나의 발소리, 이따금 불어오는 바람이 잎새에 닿아 떨리는 소리가 우리 사이를 흘렀다. 그러다 저 멀리 모여있는 무리가 눈에 띄었다. 언뜻 보아도 서넛의 학생들이 한 명의 학생을 괴롭히는 게 확실해 보였다. 도원은 내게 눈짓했다. 저쪽으로 가자고. 분명 잘못된 일이 벌어지고 있으니 우리가 가서 어떻게든 해보자고. 네가 응한다면 내가 해결할 것이라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나는 도원의 팔을 잡아끌며 방향을 틀었다. 최대한 그들의 눈에 띄지 않으려 소리를 죽이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괜한 문제를 일으킬 필요는 없었으니까. 어떤 화를 입을지 모를 일이니까. 사건 사고에는 휘말리지 않는 쪽이 나으니까. 그날 나는 도원의 눈에 비친 분명한 실망을 보았다. 우리는 말없이 길을 돌아 걸었고, 도원은 이제 그만 가봐야겠다고 말했다. 창경궁으로 가려면 길을 건너고 터널을 지나야 했는데도 말이다.
-「마이 구미」 중에서
정환이 열흘간 지방으로 출장을 가서 얼굴조차 볼 수 없었을 때, 연우는 서울역을 찾았다. 마침 쉬는 날이었다. 바깥에서 보는 서울역의 외양은 10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나, 로비에 들어서니 변화를 실감했다. 이제는 완전히 자리 잡은 3D 홀로그램 간판들이 연우의 정신을 사납게 했다. 예전에 비하면 눈에 띄게 오가는 사람들의 수가 줄었다. 인구 절벽이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이 이제는 피부로 느껴질 지경이었다. 연우는 전보다 상대적으로 넓어 보이는 로비를 거닐었다. 정환과 처음 만났던 벤치에 앉아보기 위해 로비를 몇 바퀴나 돌았지만, 끝내 찾을 수 없었다. 연우의 기억에 벤치가 있어야 할 장소는 사라진 게 분명했다. 아쉬운 마음에 주위를 돌아보다 연우는 신기한 곳을 발견했다. '타임 트래블러'라는 여행사 로고가 먼저 연우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산란한 빛으로 구현되고 있는 3D 홀로그램 홍보문구가 허공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가만히 보고 있자니 꽤 긴 문장이었다.
'당신의 과거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추억의 한 페이지를 더 선명하게 기억할 수 있어요. 미래의 당신이 궁금하다면 정교한 시뮬레이션과 통계 누적치를 바탕으로 한 미래 여행을 떠나보세요. 당신의 현재는 한층 더 풍성해질 겁니다. 당신의 소중한 시간을 넉넉하게 확보해 드립니다. 당신의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드는 여행사, 타임 트래블러입니다.
-「안녕의 시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