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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위안부 인사이드 아웃

일본군 위안부 인사이드 아웃

주익종 (지은이)
이승만북스
30,000원

일반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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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위안부 인사이드 아웃
eBook 미리보기

책 정보

· 제목 : 일본군 위안부 인사이드 아웃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한국근현대사 > 일제치하/항일시대
· ISBN : 9791198538109
· 쪽수 : 496쪽
· 출판일 : 2023-12-07

책 소개

주익종의 <일본군 위안부 인사이드 아웃>. 1부 '일본군 위안소는 어떻게 설치되었나', 2부 '그녀들은 어떻게 일본군 위안부가 되었나', 3부 '위안소에서의 생활은 어떠하였나'로 구성되었다.
수만 혹은 수십만 조선인 여성(상당수가 소녀)이 일본군 위안부로 강제연행되어 성노예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2015년 한일 위안부합의를 무력화하고 일본 정부가 1~2억 원씩 전 위안부에게 배상하라는 한국 법원판결을 낳은 진원지이다. 오늘날 다수의 한국인이 이 위안부 서사를 사실로 간주한다. 그러나 실상 이는 한일 양국의 좌익 지식인, 운동가가 합작하여 지어낸, 가짜 이야기이다. 저자 주익종은 위안소 관계 일본군 자료와 기존 연구를 토대로 하여 일본군 위안부의 진짜 이야기를 밝혔다.
일본군의 부속 시설인 위안소를 설치하기 위해 일본군은 위안소 업주를 선정하였다. 이 업주가 여성을 모집하였는데, 대개 빈곤.가정의 친권자에게 전차금을 주고 딸을 넘겨받았다. 그것은 여성 측이 받은 선불보수(=전차금)를 위안소에서의 위안 행위로 갚는 계약이었다. 이는 국내 창기나 작부를 모집하는 방식과 같았다. 식민지 조선에서 일본 관헌이 여성을 위안부로 강제로 끌어가는 일은 없었으며 여성을 유괴해서 위안부로 만드는 일도 매우 드물었다. 승낙서, 호적등본, 인감증명서, 계약서 등 친권자가 딸의 위안부 취업에 동의한다는 서류를 갖추어야 여성이 전장의 위안소로 건너갈 수 있었다. 일본군은 위안소를 세밀히 관리하였다. 위안부는 전차금을 갚은 후에는 저축도 할 수 있었다. 당시의 법적 연령(만 17세) 이상의 여성이 동원되었고 조선인 위안부 경험자는 도합 7,000명 정도로 추정된다.
가짜 이야기를 설파해 온 한국의 위안부 운동은 이제 그 동력을 잃었다. 일본의 수십 차례의 사과, 두 차례의 위로금 지급, 한국 정부의 생활비 지원과 위안부에 대한 시각 교정 등으로 위안부의 명예도 회복되었다. 앞으로 필요한 것은 지난 30여 년간 위안부 가짜 이야기가 횡행할 때 한국의 대학과 언론 등 지식사회가 왜 그를 전혀 제지하지 않았는가에 대한 성찰이다. 위안부 문제의 경과를 제대로 복기하지 않으면, 한국인은 향후 거짓에 휘둘리는 역사를 반복할 것이기 때문이다.

지성과 이성의 말살 언저리의 한국
자유민주주의는 개인의 근본적 자유에 입각해 있다.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 학문의 자유는 그 핵심이다. 1933년 나치가 ‘반(反)독일 정신’ 서적을 불태웠을 때 이 개인의 근본적 자유는 함께 불살라졌다. 이후 독일은 광기의 파시즘 체제로 이행하였다. 21세기 한국도 이 개인의 근본적 자유를 보장하지 않는다. 한국인이 일본군 위안부에 관해 ‘강제연행된 성노예’ 이외의 의견을 내려면 목을 걸어야 한다. 직장을 잃거나 벌금형을 받거나 징역을 살아야 한다.
2013년 강제연행 성노예설의 획일성을 비판한 책을 낸 세종대 박유하 교수는 위안부 명예훼손 혐의로 2심에서 유죄판결을 받았다가 6년 만인 2023년 10월 대법원에서 가까스로 무죄 취지 판결을 받았다. 2017년 대학 강의 중에 위안부가 위안부 일임을 알고서 자발적으로 갔다고 발언한 순천대의 한 교수는 파면되고 징역 6개월의 실형까지 살았다. 역시 강의에서 위안부가 매춘의 일종이라고 설명한 전 연세대 류석춘 교수는 징역 1년 형이 구형되었으며, 역시 강의에서 위안부는 생계를 위해 자발적으로 나선 사람들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한 경희대 최정식 교수는 학교 측의 징계를 앞두고 있다.
나와 상관없으니 괜찮은가? 1933년 나치가 반 독일 정신 책을 불태울 때도 많은 사람들이 별 관계가 없었다. 하지만 일본군 위안부에 관해 특정 의견이 아닌, 다른 의견을 내면 처벌받는 21세기 한국은 1933년의 독일과 같이 지성과 이성의 말살 언저리에 있다.

