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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역사소설 > 한국 역사소설
· ISBN : 9791197171505
· 쪽수 : 448쪽
· 출판일 : 2020-12-23
책 소개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나는 본래 성질이 더럽게 거칠고 과격하다. 그래서 세상의 속된 무리와 화합하지 않는다. 나를 욕하는 무리들은 그 입에 더러움을 묻힐 것이다. 허나 불온하다는 것은 불편함의 또 다른 이름이 아니겠는가.
어느 나뭇가지에 앉은 휘파람새가 울고 있었다. 분명하게 또렷하지는 않지만 화답이 있었다.
그것은 자유로움의 또 다른 이름이 아니겠는가.
누이의 목소리였다. 누이? 균은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가슴이 격하게 뛰었다. 누이! 기다려! 균은 미친 듯이 말을 달렸다. 그러다가 점점 실망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숲을 달려도 새소리밖엔 없었다.
― 네 아내는 너의 종이 아니라 아기를 키우는 어머니야!
균은 신발을 신은 채로 대청마루에 올라가서 김성립에게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균은 김성립의 배에 올라타고 앉아서 멱살을 움켜잡았다.
― 여자가 슬프면 우주가 슬픈 거야! 아기의 어머니를 괴롭히는데 아기가 온전히 자라겠어? 이 개보다 못한 자식아!
균은 말 한마디씩 내지를 때마다 김성립의 면상을 주먹으로 한 번씩 내리쳤다.
― 아이고, 내 아들!
김성립의 얼굴이 온통 피투성이가 되고, 그것을 본 송씨 부인이 균에게 달려들었다. 송씨 부인은 아들보다 키가 큰 여자였다. 살찌고 다부진 어깨에 저고리가 팽팽했다. 송씨 부인은 균과 실랑이하다가 옥색 저고리 실밥이 툭 터졌다.
………
― 자연의 이치가 먼저겠느냐? 유학의 예교가 먼저겠느냐? 누가 며느리의 예법을 가르쳤느냐! 나는 매형의 예법도 사돈의 예법도 가르치지 않았어!
균이 김성립을 발로 걷어차며 말했다.
― 이놈이 내 아들을 감히!
송씨 부인이 균의 팔을 물어뜯으려 와락 덤벼들었다. 균이 오른팔로 밀치자 송씨 부인이 뒤로 벌렁 나자빠지면서 호롱불이 마룻바닥으로 넘어져 깨졌다.
악! 송씨 부인이 불이 붙은 자줏빛 치마를 벗어던졌다. 아이고! 마님! 노비들이 대청마루로 일제히 올라오면서 아수라장이 되었다.
― 학의 다리가 길다고 잘라서야 되겠습니까?
― 누가 잘랐다고 그래욧!
언년이가 균을 내리치려고 솥뚜껑을 번쩍 들고 앞으로 내달리다가 기둥에 부딪혔다.
― 두고 보면 알게 되겠지요! 진실은 얼굴을 가장 늦게 내미는 손님이니까! 누이의 시들은 내가 가져갈 거야. 마동이도!
한 마리 불새를 보았던가? 균은 씨근덕거리며 솟을대문을 발로 힘껏 걷어찼다. 육중한 솟을대문이 삐걱, 아주 느리게 열렸다.
누이의 시를 읽을수록 희뿌연 안개 속에 완전히 갇힌 느낌이었다. 달빛이 한층 흐려지면서 달빛과 섞인 햇빛이 꾸물꾸물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 거울에 난새를 그리며 놀던 누이. 난새가 춤추지 않는 건 사랑을 잃었다는 뜻이야. 사랑을 잃은 여자가 거울을 보지 않기 때문에 거울에 먼지가 끼었다는 것이 아닌가? 누이는 예쁘게 화장하는 걸 좋아했어! 누구보다도 정이 많은 여자였다고!
균의 무릎 위로 시들이 쌓여갔다. 그러다가 시 하나에 균의 눈길이 딱 멎었다.
파란 바닷물은 요해를 침범하고
청란은 채란신조와 인연으로 만났네.
부용화 27송이 휘늘어져
차가운 달빛 서리에 붉게 떨어지네.
- <몽유광상산시夢遊廣桑山詩>, 꿈에 광상산에서 놀다 -
의외의 시였다. 균이 알고 있는 누이는 연꽃은 지는 것이지 떨어지는 것으로 표현하지 않았다. 바닷물, 새, 꽃, 완전한 비유였다. 균은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시구가 머리에서 맴을 돌았다. 부용꽃 27송이가 떨어지고 달빛 서리는 차갑다. 누이는 시구처럼 27살에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