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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역사소설 > 한국 역사소설
· ISBN : 9791197171512
· 쪽수 : 570쪽
· 출판일 : 2022-09-15
책 소개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기와 담장 주위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소리가 없었기 때문에 움직임이 없었고, 움직임이 없었기 때문에 평화로웠다. 조대비는 조용한 평화를 눈으로 음미하듯 바라보았다. 소소한 나무들 사이에서 울음을 우는 새는 없었고 화려한 꽃들 사이를 나비가 날고 있었다. 소리가 없었기 때문에 나비의 율동은 움직이는 그림처럼 보였다.
조대비는 방문을 열면 그림처럼 들어오는 풍경을 좋아했다. 방문으로 보이는 꽃들은 액자를 걸어놓은 것처럼 크기가 꼭 맞아야 했다. 조성하는 방문 크기에 맞춰 꽃을 심었다. 꽃 주위 돌에는 천년의 시간을 의미하는 목숨 수壽 글자를 음각했다. 철쭉 옆으로 매발톱꽃이 야생냄새를 풍겼고 매발톱꽃 옆으로 가막살나무, 때죽나무, 오동나무 잎들이 비밀스런 그늘을 만들었다.
방문이 많은 집이어야 했다. 사방으로 벽보다 방문이 많아서 바람이 수시로 드나들어야 했고 마당에는 꽃들이 계절 따라 피어서 꽃이 없는 날은 없어야 했고 햇빛, 비, 눈이 하늘에서 자유롭게 내리는 대로 볼 수 있어야 했다. 조대비 말에 따르면 자연은 자유롭지 않고 질서정연했다. 조대비가 원하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질서였다.
탕! 탕! 탕!
이하응은 사랑방에서 난을 치다가 어깨를 움찔했고 붓질은 어긋났다. 총소리를 들으며 붓을 댄 순간 난엽은 그 자리에서 푹 꺾여버렸다. 귓가의 총소리는 사라졌고 종이에 남은 것은 빗나간 선이었다. 이하응은 화가 난 표정으로 종이를 마구 구겨서 방문으로 휙 던졌다. 방문 앞에는 종이 뭉치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집이 창덕궁과 가까운 탓이었다. 금년 들어 농민들은 서너 달에 한 번꼴로 궁궐 앞에서 시끄럽게 시위했다. 수문군들이 모두 붙잡아 신분 조사를 해보면 농민들도 아니었다. 과거에 농사를 지었든 장사를 했든 지금은 생계가 막막한 양민들이었다. 수문군들 입장에서는 농민들을 붙잡는 일도 시들해진 모양이었다.
이 세상 어디가 도원桃源이냐. 도원은 아득한 거리에서 등 돌리고 있구나. 싸움 끝에 남은 적막을 책임질 자는 누구냐.
이하응은 남은 먹물로 글자를 휘갈겨 쓰고는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지독히 권태로운 날들이었다. 총소리가 들려도 권태롭기는 마찬가지였다. 방안에 칩거한 지 달포가 지나있었다. 기방에서 잠을 자거나 술 먹고 시회 패거리와 싸움질하다가 그것도 싫증이 나면 종친 모임에서 바둑을 두다가 바둑판을 엎어버렸다. 어쩌다가 술기운에 김병기 멱살을 움켜쥐고 주먹을 날리면 기분은 화끈하게 풀렸는데 거물을 건드린 만큼 후환이 컸다. 언제 어디서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지 모를 일이라서 적어도 한 계절은 방안에서 두문불출해야 했다. 김병기를 교방에서 만났다가 술상을 엎어버린 이후로 지금은 얌전히 앉아 묵란을 치는 중이었다.
먼 하늘은 늦여름의 물기를 왕창 떨어트리고 있었다. 시야가 지독하게 흐린 날이었다. 이하응은 희뿌연 산길을 따라 올라가고 있었다. 한 걸음씩 걸을 때마다 안개는 한 발자국씩만 물러섰다.
어딘가 웅숭깊은 샘물이 있어서 차디찬 허공으로 흰 빛깔을 계속 뿜어내는 것 같았다. 이하응은 안개로 꽉 차 있는 길을 걸어가다가 저도 모르게 아, 심호흡을 했다. 안개 속에서 맥문동 꽃밭을 딱 마주친 순간 가슴은 선택된 색깔로 흐려졌다. 뿌옇게 퍼진 황금색 바탕에 이리저리 검은 선을 그은 몽유도원도처럼 뿌옇게 퍼진 흰색 바탕에 이리저리 보랏빛 선이 그어진 풍경이었다.
맥문동은 꽃대가 긴 보라색 꽃이었다. 하늘로 솟은 기다란 꽃대들 때문에 창을 든 병사들처럼 보였다. 기다란 꽃들은 셀 수 없이 빽빽했고 촘촘했다. 사열 중인 병사들처럼 질서 있게 피어있는 꽃무리였다. 보랏빛 꽃무리는 눈동자에 강하게 휘감겨들었다. 창을 든 병사처럼, 천을 뚫는 바늘처럼 날카롭게 보이는 꽃들이었다. 이하응은 맥문동 밭을 넋 놓고 쳐다보다가 꽃대 하나를 슬며시 꺾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