일본군 위안부에 관한 당시의 지식은 온당한가
당신이 보통의 한국인이라면 아마도 일본군 위안부에 관해 다음의 지식을 갖고 있을 것이다.

거리에서, 마을 우물가에서 혹은 집에서 일본 관헌에 붙잡힌 조선인 소녀가 일본 침략 전장에 끌려가 위안부가 된다. 이런 소녀는 수십만 명에 달한다. 위안소에서 조선인 소녀는 일본군의 성 노리개로서 혹사당할 뿐 아니라 학대와 폭행을 당한다. 끝내 그 소녀는 고국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고 일본군 패전 때 학살당한다. 운 좋게 살아 돌아온 소녀는 훗날 할머니가 되어서야 위안부 실태를 고발하여 일본을 규탄한다. 하지만 일본은 아직도 진정한 사과와 배상을 거부한다.

이는 전형적인 위안부 이야기, 서사(敍事)다. 2016년 개봉된 영화 <귀향>에서도 일본 군인이 소녀를 위안부로 끌어간 것으로 나왔다.

그러나 일본 군인이 딸을 저렇게 강제로 끌어갈 때 그 부모는, 형제는 무엇을 했던가. 저항하면 총으로 쏴 죽이고 칼로 찔렀기 때문에 저항할 수 없었나. 딸이나 누이동생의 강제연행을 막으려다 죽거나 다친 위안부 가족에 관한 이야기는 왜 없나. 수십만의 조선인 위안부가 위안소에서 하루에도 수십 회씩 일본 군인에게 강간당했다면, 일본군은 전투는 안 하고 매일 같이 위안소를 드나들었다는 것인가. 그리고 그 많은 위안부가 전장에서 버려지고 학살당해서 돌아오지 못했다면, 해방 후에라도 수십만의 피해 가정이 문제를 제기했을 터인데, 그런 일은 왜 없었던가. 20여 년에 걸친 한일회담에서 한국 측은 일본 측에 왜 이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던가. 일본군 위안부에 관해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을 해방~1980년대에는 이 문제가 제기되지 않았다가, 그런 사람들이 대부분 죽어서 없어진 1990년대에 와서야 이 문제가 크게 불거진 것은 무엇 때문인가.
위의 강제연행 성노예 서사로는 이런 당연한 질문에 답할 수 없음이 분명하다. 위안부에 관한 당신의 지식은 온당하지 않다. 당신은 지어낸 이야기에 사로잡혀 있다.

위안부 이야기는 실은 지어낸 것
1992년 8월 이용수는 친구 엄마가 친구와 함께 좋은 곳에 일하러 가라고 제안하자 부모 모르게 새벽에 집을 나선 후 빨간 원피스와 가죽구두에 혹해서 모집인을 따라갔다고 증언하였다. 이는 정대협의 첫 증언집에, 그리고 무엇보다도 KBS TV 출연 영상에 담겼다. 하지만 훗날 이용수는 일본 관헌에 의해 강제로 끌려갔다고 자신의 증언을 바꾸었다. 특히 2007년 2월 16일 미 의회 청문회에서 이용수는 “군인하고 그 여자아이하고 들어와서 어깨를 이렇게 둘러싸고 한 손으로 입을 막고 군인은 뒤에서 등에 뭔가를 콱 찌르면서 그냥 끌려갔습니다. 밤에”라고 증언하였다.
실상 위안부 이야기의 대부분은 이런 증언으로 구성되었다. 사람의 말은 언제든 바뀔 수 있으며 기억조차도 시간에 따라 변형된다. 증언과 같은 구술자료는 사실 검증을 거쳐야 하지만, 증언을 채록안 위안부 운동가들은 아무런 사료 비판 없이 “피해자의 증언이 진실”이라고 강변하였다.
일본의 이른바 인권변호사 토츠카 에쓰로는 1992년 2월 유엔 인권위원회에서 위안부 제도를 성노예제로 규정하였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막 제기되었을 뿐, 아직 관련 자료도 발굴되지 않아 아무도 그 실태를 몰랐던 때였다. 위안부 운동가들은 그후 계속하여 성노예론을 주장한바, 이것은 미리 내린 결론에 관련 자료를 짜 맞춘 것에 불과하였다.

위안부의 가짜 이야기가 아닌 진짜 이야기는?
•전장에서 위안소를 설치한 것은 일본군이지만 일본군은 업자를 선정하였고 업자가 여성을 모집하였다. 업자는 가난한 가정, 결손 가정의 호주, 친권자에게 전차금을 주고 여성과 동의서, 호적등본, 인감증명 등 관련 서류를 넘겨받았으며 여성의 거주지 경찰서에서 신분증명서를 발급받아야 했다. 이 서류 없이는 업주와 여성은 중국이나 동남아 전장의 위안소로 갈 수 없었다. 업주와 여성 측 간에 위안부 계약이 있었다.
•위안부를 모집하는 방식은 국내에서 작부와 창기를 모집하는 방식과 같았다. 모집인이 농촌의 가난한 가정을 찾아가 좋은 일자리가 있으며 보수도 미리 주겠다고 감언이설로 꾀면 워낙 가난한 빈농가 부모가 솔깃해서 딸을 내놓았다. 모집인은 그 딸을 데리고 도회지에 와서 소개업자를 통해 공창이나 요릿집에 넘겼다. 때로는 그 딸을 2~3년간 기생 수업을 시킨 후 기생으로 만들기도 했다.
•위안부 운동가들은 위안부로 수십만 명이, 그것도 식민지 조선에서 가장 많이 동원되었다고 하나,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일본군이 전투는 안 하고 매일 같이 위안소를 들락거린다면 위안부 수십만 명이 필요했을 것이다. 위안부는 전장의 일본군 수 150명당 1명이라는 일정 비율로 동원되었던바, 교체된 위안부까지 포함하여 1937-1945년간 총 3만 5천여 명에 달하였고 그중 조선인은 20%인 7천여 명이었다.
•위안부의 나이는 모두 17세 이상이었다. 조선인 위안부는 일본인 위안부보다는 젊었으나 모두 법적 연령(만 17세) 이상이었다.
•위안소에서 위안부는 위안행위를 제공한 대가로 업주에게서 나누어 받은 수입으로 채무(출발 전 받은 전차금)를 갚고 때로는 저축도 하였다.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위안부가 되었으나, 좌절하지 않고 새 길을 찾기 위해 위안소에서 열심히 일하고 저축한 여성의 이야기도 많이 있다.
•위안부 폭행과 학대 이야기도 있으나, 일본군과 위안소 업주 모두 위안부를 잘 관리할 이유가 충분하였다. 위안부를 폭행하고 학대하는 일은 일본군과 업주 모두에게 큰 손해가 나는 일이었다. 위안부 학살의 증거는 없다. 30여 년의 조사 연구에도 불구하고 위안부 학살 사실은 발견되지 않았다.
•대개의 위안부는 계약기간이 끝난 후 귀환하였다. 때로는 상당한 돈을 모아서 돌아왔다. 그러나 교통편을 제공받지 못해서 혹은 너무 늦게 위안부가 된 까닭에 일본의 항복까지 귀국하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일본군 패주 전장의 위안부는 연합군의 폭격에 희생되기도 했으며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

저자는 어떻게 일본군 위안부제의 진짜 이야기를 밝혔나?
지난 30여 년간 위안부 운동을 뒷받침하기 위해 수많은 연구가 나왔다. 관련 자료도 발굴되었다. 그 자료를 있는 그대로 읽고 해석하면 그 진실에 다다를 수 있다. 왜곡된 시각, 강제연행 성노예론의 시각으로 자료를 보니 편향되고 왜곡된, 엉터리 해석이 나온다. 신분증명서가 있어야 중국에 갈 수 있었는데, 일본인 여성은 그랬지만 조선인 여성은 아무 서류 없이도 중국에 갈 수 있었다고 보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중일전쟁 발발 후 조선에서 중국에 가는 입국자는 목적과 도착지, 남녀, 지위 등에 따라 모두 카운트되었다. 저자는 위안부 운동그룹이 발굴한 자료를 읽고, 그들이 내놓은 연구를 인용해서 이 책을 썼다.

위안부 가짜 이야기가 횡행하게 된 이유는?
현재의 위안부 이야기는 1990·2000년대에 창작되어 한국인의 뇌리는 물론, 세계인의 머릿속에 주입된 것이다. 일본군이 조선 여성을 강제로 끌고가 성 노리개로 삼았다가 버림받았다는 이야기에 한국인은 격분하였다. 위안부 강제연행 성노예설은 한국인 사이에 널리 퍼졌고, 일본의 사죄와 책임자 처벌, 법적 배상의 목소리가 거세졌다.
그 주창자인 한국의 정대협(현 정의연)과 일본의 좌익 연구자들은 그 가공의 스토리를 무기로 삼아 일본 정부에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였다. 도의적 책임을 인정한 일본 정부가 여러 차례 사과하고 위로금을 지급하였으나, 위안부 운동가들은 그것을 거부하였다. 그 때문에 한일관계는 파탄 상태에 이르렀다. 이는 날조 편집한 역사로 반일 정치투쟁을 이끈 전형적인 역사정치였으며, 이 위안부 운동가들은 정치집단으로서 중국 문화혁명의 홍위병에 비견할 만한 역사홍위병이었다.

위안부 피해를 부정하는가?
많은 여성이 본인 의사에 반하여 위안부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많은 수의 국내 작부, 창기도 본인 의사에 반해서 만들어졌다. 위안부 피해를 이야기하면서 작부·창기 피해는 이야기하지 않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작부·창기 피해의 가해자는 누구인가. 공창제를 만든 일본 정부인가. 아니다. 모든 걸 일본 정부 탓이라 할 수는 없다. 작부, ·창기를 만든 것은 극도의 가난, 빈곤이다. 마찬가지로 위안부 피해를 낳은 것도 극도의 가난, 빈곤이다.
실은 “본인 의사에 반해서”는 피해의 판단 기준이 될 수 없다. 여성을 위안소 업주에게 넘겨준 것은 그 가족, 호주·친권자였다. 이는 당시 흔히 행해진 합법적 계약이요 거래였다. 일본군-업주-여성의 호주·친권자가 위안부 동원의 책임자이므로, 그 책임을 추궁한다면 세 주체 모두에게 각각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 이미 사망한 업주와 여성의 호주·친권자의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그것을 모두 일본 정부에 추궁할 일은 아니다.
위안소제의 가장 큰 문제는 패전 시 일본군이 위안소에 대해 아무런 대책을 마련하지 않았던 점이다. 일본군은 패주 전장에서도 새로 위안소를 설치하였고, 패전의 피해는 위안부에게도 떨어졌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전망은?
위안부 운동은 위안부제의 사실, 진실에 입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제 동력을 상실하였다. 일본 정부가 위안부 문제로 또다시 사과하거나 위자료를 지급할 일은 없다. 이미 한일 위안부합의가 있었으므로 한일 간에 다시 외교교섭을 할 일이 없다. 그리고 한국 정부는 지난 30년 동안 전 위안부에게 생활보조금과 위로금을 충분히 지급하였다. 당시 조센삐로 불리고 천대받았던 전 위안부들도 일본군에 의해 전시에 동원된 피해자로서 인식되어 그 명예도 상당 회복되었다. 이제는 더 이상 한일간에 위안부 문제란 없다.

한국 지식사회는 반성해야
한국인은 지난 30여 년간 왜 진실에 입각하지 않은 운동에 그토록 휘둘렸던가를 스스로 물어야 한다. 왜 위안부의 실상이 이토록 왜곡되고 위안부 문제가 이토록 오래 계속되었던가를 성찰해야 한다. 한국의 지식사회는, 특히 역사학자들은 지난 30여 년간 일본군 위안부에 관해 거짓이 난무하고 국가사회적으로 혼란이 일어나는 것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한, 아니 그 반일 효과를 즐긴 과오를 진지하게 반성해야 한다. 아우슈비츠수용소 박물관에는 미국의 철학자이자 작가 조지 산타야나의 “과거를 기억 못 하는 이들은 그 과거를 반복하기 마련이다”라는 경구가 있다. 우리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제대로 복기하지 않으면, 우리는 거짓에 휘둘리는 역사를 다시 살게 될 것이다.

목차

책머리에
프롤로그: 허물어지는 거짓의 바벨탑

제1부 일본군 위안소는 어떻게 설치되었나
01 일본군 위안소의 설치
02 위안부 수는?

제2부 그녀들은 어떻게 일본군 위안부가 되었나
03 위안부 강제연행설의 형성과 득세
04 위안부 계약론의 전개
05 위안부 계약의 증거
06 정대협 증언록으로 본 ‘위안부 되기’
07 조선 내 작부와 창기가 되는 경로
08 객관적 자료로 본 ‘위안부 되기’

제3부 위안소에서의 생활은 어떠하였나
09 업주-위안부 간 계약조건
10 위안소 영업과 위안부의 일, 소득
11 그래서 성노예였던가?
12 일본군 패주 전장의 위안부
13 위안부 학살이라는 거짓말

에필로그: 더 이상 한일 간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없다

참고문헌
찾아보기

저자소개

주익종 (지은이)    정보 더보기
서울대에서 일제하 한국경제사 연구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을 거쳐 현재 이승만학당 이사로서 한국 근현대사 연구와 교육 업무를 하고 있다. 저서로『대군의 척후』(푸른역사, 2008)와 『고도성장 시대를 열다』(공저, 해남, 2017),『반일 종족주의』1·2권(공저, 미래사, 2019~2020), 『일본군 위안부 인사이드 아웃』(이승만북스, 2023)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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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위안소 설치) 일본군이 업자를 선정하고 건물을 제공하며 그 경영 전반을 관리‧감독한 본연의 군 위안소는 중국, 동남아, 남양 등의 전장에 설치되었으며, 적(소련)과 대치하는 만주의 접경 지역이나 곧 전투가 벌어질 일본 본토의 몇몇 최전선 지역에도 군이 위안소를 설치하였다. 그밖의 만주에서는 관동군이 민간업소를 위안소로 지정하여 군인이 이용토록 하고 감독 통제하였으며, 반면 그밖의 일본, 대만, 조선 등에서는 민간이 만든 접객업소를 군인도 이용하는 정도였다. 이렇게 보면 군 위안소는 해외 전장과 만주 일부 지역에 있었고, 일본, 대만, 조선에는 없었다고 하겠다.


(위안부 수) 중일전쟁기에는 최대 80만의 일본군이 투입되었을 뿐이다. 그때는 위안부 수가 5만 명만 되어도, 위안부 1인당 1일 평균 일본군 5명을 상대할 경우 1일 위안 행위 수는 25만 회가 된다. 중일 전장의 모든 일본군이 역시 3일에 한 번씩 위안소를 이용하는 것이 되므로, 위안부 5만 명설조차도 현설성이 없다. 전체 위안부 20만 명설은 터무니없이 과장된 것이며, 그보다 적게 잡은 5~7만 명설도 정도만 덜할 뿐 과장되기는 마찬가지다.


(위안부 강제연행?) 강제연행론자들이 위안부에 관한 실증 연구를 하면 할수록 분명해지는 것은 조선에서 군과 경찰, 총독부 등 공권력이 아니라 업자가 위안부를 모았다는 것이다. 요시미 등이 1995년 낸 『공동연구 종군위안부共同硏究從軍慰安婦』가 대표적으로 그러하다. 일본, 대만, 조선에서 위안부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다룬 이 책의 제3장의 제목은 ‘군위안부의 징집’이지만, 내용은 공권력이 위안부를 징집한 게 아니라 업자가 위안부를 모집했다는 것이다. 우선, 일본에서는 군이 선정한 업자에게 위안부 모집을 위탁하였으며, 업자가 빈민층 딸들을 전차금으로 유혹하여 위안부로 모집하였다. 대만에서는 위안부 증언자 48명 중 33인이 브로커, 즉 소개업자를 통해서 위안부가 되었고 8명이 관리에 의해서 위안부가 되었다. 그리고 조선에서는 빈곤층이 퇴적된 결과로 그 여성이 접객업에 취업하게 되었으며(push 요인), 업자가 여성을 감언이설로 꾀거나(취업사기) 인신매매하거나 유인 납치하여 위안부로 만들었다(pull 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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